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말미를 뜨겁게 달구었던 국정원녀 사건의 성격이 순식간에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국정원녀가 "황위병들의 문앞 혁명에 날벼락을 맞은 억울한 공무원"에서 "국민 혈세로 월급받으며 십알단 놀이를 즐기던 찌질이" 로 변신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조직적인 지침에 의한 활동이었는가 아니면 일개 찌질한 공무원의 헤프닝성 일탈이었느냐이다. 전자라면 '정치 중립'을 의무로써 준수해야하는 국정원 조직의 중대한 범죄행위이고, 후자라면 규정에 의해 징계로 끝나면 될 일이다. 또한 전자라면 지침에 따랐을 뿐인 국정원녀는 무죄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국정원이 국정원녀의 글들을 '정상적인 업무의 일환'이라고 확인해줘버렸다. 즉 국정원 신분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임했던 공식적인 업무였다는 것이고, 따라서 공무원의 개인적인 정치적 기본권이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논의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상식적으로 일일업무량이 그렇게 적을리가 있겠는가같은 나름 합리적인(?) 의심들도 마찬가지이다. 정상적인 업무였다는 국정원의 해명조차 부정하고 믿지 못하겠다는 걸까?

현재 우려스러운 것은 양쪽 편향들의 진영논리에 의한 물타기이다. 이번에 드러난 사실로 결코 "황위병들의 문앞 혁명"이라는 불법적인 난동이 합리화되어서도 안되고, 그 반대로 마찬가지이다.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정치 중립성 위반으로 의심되는 사건을 '황위병'을 끌여들여 대수롭지 않으니 덮자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언론에 의해 보도된 사실적 근거는 크게 두가지다.

1. 국정원 직원이 익명의 네티즌으로 가장하여 다수의 정치성향 글을 올렸고, 대부분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하는 내용이었다.
2. 국정원이 해당 직원의 활동을 '대북심리전단 소속 직원의 정상적인 업무의 일환'이라고 확인했다. 

위 사실적 근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정황들을 합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1. '대북심리전단 업무'의 내용에는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확인 필요)
2. 따라서 대북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은 문제가 된 국정원 직원과 대동소이한 정치 중립 위반성 업무를 했을 것이다. (확인 필요)
3. 위 1과 2 중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대북심리전단 업무를 총괄하는 자의 기획에 의해 조직적인 업무 구성이 있었을 것이다.
4. 위 3이 국정원 내부에서 정상적인 업무 구성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면, 국정원에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내부통제나 자정능력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5. 위 상황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국정원장 이하 관련 간부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나는 아직도 나의 이런 의심이 기우이고 헤프닝에 불과하기를 바란다. 그만큼 사건의 성격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위중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자에 넣고 대못질을 해서 다시는 구경안해도 되리라 생각했던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이 다시 눈앞에서 부활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내 자신이 참담하다.



추가) 이렇게 드러난 펙트가 정반대의 상황으로 바뀌었는데도, 국정원녀에 대해서 여전히 '문앞 혁명' 당시와 똑같이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분들은 펙트따위는 전혀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