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응 가설과 합리성 가설을 구분한 적이 있다. “합리성 가설”이라는 명칭이 적절해 보이지는 않지만 아래 글을 읽으면 내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와 진화 심리학: 04.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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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위해 배고픔의 예로 적응 가설과 합리성 가설을 구분해 보겠다.

 

첫째, 배고픔과 관련된 선천적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 우리 조상들 중에 꽤 오랫동안 먹지 않았을 때 배고픔을 느껴서 먹을 것을 찾았던 이들이 그렇지 않았던 이들보다 배고픔 덕분에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배고픔 기제가 자연 선택된 것이다. 이것을 적응 가설이라고 부르자.

 

둘째, 인간은 똑똑하기 때문에 계속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또는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인간이 꽤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 “이러다가 곧 죽을 수도 있겠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먹을 것을 찾게 된다. 이것을 합리성 가설(꽤 오랫동안 먹지 않을 때 먹을 것을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부산물이라는 가설)이라고 부르자.

 

진화 심리학의 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를 싫어하는 심리학자들도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적응 가설을 지지한다. 즉 배고픔 문제에 전문화된 심리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으며 배고픔 기제가 인간 본성임을 인정한다.

 

 

 

아래 구절을 볼 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긴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글쓴이는 적응 가설이 아니라 합리성 가설을 지지하는 것 같다. (사소한 지적을 하자면 “fear for rejection”이 아니라 “fear of rejection”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심장이 두근두근 하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며 식은땀이 줄줄 흘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 이전에 친분이 없던 사람과 단 둘이 마주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색함을 빨리 탈피하고 싶은 생각만 들었던 경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특별히 중요한 사람이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 어려워하는 걸까?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할수록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이렇게 행동했을 때 이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이런 생각이 심해질수록 말과 행동에 대한 부담감은 더욱 커지고 이미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부질없는 후회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걱정이 많은 자신이 싫어지는 일도 발생한다. 이와 같이 상대방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사람들로부터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fear for rejection은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는 상황을 불편하고 어렵게 느끼도록 만든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56)

 

 

 

나는 이 경우에도 적응 가설이 가망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 중에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도 자기 혼자 있을 때처럼 긴장을 완전히 풀어서 코를 파고, 방귀를 뀌고, 엉덩이를 긁었던 이들이 있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황일 때에는 상당히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이들이 있었다고 하자. 누가 더 잘 번식했을까?

 

적응 가설에 따르면 앞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긴장 정도를 적절히 조절했던 사람이 그렇지 않았던 사람에 비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인간은 앞에 있는 사람에 따라 긴장 정도를 적절히 조절하도록 진화했다.

 

 

 

만약 너무 긴장해서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일화들만 모아 보면 그런 긴장이 오히려 번식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람 앞에서 전혀 긴장을 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 보면 적절한 긴장이 도움이 된다는 점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감기 등에 걸렸을 때 체온이 올라가는 것이 대체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때로는 고열 때문에 뇌가 망가지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적응 가설이 옳다면 인간은 중요한 사람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긴장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다가는 망하겠군” 같은 생각을 하든 말든 말이다. 적응 가설이 옳다 하더라도 “긴장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다가는 망하겠군” 같은 생각이 긴장 정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다.

 

 

 

“중요한 사람 앞에서 긴장하지 않으면 망할 수도 있다”는 상당히 그럴 듯한 논리다. 이것은 일종의 합리성이다.

 

적응 가설의 경우에는 이 논리가 자연 선택의 수준에서 전개된다. 즉 오랜 진화 역사 속에서 전개된다. 중요한 사람 앞에서도 긴장을 하지 않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와 중요한 사람 앞에서는 긴장을 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 사이의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연 선택의 결과로 생긴 긴장-관련-심리-기제 덕분이다.

 

합리성 가설의 경우에는 이 논리가 인간 심리의 수준에서 전개된다. 즉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전개된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범용-심리-기제 덕분이다. 자연 선택이 범용 심리 기제를 만들었고 그 범용 심리 기제가 “중요한 사람 앞에서 긴장하지 않으면 망할 수도 있다” 같은 생각을 만들어내며 그런 생각 때문에 인간은 중요한 사람 앞에서는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두 가설의 차이를 살펴보는 수준에서 만족해야겠다. 그 다음 단계는 두 가설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 즉 검증 방법론을 궁리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 문헌을 뒤지면서 지금까지 어느 정도 검증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주류 사회 심리학자가 여기에서 제시된 적응 가설을 기각하려고 한다면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적어도 “아직은 망하지 않은 가설” 정도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