http://blog.aladin.co.kr/718825194/4386292#C2269386 에 어떤 분이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라며 아래와 같은 답변을 달았다.

 

이 책의 저자입니다. 알라딘 리뷰를 지금 접하여 늦으나마 이덕하님의 흥분된 비난에 대하여 답변드립니다.

(1)incomplete lineage sorting(ILS) 방법론 참조 혹은 최근논문 Prüfer, K. The bonobo genome compared with the chimpanzee and human genomes. Nature. Posted on nature.com June 13, 2012 참조

(2)유전자증식이 아니라 자기 개체만의 유전자증식이라는 앞의 문장을 있음을 참조

(3) 강신익의 대담에서, "인간사회가 침팬지처럼 되어야" 그 앞뒤 문장을 참조

(4)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 프레시안 ㅣ 2011-03-10 참조

(5) 최종덕,"진화에서 인과성과 우연성의 통합적 설명" <과학철학> 151(2012) 참조

 

이 글은 그 답변에 대한 반박이다.

 

 

 

 

 

<<< 침팬지, 보노보, 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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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영장류 중에서 침팬지 계통과 호모사피엔스가 엄청난 차이가 나는 줄 알고 있었죠. 유인원 중에는 침팬지와 고릴라, 보노보, 오랑우탄이 있는데, 알고 봤더니 보노보와 침팬지 사이의 DNA 차이보다 보노보와 인간 사이의 DNA 차이가 더 적은 거예요.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런 결과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죠. 그러니까 종과 종 사이의 구분이라는 게 무의미해지는 거예요.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60, 최종덕)

 

예컨대 보노보는 침팬지와 거의 같아 보이지만 계통수로 볼 때 침팬지보다 인간에게 훨씬 가까운 호미니드종입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234, 강신익)

 

일반 침팬지(common chimpanzee, 그냥침팬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와 보노보 침팬지(bobono chimpanzee, bonobo)는 약 3백만 년 전쯤에 갈라졌다. 침팬지와 인간은 약 6백만 년 전쯤에 갈라졌다. 따라서보노보와 침팬지 사이의 DNA 차이보다 보노보와 인간 사이의 DNA 차이가 더 적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유전체(genome)의 특정 부분만 보면 그런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비교한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단순한 실수일까? “고릴라와 침팬지 사이의 DNA 차이보다 침팬지와 인간 사이의 DNA 차이가 더 적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실수를 한 것일까? 아니면 이번에도 진화론에 대한 최종덕의 무식이 활개를 친 것일까? 어쨌든 강신익도 그런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왜 종과 종 사이의 구분이라는 게 무의미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나? 물론 종 개념에 애매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남녀의 구분도 무의미해지고 밤낮의 구분도 무의미해진다. 수학과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용어에는 애매성이 어느 정도는 있다. 그렇다고 그런 개념 구분이 다 무의미해지나? 또한 여기에서는 종 개념의 애매성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보노보와 침팬지 사이의 DNA 차이보다 보노보와 인간 사이의 DNA 차이가 더 적기 때문에 종과 종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단다.

 

내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같은 쓰레기를 비판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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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incomplete lineage sorting(ILS) 방법론 참조 혹은 최근논문 Prüfer, K. The bonobo genome compared with the chimpanzee and human genomes. Nature. Posted on nature.com June 13, 2012 참조

http://blog.aladin.co.kr/718825194/4386292#C226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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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아래 구절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We find that more than three per cent of the human genome is more closely related to either the bonobo or the chimpanzee genome than these are to each other.

The bonobo genome compared with the chimpanzee and human genomes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aop/ncurrent/full/nature11128.html

 

하지만 이것은 3%가 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다. 나머지 97% 정도는 무시하겠다는 건가?

 

 

그리고 그 논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도 있다.

 

To understand the evolutionary relationships of bonobos, chimpanzees and humans better, we sequenced and assembled the genome of a female bonobo individual (Ulindi) and compared it to those of chimpanzees and humans.

