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동 제목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한번쯤 읽어봐주시고 한말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보통 자신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들이는 시간-즉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등의 행동에 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된 시간'이라고 부른다.

또한 재미를 느끼기 위함이나 보다 즐거운 일상을 위해 문화컨텐츠를 소비하는 데 들이는 시간을 사람에 따라 '낭비되는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개념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자신의 지적 수준이나 육체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뭔가 보람있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고, 그 순간에는 재미있지만 지나고 나서 되짚어보면 '아, 단지 재미있었을 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어딘가 허무한 감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그걸 부정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시간 낭비'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건 필요한 과정인 것 같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하는 일들은 주로 게임 플레이, 만화 탐독, 때려부수는 할리우드 영화 감상 등이다.

전부 누군가가 만든 것들이다. 그러면 게임을 만들고 만화를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돈과 시간을 낭비시키기 위해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소리다. 인과 관계상 그들의 직업은 학술서 또는 논문을 저술하거나 운동 기구를 만들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에 비해 보람이 덜 느껴지는 직업일 것이고 또 그러한 직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노는 데 들이는 시간을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한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 문제는 단순한 시간 낭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직업의 귀천에 관한 것이 된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어!'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그 외침은 분명히 존재하는 직업의 귀천을 애써 위선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강한 어조로 한두 마디를 하는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의사, 변호사, 판검사 등 사 자 돌림의 직업들은 공장 노동자에 비해 돈도 더 벌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다. 인정하기엔 좀 껄끄럽지만 그런 게 없다고 말하는 건 위선이다. 한편 아이돌 산업을 일구거나 밀리언 히트 게임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은 앞서 말한 사실을 전제할 때 계급사회에서의 6두품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돈이 많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접받지만 소위 말하는 '명예'라는 게 없다. 왜냐면 그 산업을 통해 얻어지는 게 사람들의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화를 즐기기 위해 쓰는 시간을 '낭비'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직업 귀천 구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꼴이다.






우리는 시간을 밀도 있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데 일종의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좀더 보람있는 일, 그놈의 '뭔가 남는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내가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는 느낌을 갖는다.

왜 그렇게까지 자꾸 뭘 남기려고 드는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심지어 노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보고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놀이 시간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왜 이렇게들 모범생이 되지 못해 안달들인지.


찾아보면 얼마든지 많은 통계들이 있다. 숫자는 항상 옳지는 않지만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더 많은 시간을 놀이에 사용하고, 놀이에 관해 더욱 폭넓은 자유를 부여받은 사람들일수록 더욱 생산적으로 일하고 인생을 즐겁게 살아간다는 통계들.





나는 학습만화를 정말 싫어한다. 만화는 그냥 재밌어야지 뭘 만화를 보면서까지 공부를 하려고 그러냔 말이야!

만화적인 구성에서 나오는 스릴 및 감동을 넘어선 '교훈적인 메시지'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재밌어야 된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는 건 좋고 소비에 사용하는 시간도 <어느 정도>있어야 바람직하지만, 주객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중립적이고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난 이런 말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주객이 바뀌면 왜 안 되는데?

노는 게 인생이면 왜 안 돼? 한껏 질릴 때까지 놀고 났더니 너무 시간이 남아서 나를 조금 끌어올리는 데 여유시간을 사용하게 되면 나쁘게 사는 건가?


효율로 따지자면 그게 백만 배 정도 더 효율적이다. 너무 놀아서 할 게 없다보니 생산적인 걸 조금 해보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안 하면 너무 심심하니까 할 때>야말로 나의 잠재능력이 가장 극한까지 발휘되는 순간이다. 인정해! 심심해서 한 번 해보는 게 제일 잘 된다니까?



여기에는 어느 정도 개인차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내추럴 본 한량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자기 편한 대로 하는 게 좋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재미만 있을 뿐 뒤에 뭔가 얻는 것이 없거나, 자신이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나는 시간을 일종의 낭비되는 시간처럼 느끼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미 가치가 개입되어 있는 '낭비'라는 단어 대신 좀 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해 나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낭비'하기 위해 생산되는 문화인 서브컬쳐를 좋아하고 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서의 시간 낭비에 관한 조그만 변명이다.

낭비 말고 다른 단어를 붙여줘. 그래준다면 당선인으로 불러줄 수도 있어. 부탁해.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