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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구절에서 글쓴이가 몇 가지 주장을
하는지 따져보자.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3인칭
시점은 관찰자의 시점, 즉 방관자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3인칭 시점을 취하는 순간 나는 그 시간들의 주인공이 아닐 가능성이 커진다. 삶이란 결국 시간인데 그 시간을 나의 온몸으로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들을 기억해낼 때 1인칭 시점보다 3인칭 시점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3인칭 시점을 쓰게 되면
그 사건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지고 그 사건과 자신과의 거리도 좀 떨어뜨릴 수 있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73쪽)
위 구절에서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보자.
첫째,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을 기억해낼 때 1인칭 시점보다 3인칭 시점을
쓴다.
둘째,
3인칭 시점을 쓰게 되면 몰입도가 떨어진다.
셋째,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을 기억해낼 때 3인칭 시점을 쓰는 이유는 몰입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넷째,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들을 기억해낼 때 몰입도를 떨어뜨리려는 이유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는 첫째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을
인용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둘째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인용했다. 아래 문장에 붙인 주에서 E. A. Holmes와 동료들이 쓴 「Looking at or Through Rose-Tinted Glasses? Imagery Perspective and
Positive Mood」라는 논문이 소개되어 있다.
무를 써는 것 같은 별것 아닌 일도 3인칭으로
생각하면 1인칭으로 생각했을 때보다 즐거움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결과들이 있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74쪽)
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나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가 별로 그럴 듯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고 불쾌와 고통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뻔한 진리다. 하지만 그런 경향 때문에 사고나 기억이 왜곡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연구를 나는 아직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고나 기억이 왜곡되면
번식에 지장이 생길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식으로 “설계”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소망적 사고와
진화 심리학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441
만약 사람들이 끔찍한 사고를 당하거나, 사람들에게 끔찍하게 공격 당한 일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기억한다면 그 이유는 3인칭 시점이 예방법이나 대처법과
관련된 정보 처리에 더 유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에게 위험한 물건이 떨어질 때든, 나무나 쓰러지거나 건물이 무너질 때든, 동물이 공격할 때든, 사람이 공격할 때든 3인칭으로 이미지를 떠올려야 당시 상황을 공간적으로
더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고통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면 아예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런데도 인간은 끔찍한 사건을 당하면 자신이 아무리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해서 기억해내는 경향이 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머리 속에서 그런 사건을 시뮬레이션하도록
인간이 진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3인칭 시점 시뮬레이션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3인칭으로 회상하도록 진화한 것은 아닐까?
끔찍한 일 중에 3인칭 시점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컨대 엄청나게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는다든가,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그런
경우다. 이런 경우에는 3인칭으로 회상하려는 경향이 별로
없다면 내가 제시한 가설과 부합한다.
"사고 기억 왜곡을 통한 불쾌 고통 회피 기제"를 단순히 있다 없다로만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요? 보통때는 현실에 맞게 판단하다가 지나치게 끔찍한 사건 때문에 패닉이 일어날 수준이 되면 그때서야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적응적일 겁니다. 적어도 저는 몇 차례 경험해 본 적 있군요.
하하하 /
통증의 기능 중 하나는 “행동 마비를 통한 손상 부위 보호”로 보입니다. 발이 아프면 잘 걷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손상된 부위를 보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 마비가 오히려 부적응적일 때가 있죠. 예컨대 발 부상을 당했는데 뒤에서 사자가 쫓아오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럴 때에는 발이 더 손상되는 것을 무릅쓰더라도 사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적응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일 때 통증이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포의 경우 행동 마비 옵션 뿐 아니라 도망 옵션도 있습니다. 인간의 경우 패닉에 빠졌을 때 각 옵션을 적절히 선택하도록 진화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통증의 경우와는 상황이 달라 보입니다.
“패닉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덕하 /
"패닉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은 많은 정신병 환자들이 현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강박증이나 공황장애, PTSD를 겪는 환자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나 실제로 위험도가 크지 않은 사건들에 더 많은 정신적 리소스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원배분의 실패가, 그들이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듭니다.(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20층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1분 걸릴 것을 계단으로 10분 걸려 올라가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의 발단은 대상과 연결된 끔찍한 기억일 때가 많지요.)
기억이 끔찍하건 어쨌건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야 하고, 기억을 되풀이해 재생하는 데 더 많은 리소스를 쓰는 사람에 비해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현실 적응도가 높을 것은 당연합니다. 당장 처리해야 할 현실과제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두뇌의 자원배분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뭐가 됐든 "실제보다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받은" 과거의 안좋은 기억들을 치워 둘 수 있는 기제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왜곡하는 기제"가 진화할 수 있는 충분한 선택압이 상존하고 있다. 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과거 기억을 왜곡하는 기제가 과연 적응적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양식과 신체 기관이 적응의 산물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더 큰 문제의 해결"을 선택압으로 진화된 회로의 side effect로 "고통 제거를 위한 기억 왜곡"이라는 현상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당면한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정보와의 비교평가를 통해 지난 기억이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달리 채색되는 현상은 늘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기억 왜곡이 특별히 끔찍한 기억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란 거죠. 이런 현상의 side effect로 하하하님의 예시가 파악될 수도 있습니다. 부작용으로 발생했으나, 나름의 순기능이 발견되었다. 정도로.
사족이지만 공포감이 순간 온몸을 마비시키는 것은 포식자가 움직임을 쫓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포식자와 마주쳤을 때 순간적인 생존확률 향상을 도모하는 것과 더불어 싸우거나 도망칠 수 있도록 몸을 세팅하고 판단을 내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적응적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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