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하하하님이 한윤형의 한겨레 기사, <망하면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vs 망하면 왼쪽으로 가는 남자> 링크를 걸어준 적이 있죠.
  이하는 그 기사와 느슨하게 관련해 끄적이는 잡상입니다.
 
  한국의 좌파정당들이 부진한 이유를 둘러싼 논란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바로 그 사회적 약자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습니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겠죠.


 유력한 원인이야 여러가지로 상정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한국 좌파 정당의 머리와 몸이 제각기 따로 놀고 있는 점을 빼놓기 어려운 듯 합니다. 분명히 몸은 사민주의 정당인데 마음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잔재가 짙게 남아있는 혁명정당이랄까. 이 은유가 좀 어색하다면 껍데기는 사민주의 정당이지만 몸뚱이는 혁명정당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와 사민주의는 서로 별개임과 동시에 거기서 더 나아서 서로 양립불가능한 이념이라고 여긴다는 건가? 네, 다를 뿐만 아니라 양립불가능합니다. 양자 모두 사회주의의 여러 조류에 속하긴 하지만 서로 양립불가능합니다. 사민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자가 될 순 없습니다.


 맑스 자신의 진정한 사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남긴 텍스트를 통해 일리있는 복수의 해석체계들을 추출해내는 게 고작이죠. 이런 일리있는 맑스사상의 해석들 가운데(맑스주의'' 가운데) 현실 역사에서 주류랄까, 고전적이랄까, 또는 정통이랄까, 뭐 어떻게 부르건 간에 통상 통하는 맑스 해석은 맑스의 절친이었던 엥겔스가 체계화시켰던 해석이고 이 엥겔스 버전의 맑스주의에서 이 이념의 중핵은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론입니다. 사민주의가 맑스주의와 양립불가능하다고 했던 말은 바로 이 엥겔스 버전의 맑스사상해석체계 또는 이에 상당히 영향한 받은 맑스주의들이 사민주의와는 양립불가능하단 뜻입니다. 왜 그런가?


 이 엥겔스 버전의 정통(혹은 주류, 고전) 맑스주의에서 역사의 변화(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동력은 생산력 수준의 발전입니다. 생산력 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기존의 생산력 관계가 이 발전되어버린 생산력과 충돌(모순)을 일으키고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면서 결국엔 붕괴된 다음 이 발전된 생산력 수준에 걸맞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하부구조가 재편됨에 따라 법률, 정치, 종교, 문화 등의 상부구조도 (복잡미묘한? 메커니즘을 통해) 새로이 재편됩니다. 간단한 예들 들자면, 노동시장을 통해 노동력이 거래되고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이 노동력을 구매해 이를 합리적으로 조직해 생산과정에 투입하는 등의 생산관계가 한 사회에 지배적인 생산방식으로 확립되면 이에 걸맞게 법률, 정치제도, 문화, 종교 등도 덩달아 변화(변모)를 겪는다는 스토립니다. 이 역사유물론에서는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적 국면의 변화(진보)를 추동하는 힘이니만큼, 생산력의 발전이 그 대표적인 자랑거리인 자본주의 체제 역시 그 이전의 생산양식과 꼭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그 역사적 종말을 맞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뒤따를 것이라는 것은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입니다. 해서 자본주의 필망론이죠.


 이런 역사발전이론에선 하부구조(생산력수준에 대응되는 특정한 형태의 생산관계)가 드라마의 주역이니만큼 상부구조인 정치(정치제도)는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이론에선 정치가 담당하는 역할이 주변적이죠.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생산력 발전이 생산관계의 전면적 변혁을 이끌어내기에 아직 충분치 않다면 상부구조인 정치제도를 제아무리 만지작거려봤자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결론도 성립합니다.


 그런데 사민주의란 바로 '정치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정치제도의 개혁(민주주의제도의 확산)하고 다시 이 제도개혁을 통해 경제권력(혹은 시장메커니즘)을 사회권력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사회주의 이념입니다. 그러니 전위적 혁명정당이 아닌, 보통의 정당을 구성해 의회제 민주주의의 룰에 따라 선거를 거쳐 의회에 진출하는 거죠. 사민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장, 국가, 사회는 이들 중 어느 하나가 기반, 혹은 하부구조를 형성하고 나머지가 그 위에 종속적, 부수적으로 얹혀 있는게 아닙니다. 각자가 그 나름의 자율적 영역을 가지면서 나란히 병렬되어 있으나 역사의 각 국면에 따라 어느 하나가 다른 둘에 비해 크게 우세한 세력을 점하고 있는 것이죠. 해서 이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말하듯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한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그 기반 위에 정치, 사회가 얹혀있는게 아니라, 이 셋이 사이좋게(?) 나란히 병렬되어 접합되어 있으나 그 중 자본제적 시장이 다른 둘인 국가와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 사회죠.


 만약 이런 사민주의적 관점이 맞다면, 굳이 자본제적 시장관계를 전면적으로 일시에 (혁명을 통해) 철폐하지 않더라도 국가와 사회의 영역과 힘을 조금씩 키워나가면 언젠가는(?) 사회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전망이 가능해집니다. 즉 생산수준의 발전이 야기하는 역사진보의 필연성 따위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조직적 활동으로 이뤄지는 '정치'가 사회변혁의 주역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해서 이 사민주의에서는 하나 하나의 개혁, 비인격적 시장관계의 힘을 사회의 공적 요구에 종속시키는 각각의 정치개혁들이 곧 (자그마한) 혁명입니다. 맑스주의에서처럼 근원인 생산관계를 그대로 나둔 채 껍데기인 상부구조만 헛되이 만지작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민주의는 정통 맑스주의와는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근본 전제와 귀결이 성호 양립불가능한 사회주의 이념입니다.


 그럼 한국의 좌파정당은 사민주의 정당인가?
 우선 겉모습은 사민주의 정당으로 보이죠. '제스쳐'만 보면 얼핏 사민주의 정당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여전히 혁명정당에 가까워요.
 이런 모순적 상황에 처하면 이를 해소할 가능한 해결안은 둘 중 하나로 귀결됩니다.


 고전적 맑스주의로의 복귀죠. 이게 지금 박노자가 선택한 길입니다. 이는 박노자가 요 근래 들어 구소련의 재평가(?)를 끈질기게 시도하는 정신적 퇴행현상을 보이는 것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사회변혁(혁명)으로서의 사민주의라는 의의는 상실되어 버린 채 굵직한 선이 빠져버린, 자잘한 개혁안들의 목록만을 제시하는 개량주의 노선이죠. 강조합니다만 사민주의가 아니라, 개량주의죠. 이게 제가 보건대 현재 진중권이 선택한 길입니다.

 어째 중간에 쓰다가 마는 기분이지만 여기까지만 해두죠. 한윤형이 전하는 박노자와 진중권의 모습을 제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가볍게 이야기하는 게 원래 이 글의 목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