......

On average, the two alleles in single-copy, autosomal regions in the Ulindi genome are approximately 99.9% identical to each other, 99.6% identical to corresponding sequences in the chimpanzee genome and 98.7% identical to corresponding sequences in the human genome.

The bonobo genome compared with the chimpanzee and human genomes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aop/ncurrent/full/nature11128.html

 

 

백과사전도 참조하라.

 

After a previous initial analysis by the National Human Genome Research Institute confirmed that the bonobo genome is about 0.4% divergent from the chimpanzee genome.

......

Initial genetic studies characterised the DNA of chimpanzees and bonobos as being as much as 98% (99.4% in one study) identical to that of Homo sapiens.

http://en.wikipedia.org/wiki/Bonobo

 

 

 

 

 

<<< 유전자 증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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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개미나 벌처럼 일부 사회성 동물의 경우 이상하게도 자기 자손을 낳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자손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자매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자손 대신 자매를 양육한다는 일 자체가 자기의 유전자 증식을 포기하는 현상입니다. 결국 이런 형상은 이타적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126, 최종덕)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해밀턴(William Hamilton) 1964년에 발표한 「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 I and II」은 방계 자손(여기에서는 자매의 자손)을 통한 유전자 증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방계 자손을 돌보는 것이 유전자 증식을 포기하는 것이라니? 기초의 기초도 모르는 이런 인간과 무슨 진화 생물학 논쟁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진화 생물학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꼴이라니. 박성관과 다른 것이 뭐가 있나?

 

내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같은 쓰레기를 비판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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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전자증식이 아니라 자기 개체만의 유전자증식이라는 앞의 문장을 있음을 참조

http://blog.aladin.co.kr/718825194/4386292#C226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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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행위를 하든 이기적 행위를 하든, 그 행위를 통해서 자손을 많이 남기려는 게 목적이겠죠. 이타적인 행위를 했는데도 자손 증식의 성공률이 높다면 이타주의를 생물학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죠. 현실의 자연세계, 특히 동식물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형질이나 행동들은 거의 이기적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 유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형상들도 많죠. 이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개미나 벌처럼 일부 사회성 동물의 경우 이상하게도 자기 자손을 낳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자손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자매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자손 대신 자매를 양육한다는 일 자체가 자기의 유전자 증식을 포기하는 현상입니다. 결국 이런 형상은 이타적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126, 최종덕)

 

자기 개체만의 유전자증식이라는 말이 어디에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더 길게 인용해 보면 최종덕의 오류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종덕에 따르면 개미나 벌의 불임 일꾼의 존재는 자기의 유전자 증식을 포기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가 다윈을 몹시 괴롭힌 듯하지만 윌리엄 해밀턴이 친족 선택 이론으로 어느 정도 해결했다. 그리고 친족 선택 이론 초창기에 가장 크게 다룬 것이 불임 일꾼이었다.

 

 

 

 

 

<<< 사회생물학의 횡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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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사회에 분명한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죠. 그러나 인간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회생물학의 횡포에 해당합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231, 강신익)

 

도대체 사회생물학자들 중에 인간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누명을 씌우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이 책에서는 상습적으로 나온다.

 

내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같은 쓰레기를 비판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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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신익의 대담에서, "인간사회가 침팬지처럼 되어야" 그 앞뒤 문장을 참조

http://blog.aladin.co.kr/718825194/4386292#C226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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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침팬지 사회를 보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다른 개체의 털을 고르는 데 사용해요. 털을 골라주는 시간을 개체마다 비교해보면 역시 털 고르기 서비스를 많이 받는 놈이 지위가 가장 높답니다. 침팬지 사회에 분명한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죠. 그러나 인간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회생물학의 횡포에 해당합니다. 그런 주장들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죠. 동물의 사회 또는 다른 생물의 사회에는 그 나름대로의 존재방식이 있는 것이니까요. 생태계 전체를 균형 있게 관찰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침팬지 사회는 철저한 위계사회이고, 또 주변 집단과 전쟁까지 합니다. 다른 집단의 침팬지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잡아먹기도 하는 사례가 보고되었답니다. 제인 구달(Jane Goodall)이 그런 사례를 관찰하고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죠. 하지만 그런 사례만으로 투쟁과 경쟁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단정하는 것 지나친 단견입니다. 투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협동이 있거든요. 경쟁과 협동은 분리해서 볼 수 없는 상보적 관계이고, 제가 보기에는 이 상보성이야말로 진화적인 특성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231~232, 강신익)

