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동생만 사랑해”
 

“엄마는 동생만 사랑해”, “아빠는 누나만 좋아해”와 같은 말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엄마가 어떻게 동생만 사랑하는지에 대해 형이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이야기한다고 하자. 그것을 듣고 있는 동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생 역시 엄마가 어떻게 형만 사랑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에서 “엄마는 동생만 사랑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엄마가 오직 동생만 사랑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자신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뜻일 것이다. 즉 엄마가 편애를 한다는 뜻이다.

 

 

 

 

 

편애는 적응적이다
 

실제로 부모는 편애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하지만 어떤 손가락은 더 아프다.

 

자식은 번식 경쟁에서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하지만 모든 자식을 똑 같은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 항상 적응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어떤 자식을 다른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첫째, 더 잘난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해 보자.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과 같이 두 자식 중 한 명을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더 잘난 자식을 살리는 것이 적응적이다. 그래야 손자가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여자의 경우 폐경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더 적응적이다. 왜냐하면 폐경이 되면 어차피 더 이상 직접 번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면 자식을 덜 사랑함으로써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아껴 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 남자의 경우에도 비슷한 논리가 작동한다. 이것이 늦둥이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인 듯하다.

 

셋째, 사춘기에 가까운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갓난 아기의 경우 사춘기까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춘기까지 이미 살아 남은 자식이 번식 가치(reproductive value)가 더 높다. 인간이 진화한 사냥-채집 사회에서 태어나서 사춘기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설문 조사를 해 보면 사춘기에 가까운 자식을 잃었을 때 가장 슬플 것이라고 답한다.

 

 

 

 

 

자식의 입장에서 최적 값은?
 

형의 입장에서 볼 때 엄마가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가? 이것은 형과 자식 사이의 근친도에 달려있다. 만약 동생이 계부의 친자식이라면 근친도가 0이므로 엄마가 동생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반면 full sibling인 경우에는 근친도가 0.5이므로 엄마가 동생을 자신보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많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half sibling인 경우에는 근친도가 0.25이므로 그 중간 어디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린 아이가 근친도에 대한 정보를 아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동생이라고 불리는 아이와 자신 사이의 근친도를 추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진화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평균적인 근친도에 대응하도록 여러 가지 심리적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것이다.

 

만약 부모가 동생을 전혀 사랑하지 않아서 굶어 죽도록 방치한다면 형의 유전자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얼핏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에는 형이 “엄마는 동생을 전혀 사랑하지 않아”라고 불만을 토로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어떤 자식을 그 정도로 방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우리 조상 부모 중에 멀쩡한 자식인데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지극히 희박했다면 엄마가 동생을 덜 사랑하는 것까지 형이 걱정하도록 진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형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자식들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이 최적 값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동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부모가 편애하지 않더라도 형이 불만을 품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신을 편애할 때에도 그 편애가 어느 정도 이하라면 형이 불만을 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도덕적 담론
 

“엄마는 동생만 사랑해”라는 비판은 도덕적 비판이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공평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규범을 전제하고 있다. 아이들은 보통 “엄마는 나만 사랑해야 하는데 왜 동생도 사랑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현상이 도덕 규범의 선천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더 어린 나이에 이런 식으로 부모를 비판할수록 “공평한 사랑”이라는 규범이 선천적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만약 어린이가 이런 말을 하기 전에 공평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다면 선천성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촘스키가 문법의 선천성을 논증할 때 사용했던 자극의 빈곤(poverty of stimulus)의 논거를 똑 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설이 옳다면 부모가 형, 누나, 오빠, 언니, 동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유도하는 메커니즘이 진화했다. 게다가 아이들은 땡깡(tantrum)이라는 무지막지한 무기뿐 아니라 도덕적 논쟁이라는 무기까지 사용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2009-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