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상대성 이론, 한의학 그리고 칸트의 도덕 철학
 

어떤 아마추어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과 담판을 지으러 저승에 찾아갔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일반 상대성 이론이 엉터리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귀찮다는 듯이 한 마디 묻는다. “당신은 미분 기하학을 압니까?” 그는 모른다고 답한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미분 기하학도 모르는 게 어디서 까불어. 한 대 맞기 전에 꺼져!”라고 소리친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대응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모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분 기하학을 어느 정도 깊이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탄탄한 모델을 갖추고 있으며 잘 검증되었다고 믿는다.

 

이번에는 어떤 아마추어 의학자가 한의사들과 담판을 지으러 한방 병원에 찾아갔다. 그는 한의사들에게 한의학은 엉터리라고 말한다. 어떤 한의사가 귀찮다는 듯이 한 마디 묻는다. “당신은 『동의보감』을 읽어 보았습니까?” 그는 읽지 않았다고 답한다. 그러자 그 한의사는 “『동의보감』도 읽어 보지 않은 게 어디서 까불어. 한 대 맞기 전에 꺼져!”라고 소리친다.

 

나는 이번에는 그 한의사의 대응이 별로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의학이 잘 정립되고 잘 검증된 체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동의보감』 정도는 읽어야 한의학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믿는 한의사들의 믿음도 무시한다.

 

또한 동의보감을 제대로 비판해야만 한의학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한의학은 온갖 측면에서 한심하기 때문에 온갖 측면에서 치명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가짜 약(placebo) 효과를 고려한 이중맹검법(double-blind test)으로 치료 효과를 검증하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나는 이 한 문장이 한의학에게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강력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의사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아마추어 도덕 철학자가 칸트주의자와 담판을 지으러 칸트 학회에 쳐들어갔다. 그는 칸트의 도덕 철학이 횡설수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한 칸트주의자가 “당신은 『순수 이성 비판』을 읽어 보았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읽지 안았다고 답한다. 그러자 그 칸트주의자는 “『순수 이성 비판』도 읽어 보지 않은 게 어디서 까불어. 한 대 맞기 전에 꺼져!”라고 소리친다.

 

과연 칸트주의자의 말은 얼마나 합당한 것일까? 이것은 칸트의 도덕 철학이 일반 상대성 이론처럼 잘 정립되어 있는지 아니면 한의학처럼 한심한 체계인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한의학이 잘 정립된 체계라고 믿는 사람은 한의학 대신 점성술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점성술도 잘 정립된 체계라고 믿는 사람은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칸트의 도덕 철학이 한의학처럼 한심한 체계라고 믿는다. 따라서 칸트주의자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한의사들이 수백 명 달려들어서 아무리 썰을 풀어도 나는 “가짜 약 효과를 고려한 이중맹검법으로 치료 효과를 검증하지 않았다”라는 한 문장으로 이미 한의학을 이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의사들은 내가 한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아 공격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시한다. 이것은 칸트의 도덕 철학에 대해서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개념의 합당성을 굳게 믿는다. 이 믿음은 이중맹검법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강력하다. 따라서 이중맹검법을 무시하는 한의학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칸트의 도덕 철학이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적 오류 개념의 핵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공리 수준에서 도덕 규범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은 취향의 문제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한 문장으로 칸트의 도덕 철학 비판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한 문장으로 한의학 비판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칸트의 도덕 철학에 대한 상세한 비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의학에 대한 상세한 비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설사 내가 핵심적 비판이라고 집어낸 것이 맞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비판이 필요하다. 또한 내가 헛다리 집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더 공부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
 

나는 칸트의 인식론에 대해서는 조금 더 호의적이다. 칸트는 극단적인 경험론 즉 빈 서판론에 대한 방패막이였다. 그는 일종의 선천론을 옹호했으며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선천론인 진화 심리학과 통하는 면이 있다.

 

칸트의 인식론을 평가하는 기준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평가는 기준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19세기의 기준과 21세기의 기준이다. 19세기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다윈의 책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중요한 책은 몇 권 안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어떤가? 21세기의 기준으로 볼 때 다윈의 책은 한심하기 짝이 없으며 온갖 오류들이 뒤범벅되어 있다. 물론 그 오류들을 후대 학자들이 파헤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윈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칸트의 인식론을 칸트가 활동했던 당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높이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어떤가? 나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칼 포퍼나 토마스 쿤을 비롯한 여러 과학 철학자들의 성과와 비교해 보았을 때 칸트의 인식론이 후지다는 것이 나의 평가다.