 

앞뒤 문장들을 더 길게 인용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사회생물학자들 중에 인간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가 나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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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 프레시안 ㅣ 2011-03-10 참조

http://blog.aladin.co.kr/718825194/4386292#C226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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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제자백가'…다윈의 선택은?

[프레시안 books]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826190308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

[프레시안 books] 최종덕의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의 문제점 중 몇 가지를 하나씩 살펴보자.

 

현장 과학은 항상 사실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 과학자가 획득한 사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과학자 스스로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깨지지 않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지식에 해당한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누가 과학적 지식이 절대 진리라고 했나? 장대익은 이 책이 현대 진화 생물학을 엉터리로 전달했다고 비판했을 뿐이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 현장 과학을 해석하는 메타과학은 진실 여부를 난도질해 한마디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은 과학과 달리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과학은 사실의 세계를 일차적으로 다룬다. 반면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은 사실을 직접 대면하지 않지만 사실을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양성과 창조성을 발효시키는 지식의 효소이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이것은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진화 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해 수준 이하의 헛소리를 늘어놓고서 “인문학적 해석” 운운하면 다 용서되나?

 

 

현장의 일선 과학계에는 생물학적 결정론, 좀 더 선정적 표현으로는 DNA 결정론이 단연 지배적이며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당연한 현실을 모른 체하고, 과학 결정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몇몇 지식인 그룹이 이 세상의 지식을 독점한다고 거꾸로 비난한다면, 과학기술의 실질적인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생물학적인 것 또는 DNA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의미의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DNA 결정론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어떤 저명한 과학자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볼 경우, 2002년 스티븐 굴드가 죽은 이후 이런 비판 지식인 그룹조차 급속하게 희미해져 가는 상황이다. 그런 지식 구도의 상황에서 소수의 비판들을 다수의 횡포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은 상대의 기본 입장을 호도하여 상대 논리를 허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진화 생물학계에서는 굴드가 소수파일지 모르겠지만 사회 과학이나 인문학에서는 여전히 굴드의 의견(진화 심리학은 엉터리다)이 다수파인 것 같다. 진화 심리학이 급속히 성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심리학계나 사회 과학계에서는 소수파인 것으로 보인다.

 

 

단지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가 현실 사회에 적용되어 사회결정론으로 탈바꿈되는 역사의 오류를 직시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이다. 후자에 대하여 사회과학자들이 나섰다는 점은 오히려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회생물학자 및 관련 실증주의 해석학자들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비판에 대하여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말도 안 되는 비판에 짜증을 내는 것이 알레르기라면 나도 그런 알레르기가 있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비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반면 목적론의 기준에서는 다윈과 라마르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생물학자라면 이런 존재론의 차이를 놓칠 수도 있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902161144

 

목적론 문제를 제시하며 생물학자들이 하지 못하는 대단한 철학적 통찰이라고 한 것처럼 뻐기고 있다. 하지만 전문 진화 생물학자라면 엉터리 목적론과 진화 생물학적 기능론 사이의 차이 정도는 잘 안다. 사실 최종덕 같은 철학자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최종덕은 진화 생물학적 기능론에 대해 수박 겉 핥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 진화에서 인과성과 우연성의 통합적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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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종덕,"진화에서 인과성과 우연성의 통합적 설명" <과학철학> 151(2012) 참조

http://blog.aladin.co.kr/718825194/4386292#C226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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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이 논문까지 읽어 보고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이덕하

2013-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