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정부나 정당 혹은 그 지지자들의 우호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정상적인 활동들과, 정체를 숨기고서 정상적 여론형성을 왜곡하고 결과적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매우 다른거다. 전자는 여론형성이라 하고 후자를 여론조작이라고 부르는거다. 이런 기본적인 개념조차 구분이 안되는 분들이 닥치고 들이대는 상황은 그저 안습이라고 할 수 밖에.

일전에 구라성인님과의 댓글 토론에서 잠깐 설명을 했던건데, 하도 '이게 어떻게 여론조작이냐' 라고 따져 묻는 분들이 많아서 따로 발제를 하겠다.  http://theacro.com/zbxe/746754

여론조작이란 언뜻 듣기에 국민전체 여론의 향방이 바뀔 정도의 커다란 규모로 행해졌거나, 국민들이 설득을 당해서 자기 의견을 바꾸어야만 비로소 조작인거고 성공한 거라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여론조작이란 단순히 그런 협소한 개념만이 전부가 아니다. 솔까말 몇일동안 밤새워 치열한 논쟁을 주고 받아도 자기 의견을 바꿀까 말까한게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설득을 통해 그런 정치적의견의 변화까지 끌어내야만 비로소 조작한거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이 세상에 여론조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한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론조작이란 그렇게 단순한 개념만이 아닌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국정원녀의 글을 읽고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 과연 몇명이나 있겠냐고. 맞는 말이다. 어쩌면 그녀의 초딩스런 허접성 글을 읽고 '우와 구구절절 맞는 소리네'  무릎을 치면서 생각을 바꾼 사람들은 극히 드물거다. 아마 단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 천하가 다 알아주는 진중권도 그러기가 힘이 드는건데 당연하다. 그럼 국정원녀는 여론을 조작한게 결코 아닌걸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조작을 시도한게 맞다. 읽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정도로 논리적이고 기가 막힌 글을 쓰는 정치인 기자 논객들이 이미 득시글한데, 국정원이 뭐하러 굳이 비밀스럽게 그런 짓을 해야 할까?  

알고보면 글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란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내용의 충실함이나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 글 자체가 일종의 여론상의 신호가 되고 영향을 미치는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가령 어떤 노점상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글빨 좋게 구구절절 눈물나는 사연을 적어 사람들의 동감을 얻지 못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설사 개발 새발 무슨 말인지도 모를 허접한 글이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그걸 읽고서 설득 당하던 짜증을 내던 아무 관계 없이, '불쌍한 노점상이 인터넷에 하소연 글을 올렸다' 라는 사실 하나가 정보가 되어 읽는 사람들의 기억에 저장된다는 것이고, 그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요즘 노점상들이 인터넷에 하소연까지 할 정도로 힘든 모양이네. 그러면 글이라도 좀 잘 쓰던가 이게 뭐야 쯧쯧. 암튼 그래도 정부가 좀 더 신경을 써줘야만 하는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글의 내용에 설득당한게 아니라, 정보를 입력당한 것이다. 사람은 설득을 당해도 생각과 행동이 변하지만, 정보가 입력되는 것만으로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노점상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주변과 대화할 때,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한거 같아" 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치자. 이건 여론이 영향을 받고 변한건가 아닌가? 명백히 변한거다. 그럼 만약 그 글을 올린 노점상이 진짜 노점상이 아니고 가짜라면?? 그 사람은 여론을 조작한거다. 이런 간단한 이치가 그렇게도 이해하기가 힘든걸까?

국정원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분의 글을 읽어보면 설마 대북심리전을 수행하는 훈련받은 국정원 요원이 쓴거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정치는 어리버리 잘 모르지만 관심은 좀 있는 아주 평범한 젊은 여성'의 티를 무지하게 내고 있다. 나긋나긋하고 찌질하고 허접하게. 그리고 그 것은 굉장히 특이한 포지션이다. 요즘 평범한 젊은 여성들중에 굳이 인터넷에서 강경한 어조로 종북퇴치를 떠들고 이명박이나 정부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그러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정보를 입력당하게 되는걸까?

어떤 사람들은 그 글을 읽고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긴 있네. 세상 참 특이하고 다양해" 혹은 "어머 나랑 생각하는게 똑같네? 나만 그런게 아니구만 ㅋㅋㅋ" 혹은 "요즘은 젊은 여성들도 종북세력들 걱정이 큰가 부네. 민주당 이거 안되겠는걸?" 하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반응들을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말하기를 꺼려하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생각에 좀 더 강한 자기확신과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대화 중에 '민주당은 종북문제 좀 빨리 어떻게 해야 하는거 아냐? 요즘은 젊은 여자들까지 난리던데" 하고 말할 수도 있다. 정보를 입력당해서 생각과 행동이 바뀐거다. 그런데 국정원녀는 평범한 보통의 젊은 여성이 아니지 않는가!!!! 이게 여론조작한게 아니라고? 그럼 여론조작이라는게 대체 뭘까? 먹는건가? 우걱 우걱.

따라서 만약 국정원녀가 여론을 조작할 목적으로 일부러 그런 허접한 글을 썼다면 정말 효과가 만땅인거다. 글빨 좋은 논객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나름의 블루오션이었던거다. 만약 상부의 행동 지침이 있었다면, 매우 정확하고 적당한 방식으로 자기 임무에 충실하게 활동한 거다. 치밀하게 의도되고 계산된 허접함. 그래서 더 무서운거다. 여론 조작은 이렇게 우리가 느끼지도 저항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TV 광고를 보라. 대놓고 우리 제품 이래서 좋아요 하면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광고가 단 하나라도 있던가? 설득이 아니라 정보를 입력시키는게 가장 효과적인 광고인거다. "요즘 젊고  이쁜 여성들은 이런 스마트폰이나 화장품을 써요". 국정원녀는 바로 그걸 한 것이다. 만약 지침에 의해서 그랬다면 국정원 이론팀의 치밀하게 계산된 지침이 있었을 것이고, 본인이 정말로 개인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를 위해 일부러 찌질이를 흉내냈다면 너무나 영악한 거다. 그 정도면 국정원 요원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오늘 3연타로 글을 올려서 만땅을 채웠다. 아크로 생활 3년차에 처음이다. 도배해서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