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을 위해 – 집단 선택에 반대하며
 

나는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의 차이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수치심은 은폐 전략을 구현하는 반면 죄책감은 보상 전략을 구현한다. 둘 모두 평판이 덜 나빠지도록 한다.

 

여기서 은폐, 보상, 평판 보호는 궁극 원인(ultimate cause)과 관련된 문제 즉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의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무언가 평판을 떨어뜨릴 수 있는 일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은폐하거나 보상했던 우리 조상들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수치심 메커니즘과 죄책감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근접 메커니즘(proximate mechanism)에 궁극 원인이 그대로 반영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항상 평판을 의식적으로 걱정할 것이라고 기대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평판에 대한 의식적 고려가 아니라 단지 죄를 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보상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밥을 먹는 주된 이유가 “밥을 먹지 않으면 에너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번식에 지장을 주겠군”이라는 식으로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배가 고프기 때문인 것과 비슷하다.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는 설명은 집단 선택의 논리보다는 개체 선택의 논리에 의존한다. 만약 집단 전체의 안녕이 목적이라면 서로 정보를 최대한 공유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은폐 전략인 수치심은 오히려 집단 전체에 해를 끼칠 것 같다.

 

죄책감의 경우 피해를 보아서 화가 난 사람을 달램으로써 집단의 화합을 다지는 기능을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피해를 당하면 화가 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집단 선택의 논리가 크게 작동했다면 개인적으로 당하는 피해보다 집단에 해를 끼쳤을 때 사람들은 더 화를 내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 또는 자신의 친족이나 친구가 해를 입었을 때 가장 열 받는다.

 

 

 

 

 

도덕적 영역과의 관련성
 

수치심은 도덕적 영역의 문제일 때에도 작동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작동한다. 반면 죄책감은 도덕적 영역의 문제일 때에만 작동한다. 이것은 수치심이 은폐 전략인 반면 죄책감은 보상 전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해 보인다. 도덕적 영역이 아닐 때에는 보상할 필요가 없다. 반면 도덕적 영역이 아닐 때에도 은폐가 필요할 때가 있다.

 

정정당당한 경쟁에서 한쪽이 졌을 때에는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진 쪽에서는 평판이 떨어진다. 인간성(얼마나 도덕적인가)에 대한 평판도 있지만 능력에 대한 평판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럴 때에도 은폐 전략은 유용할 수 있다.

 

 

 

 

 

수치심 – 은폐 전략
 

수치심을 느끼면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즉 숨고 싶어진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것은 정보를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된다.

 

쾌락 원리를 거의 절대시했던 프로이트는 수치심을 느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억압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수치심에 대한 기억만큼 집요하게 남아 있는 것도 드물다. 이것은 적응론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당연해 보인다. 평판을 떨어뜨렸던 행동에 대해 잘 기억해 두는 것은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육체적 위험에 빠졌던 사건을 잘 기억해 두는 것이 그런 위험에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치심과 관련된 사건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정보가 남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 프로이트가 그런 기억이 억압된다고 착각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그런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 실제로 억압이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은폐 전략을 취한다면 남들이 물어볼 때 기억을 못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 사건에 대한 정보가 남에게 샐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아예 스스로에게도 차단하는 메커니즘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종의 억압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엄밀한 검증 과정을 통해서 입증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억압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남들에게 알려질 것 같은 상황에서만 작동할 것이며 자기 자신은 그 정보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두고두고 써 먹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즉 다시는 그런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게끔 행동에 영향을 끼치도록 기억이 계속 작동할 것이다.

 

수치스러웠던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또는 남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면 은폐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그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도록 그리고 남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낀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는데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낭비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우선 누가 보고 있는지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숨어서 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을 수치심으로 채색해야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해 스스로 떠들어 대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 – 보상 전략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못을 실토하고 보상한다면 자신의 평판이 덜 떨어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처벌을 감수한다면 처벌하는 사람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실토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실토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보상을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보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처벌을 당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처벌을 당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프로이트는 처벌에 대한 욕구와 처벌을 당했을 때 느끼는 쾌감을 메저키즘(masochism)으로 해석했다. 일종의 자기 파괴 욕구로 본 것이다. 처벌 당하는 장면에만 주목한다면 그렇게 보인다. 두들겨 맞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행을 저질러서 평판이 나빠지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 고백하고 두들겨 맞음으로써 평판이 덜 떨어진다면 오히려 삶과 번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두 전략의 충돌
 

도덕적 영역이 아닐 때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두 전략이 충돌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도덕적 영역일 때에는 상황이 다르다. 은폐 전략과 고백-보상-처벌감수 전략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 메커니즘이 적응적으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율이 필요하다.

 

만약 이미 들켰거나 나중에 들킬 가능성이 높다면 수치심의 전략보다는 죄책감의 전략이 더 유용할 것 같다. 이럴 때에는 고백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폐 전략이 성공할 가망성이 적기 때문이다. 이 때 들킬 가능성에 대한 계산이 의식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악행이 너무나 중대하기 때문에 어차피 고백해도 평판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은폐 전략이 더 유력할 것이다. 이럴 때에는 죄책감보다 수치심이 더 강력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2009-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