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곧잘 영웅을 기대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 대한 기대, 세상에 대한 희망은 줄어든다. 

줄어든다는 결과값은 같지만 거기에 이르게 된 노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대별하자면 민생고에 지치고 언로(공식 언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포함)에서 들려오는 온갖 사람 믿지 못할 전파에 둘러싸여 결국은 포기하게 되어 나나 한 목숨 챙기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믿을 사람 없다는 엔트로피의 극치에 다다른 기대 접기가 있다. 다른 하나는 몸으로 체험하고 자신에 비추어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어 타인에 대한 연민, 자타불이를 깨우쳐 기대를 접는 경우다. 이 경우는 기대 접기라기보다는 타인을, 혹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원래 희망/기대라는 걸 한 자신의 상상이 문제라는 걸 깨달아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 失望이 아니라 放望/下望에 가깝다. 탄탄한 동앗줄이라 알고 잡았던 손에서 그 동앗줄이 빠져나가는 통에, 말하자면 소유했던 무언가를 잃은 것 같아(무언가를 잃은 게 아니다. 애초에 장래의 미실현소득이나 외상금 자체가 없었던 것)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고통스러워 하는 게 失望이라면 放望/下望은 어깨 위로 쳐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에 가깝다. 물론 무거운 짐은 자신이 세상을 헤매며 빚어낸 세상에 대한 부채. 失望 뒤엔 공포와 불신, 폭력, 상하위계질서가 따르지만 放望/下望 뒤엔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 슬며시 웃는 낯, 평화, 연대가 따른다. 失望의 행위자는 수동자, 放望/下望의 행위자는 능동자이다. 수동자는 항상 세상 탓, 남 탓을 한다. 물론 세상엔 세상 탓할 일도 적지는 않다만.

내가 여즉 기대를 품을 수 있는 부류는 후자다(물론 알을 품는다고 모다 병아리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고 병아리가 모다 잘 자라는 것도 아니다). 누가 혼자 우뚝 서서 무슨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 경우 대개 우뚝 선 모습 뒤에 적지 않은 병폐가 있다는 걸 아는 부류인 탓이다.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딸딸이 치는 거 뿐이다. 김남주 씨 말대로 가막소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다. 남자든 여자든 자위는 지나치지 않으면 유용한 자기보호 기제이다.

달리 풀자면 어떤 사람을 크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역시 인간으로서 오욕칠정이 있으며 자기 사생활이 있고 행복을 누리려는 본능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는 1일 24시간 365일 자지 않고 깨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등속 운동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신 아니면 신격화한 기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뛰어난 일을 하거나 숭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그런 존재라고 일반화하지 않는 것 그게 어른이다. 그 안에 시기와 질투가 숨어 있다손쳐도 그게 낫다. 한 방에 뻑 가서 그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 버리면 무척 쉽게 실망이 찾아든다. 그때 그건 대상을 높게 보았던 어린 사람의 문제이지 그 사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좋은 모습 큰 모습을 보았다면 그 순간을 즐겨야지 그걸 그 사람의 다른 모든 행위와 미래에까지 일반화시키는 어린 모습은 대개 좋잖은 결과를 낳는다.  그건 失望이다. 그리고 대개 失望은 좋았던 모습까지 부정해버리는 파괴력을 지닌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깨닫는데 젤 좋은 방편은 몸을 써서 일하는 것이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세상에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건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탓이다. 아직도 나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