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곳에만 머물러 있게 해주세요.


-------------

 

Passion In The Era of Decaffeinated Belief (By Slavoj Zizek)

카페인이 제거된 믿음 시대의 열정 (슬라보예 지젝)

 

출처The Symptom / 5, 2004년 겨울

http://www.lacan.com/passionf.htm

 

The credentials of those who, even prior to its release, virulently criticize Mel Gibson's new film on the last 12 hours of Christ's life, seem impeccable: are they not fully justified in their worry that the film, made by a fanatic Catholic traditionalist with occasional anti-Semitic outbursts, may ignite anti-Semitic sentiments? More general, is Passion not a kind of manifesto of our own (Western, Christian) fundamentalists and anti-secularists? Is then not the duty of every Western secularist to reject it? Is such an unambiguous attack not a sine qua non if we want to make it clear that we are not covert racists attacking only the fundamentalism of other (Muslim) cultures?

 

개봉하기도 전에 그리스도의 삶의 마지막 12시간을 다룬 멜 깁슨의 새 영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들의 신조는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그들은 간혹 반유태주의적 언사를 내뱉는 광적인 카톨릭 전통주의자가 만든 영화가 반유태주의적 정서들을 야기할 것을 걱정하는 점에서 전적으로 정당하지 않은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수난>은 우리 자신 (서구 기독교도) 의 근본주의자들 및 반 세속주의자들의 일종의 선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서구 세속주의자들의 의무이지 않은가? 우리가 다른 (무슬림) 문화들의 근본주의만을 공격하는 은밀한 인종주의자들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하다면 그러한 모호하지 않은 공격은 하나의 필요조건이 아닌가


The Pope's ambiguous reaction to the film is well known: immediately after seeing it, deeply moved, he muttered "It is as it was!" and this statement was quickly withdrawn by the official Vatican speakers. A glimpse into the Pope's spontaneous reaction was thus quickly replaced by the "official" neutral stance, corrected in order not to hurt anyone. This shift is the best exemplification of what is wrong with liberal tolerance, with the Politically Correct fear that anyone's specific religious sensibility may be hurt: even if it says in the Bible that the Jewish mob demanded the death of Christ, one should not stage this scene directly, but play it down and contextualize it to make it clear that Jews are collectively not to be blamed for the Crucifixion... The problem of such a stance is that, in this way, the aggressive religious passion is merely repressed: it remains there, smoldering beneath the surface and, finding no release, gets stronger and stronger.

 

이 영화에 대한 교황의 이중적 반응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본 후 즉시 깊이 감동해 그는 바로 이랬어라고 소리쳤다 - 그리고 이 진술은 공식 바티칸 대변인에 의해 재빨리 철회되었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교황의 자발적 반응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도록 정정된, “공식적중립적 자세로 재빨리 대체되었다. 이 변경은 자유주의적 관용이, 누군가의 특유한 종교적 감성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두려움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가장 잘 예시해준다: 성경에 유대인 군중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했다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장면을 직접적으로 재현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형에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책임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 장면을 완화해야 하고 그 장면을 맥락화해야 한다... 그러한 자세의 문제점은 이런 식으로는 공격적인 종교적 열정은 단순히 억압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표면 아래서 이글거리면서, 그리고 아무런 출로도 찾지 못한 채로, 거기 그대로 남아 있으며, 점점 더 강해진다.


In November 2002, George Bush came under attack by the right wing members of his own party for what was perceived as too soft a stance on Islam: he was reproached for repeating the mantra that terrorism has nothing to do with Islam, this great and tolerant religion. As a column in The Wall Street Journal put it, the true enemy of the United States is not terrorism, but militant Islam. Consequently, one should gather the courage and proclaim the politically incorrect (but, nonetheless, obvious) fact that there is a deep strain of violence and intolerance in Islam that, to put it bluntly, something in Islam resists the acceptance of the liberal-capitalist world order. It is here that a truly radical analysis should break with the standard liberal attitude: no, one should NOT defend Bush here - his attitude is ultimately no better than that of Cohen, Buchanan, Pat Robertson and other anti-Islamists both sides of this coin are equally wrong. It is against this background that one should approach Oriana Fallaci's The Rage and the Pride, this passionate defense of the West against the Muslim threat, this open assertion of the superiority of the West, this denigration of Islam not even as a different culture, but as barbarism (entailing that we are not even dealing with a clash of civilizations, but with a clash of our civilization and Muslim barbarism). The book is stricto sensu the obverse of Politically Correct tolerance: its lively passion is the truth of lifeless PC tolerance.

