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 어디에선가 덕하님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중 그나마 그럴싸한 것은 무의식이라는 것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생각이지만 그 생각은 독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즉 프로이트 이전에 프로이트적 내용은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적 수준의 무의식 개념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 글[본인이 쓴 것이 아니고 출처 불명이고 아마 몇개의 글을 종합한 것일듯]에 따르면, 그런 수준의 무의식 개념은 니체에게서나 있었다(어디선가 프로이트가 이와 관련해 니체를 찬양?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희미하게 있다). 물론 도덕심리학자라는 니체의 자처에도 불구하고 니체 수준의 무의식 개념(니체가 무의식 개념을 구사했다라고 주장하기위해 니체가 꼭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증거를 댈 필요는 없다) 이 프로이트가 등장하기 전의 심리학계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자리잡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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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상사에서의 무의식

 

1)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자신의 1965년 저서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에세이』에서 칼 맑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불렀다. 리쾨르가 보기에 이들은 자본주의가 됐든, 도덕이 됐든, 의식이 됐든 연구 대상의 겉모습을 꿰뚫고 들어가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다”. 또한 이들은 의심을, 비판을 위한 비판의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의 기술”로 만들어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회의의 대가들’이 아니라 ‘의심의 대가들’이라는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중심화되어있는 의식적 주체(나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나)였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면서 의식이 하듯 우리의 언어와 행위에 인과적 효력을 미치는 저 밑바닥의 또 하나의 의식이다. 즉 무의식은 내 속에 있는 내가 모르는 또 하나의 파워풀한 나이다. 따라서 나는 탈중심화되고 불투명해진다.

 

3) 프로이트에 앞선 몇몇 철학자들은, 무의식에 대하여 말하자면 직관을 가졌다 하더라도, 프로이트와 더불어 사유와 의식의 동화가 근본적으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한다. 이 경우로부터, 주체(sujet)를 자신과 투명한 일치나 자기 지배권의 관념이라 간주하는 다른 견해를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데카르트와 더불어(Descartes, 1591-1650), 고전시대의 철학은 의식과 사유를 동일시하면서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분명히,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는 무의식의 미세한 지각, 다시 말하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영혼의 변화"를 인정하였다(『인간오성에 관한 새로운 시론(Nouveau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II. ch. 1, 1704)』). 한세기가 지나서 멘느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은 『모호한 지각에 관한 회상(Mémoire sur les perceptions obscures)』에서 무의식적인 수동적 감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다. 결국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기억의 매카니즘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망각이 외적 실현과 관련하여 행동에 유용하지 않는 지각과 추억을 의식 밖으로 몰아내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건, 무의식은 소극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또는, 긴장성(l''''''''intensité)도 관심(l''''''''intérêt)도 의미(le sens)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식적이지 않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서 긴장성을 강도라고 번역하나, 논리학에서 내포(내용)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며, 훗설의 지향성(l''''''''intenstionalité)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훗설의 지향성은 시간에서 의식의 지향성이듯이, 베르그송의 긴장성은 과거를 지니고 미래에 대한 예상참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의식은 긴장(tension)의 지속이다. 의식은 심리적 재료에 의미작용을 부여하면서 이 심리적 재료를 조직화화고 정교하게 만드는 특권적인 심급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니체(Nietzsche, 1844-1900)만이 사유주체(cogito)에 대해 비판하면서, 의식 덕분에 주체가 사유와 감정(정서)을 지배한다는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무의식적이고 비인격적인 사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선과 악을 저 넘어(Par-delà le bien et le mal, 1886)』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유는 사유 자신이 원할 때 나오는 것이지, 자아(moi)가 원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주체인 자아가 나는 "사유한다(Je pense)"의 속성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들에 대한 변질이다. 어떤 것(Quelque chose, 중세의 의미에서 어떤 실체)이 사유하고, 그래서 그것이 옛것이며 이름난 자아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가정이다."

 

4) 니체는 근대 철학의 창시자와 재건자인 데카르트와 칸트를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이를테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문법의 환상'이라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하려면 '생각하는'이라는 말의 주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한다'의 주어인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거기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사를 사용하려면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 그 무엇이란 당연히 힘에의 의지일 것이다.

 

5)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진정한 비판철학이 아니다. 가치와 의지에 대해 묻지 않고 '순수한' 인식 능력만을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진정한 비판철학은 어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비판철학으로서의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혹은 '참' '거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봄으로써,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보려고 한다. 즉 '참' '거짓' 같은 자명해 보이는 개념을 힘에의 의지에 연루시켜 어떤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혀 내는 것이 바로 계보학의 과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치에 연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더 밀고 나가 가치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 따라서 가치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조회해야 하는 기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게 바로 힘에의 의지다. 이런 점에서 계보학이란 '가치의 철학'이요 '힘에의 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