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안나지만 어떤 책에 사건의 올바른 원인과 인과관계의 파악을 위해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예시가 등장한다. 

아침에 와이프와 대판 부부싸움을 하고 출근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애연가다. 또한 이 남자는 준법정신이 투철하여, 본인이 피고 남은 불 붙은 담배꽁초를 아무데다 함부로 버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이 남자는 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불 붙은 담배 꽁초를 아무데나 집어던졌고, 하필이면 그 꽁초가 가연물이 잔뜩 쌓여있던 어떤 공장의 마당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 공장이 홀랑 타버리는 대형화재가 일어났다



예시한 사건에서, 과연 그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혹시 부부싸움? 그 남자가 애연가라는 사실? 그 남자의 공장 앞을 지나가야하는 출근 경로? 감정을 컨트롤 못하는 격한 성미? 성질난다고 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준법정신의 미비?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원인이 아니다.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그 공장의 "소홀한 가연물 보관 상태" 인 것이다.

물론 그 남자가 아침에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애연가도 아니었으며, 하필 출근하는 경로가 공장 앞을 지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준법정신이 좀 더 철저하였으며, 좀 더 감정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날 아침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정말로 화재의 원인이었을까? 

우리는 보통 인과관계를 파악할 때, "~이 없었다면 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문법을 동원하여 단순하게 파악하기가 쉽다. 또한 그 것을 매우 논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순히 그런 관계에 있다해서 그 모든 것이 사건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건의 원인이라 지목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에 불과할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상관관계에 있는 것을 그 사건의 원인이라고 주장해도 그 주장 자체로는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원인파악을 기반으로 대책이나 재발방지책을 마련한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큰일날 일이 된다. 면밀한 조사와 검증을 통해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하며, 안 그러면 초대형 헛발질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위의 예시로 돌아가서 "화재예방을 위해 부부싸움을 하지 맙시다" "화재예방을 위해 출근길에 담배를 피지 맙시다"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투철한 준법정신을 기릅시다" "우리 모두 화가 나도 감정을 잘 다스립시다" 이래도 될까? 과연 그게 모두 지켜지면, 그 공장에서 다시는 화재가 일어나는 일이 없어질까? 그러나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실컷 그래놨는데 만약 어린이들이 그 공장앞에서 장난감 불꽃놀이를 하다가 다시 화재가 일어났다면?? 이제는 어린이들더러 장난감 불꽃놀이 하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일 것인가? 결국 이럴 때는 잘못된 원인파악이 문제의 원인이 된다. 그 공장이 가연물 관리에 소홀하는 한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결국은 화재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놓치고서 화재가 날 때마다  엉뚱한 것들을 원인으로 지목해서 없애버리고서 안심하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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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님이 최근 아크로에서 국정원녀가 논쟁거리가 된 이유, 즉 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파악하셨다. 요약하면 민주당이 국정조사를 요구했기 때문이란다.

국정원녀 사건이 왜 아크로에서 문제가 되고 논쟁이 됐을까요? 민주당이 국정원녀의 글을 <국정원의 조직적 대선여론조작의 증거>라며 국정조사를 요구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아크로에서 국정원녀 사건이 재론된 계기는 민주당의 우원식 부대표와 박용진 대변인의 말 때문이죠. 그것이 기사화되면서 국정원녀 사건이 다시 부각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히 어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는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평가해 드릴 수 밖에 없다. 예시로 든 공장화재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남자분이 아침에 부부싸움을 한게 원인같아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사람보다도 심각한거다. 이 사람의 답변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가 없었다면 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원인파악문법에는 충실하신 분인거다. 

그런데 길벗님이 제시하신 "아크로에서 국정원녀가 다시 문제가 되고 논쟁이 되는" 원인으로 지목한 것들에는 최소한의 그런 문법적인 관계조차도 없다. 정말로 길벗님은 "민주당의 우원식부대표와 박용진대변인의 말이 없었다면, 아크로에서 국정원녀 사건이 재론되지 않았을거다" 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걸까? 그래서 그걸 원인이랍시고 주장하고 계신 것일까?

물론 어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한다는 것은 알고보면 상당히 어렵고 고난도의 작업일 수도 있다. 원인이란 본질적인 심층적 근본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고, 그 위에 원인처럼 보이는 것들이 층층히 덮혀있어서 당체 보이지가 않을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번 국정원녀사건처럼 심플한 사건에서조차 "민주당의 국정 조사 요구" 를 논란이 벌어진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을 잊을 수 밖에. 

정확한 원인파악까지는 바라지도 않겠다. 그러나 최소한 상관관계에 있는거라도 들고 오셔서 '이거 때문이고, 그래서 원인이다' 라고 주장하시라. 아크로회원들의 인내력을 테스트하시는게 취미가 아니라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