 

따라서 나는 21세기에 칸트를 파고 드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엄청난 영향력은 주로 그의 인식론과 도덕 철학에서 나온다. 나는 그의 도덕 철학은 횡설수설이기 때문에 아예 가치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의 인식론은 당대에서는 가치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후지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상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칸트를 공부하는 것이야 당연히 추천할 만 하다. 자연 선택 개념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또는 천재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종의 기원』을 읽는 사람을 누가 말리겠는가?

 

 

 

 

 

칸트의 난해함
 

난해함은 두 가지 서로 완전히 다른 특성에서 기원한다. 현대 수학과 현대 물리학이 난해한 이유는 심오하기 때문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수 년간 열심히 공부하면 그 이론들은 전혀 난해하지 않고 매우 명료하다. 현대 수학과 현대 물리학은 재능이나 시간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난해하다.

 

정신병자의 말 역시 난해하지만 보통 횡설수설이기 때문에 난해하다. 정신병자의 말을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난해함은 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래 말이 안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대체로 난해하지만 칸트 역시 난해함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칸트의 난해함의 기원은 무엇인가? 나는 칸트의 난해함이 정신병자의 난해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도덕 철학의 매력
 

칸트주의자로 분류되지 않더라도 많은 철학자들 또는 일반인들이 칸트의 도덕 철학에 매력을 느낀다. 나는 대충 그들이 왜 매력을 느끼는지 안다. 그 이유는 칸트의 도덕 철학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앞에서는 횡설수설이라고 해 놓고 이제는 일리가 있다고 말하다니 금새 마음이 바뀌었나? 그렇지 않다. “칸트의 도덕 철학은 횡설수설이다”와 “칸트의 도덕 철학에는 일리가 있다”라는 두 명제는 상당히 사이 좋게 공존할 수 있다.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에 대해 어떤 사람이 비꼬면서 한 말을 인용하면 될 것이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에서 볼 수 있는 말로 대충 이런 말이다: “프로이트는 옳은 곳에서 독창적이지 않았고, 독창적인 곳에서 옳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의 정신 생활 대부분이 의식되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옳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프로이트 이전에도 상당히 널리 인정되던 생각이다. 프로이트의 초자아 개념은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초자아 개념이 당대의 상식에도 있었던 양심 개념을 윤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프로이트가 옳은 곳에서 그는 독창적이지 않았다.

 

프로이트가 독창적이었던 곳은 예컨대 초자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결시킨 것이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는 거세 공포 때문에 초자아가 생기게 된다. 반면 여자는 이미 잘렸기(?) 때문에 거세 공포가 없거나 작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자는 초자아가 덜 발달해서 덜 도덕적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즉 프로이트는 독창적인 곳에서 옳지 않았다.

 

나는 칸트의 도덕 철학이 매력이 그의 도덕 철학 중 독창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는 보편적인 규범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인간 목숨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칸트의 독창성은 그가 윤리 규범은 이성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고 본 점에 있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그는 독창적인 곳에서 옳지 않았다.

 

 

 

 

 

칸트와 진화 윤리학
 

칸트는 진화 윤리학계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진화 윤리학을 평생 공부할 계획이다. 따라서 진화 윤리학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칸트와 어떤 식으로든 대면해야 한다.

 

나는 현재의 진화 윤리학계가 상당히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집단 선택론 때문이다. 나는 집단 선택론에 상당히 적대적이다. 진화 생물학계 전체 또는 진화 심리학계 전체를 볼 때 집단 선택론은 소수파다. 집단 선택론자들은 자신들이 왕따 당해 왔다고 푸념을 늘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유독 진화 윤리학계에서만 집단 선택론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다. Cosmides & Tooby 그리고 그들의 가까운 동료들 빼고는 거의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집단 선택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칸트의 인기도 진화 윤리학계의 한심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상황을 복잡하게 하는 요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칸트가 주로 다루었던 것은 도덕 철학의 교권의 문제인 반면 진화 윤리학은 주로 과학의 교권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즉 칸트는 규범의 정당화에 힘쓴 반면 진화 윤리학은 규범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한다. 다른 교권의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만 두 교권 사이를 오갈 때에는 상당히 신중해야 한다.

 

 


2009-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