 

200211, 조지 부시는 이슬람에 대해 너무 온화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그 자신의 당의 우익 성원들로부터 공격 받았다: 그는 테러리즘이 이슬람과, 그 위대하고 관용적인 종교와 무관하다는 진언을 반복한다고 비난받았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한 컬럼이 말한 대로, 미국의 진짜 적은 테러리즘이 아니라 전투적 이슬람이다. 따라서, 용기를 끌어 모아 이슬람에는 폭력과 비관용의 기질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 거칠게 말하면, 이슬람 속의 어떤 것이 자유주의-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승인을 거부한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명백한) 사실을 주장해야 한다. 진짜 급진적인/근본적인 분석이 표준적인 자유주의적 태도와 단절해야 하는 곳은 여기다: 아니, 여기서 부시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 그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코엔, 부캐넌, 팻 로버트슨 그리고 다른 반이슬람주의자들의 태도보다 더 낫지 않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으로, 똑같이 잘못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분노와 자존심 The Rage and the Pride>, 무슬림의 위협에 맞선 서구에 대한 이 열정적 옹호는, 서구가 무슬림보다 우월하다는 이 공개적 주장은, (우리가 대처하고 있는 사태는 결코 문명들의 충돌이 아니라 우리 문명과 무슬림 야만의 충돌임을 함축하는) 이슬람은 하나의 다른 문화이기는커녕 야만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 이슬람 폄하는 이 점을 배경으로 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용의 이면이다: 그것의 생생한 열정은 생기없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용의 진리이다


Within this horizon, the only "passionate" response to the fundamentalist passion is aggressive secularism of the kind displayed recently by the French state where the government prohibited wearing all too conspicuous religious symbols and dresses in schools (not only the scarves of Muslim women, but also the Jewish caps and too large Christian crosses). It is not difficult to predict what the final result of this measure will be: excluded from the public space, the Muslims will be directly pushed to constitute themselves as non-integrated fundamentalist communities. This is what Lacan means when he emphasized the link between the rule of post-revolutionary fraternité and the logic of segregation.

 

이 지평 내에서, 근본주의적 열정에 대한 유일한 열정적반응은 최근 프랑스 국가가 내보인 종류의 공격적 세속주의이다. 정부는 학교들에서 너무 티 나게 종교적인 상징물들과 의복들을 (무슬림 여성들의 스카프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모자들과 너무 큰 기독교 십자가들도) 착용하거나 패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조치의 최종적 결과가 무엇일지는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공적 공간에서 배제되어, 무슬림들은 그 자신들을 통합되지 않은 근본주의 공동체들로 구성하라는 직접적 압력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혁명적 형제애(fraternité)의 창궐과 분리의 논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조했을 때 라캉이 의미한 것이다.


And, perhaps, the prohibition to embrace a belief with a full passion explains why, today, "culture" is emerging as the central life-world category. Religion is permitted not as a substantial way of life, but as a particular "culture" or, rather, life-style phenomenon: what legitimizes it is not its immanent truth-claim but the way it allows us to express our innermost feelings and attitudes. We no longer "really believe," we just follow (some of the) religious rituals and mores as part of the respect for the "life-style" of the community to which we belong (recall the proverbial non-believing Jew who obeys kosher rules "out of respect for tradition").

 

그리고, 아마, 열렬히 믿기 금지는 왜 오늘날 문화가 중심적인 생활세계 범주로 출현하고 있는지 설명해 줄 것이다. 종교는 허용된다 하나의 실체적 생활방식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문화또는, 차라리, 라이프-스타일 현상으로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의 내재적 진리-주장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감정들과 태도들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진짜로 믿지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존중의 부분으로서 종교적 의례들과 습속들 일부를 따를 뿐이다(“전통에 대한 존경심에서코셔(kosher) 규칙들에 순응하는 이름난 비 유대교신자 유대인들을 떠올려 보라).


--

http://ko.wikipedia.org/wiki/코셔: 코셔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이다. 코셔에서 금기시하는 것으로는 육류와 유제품을 섞어서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십일조를 내지 않은 이스라엘 제품조차 사용하지 않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 

 

"I do not really believe in it, it is just part of my culture" effectively seems to be the predominant mode of the disavowed/displaced belief characteristic of our times: what is a "cultural life-style" if not the fact that, although we do not believe in Santa Claus, there is a Christmas tree in every house and even in public places every December? Perhaps, then, "culture" is the name for all those things we practice without really believing in them, without "taking them seriously." Is this not also the reason why science is not part of this notion of culture it is all too real? And is this also not why we dismiss fundamentalist believers as "barbarians," as anti-cultural, as a threat to culture they dare to take seriously their beliefs? Today, we ultimately perceive as a threat to culture those who immediately live their culture, those who lack a distance towards it. Recall the outrage when, three years ago, the Taliban forces in Afghanistan dynamited the ancient Buddhist statues at Bamiyan: although none of us, enlightened Westerners, believed in the divinity of Buddha, we were so outraged because the Taliban Muslims did not show the appropriate respect for the "cultural heritage" of their own country and the entire humanity. Instead of believing through the other like all people of culture, they really believed in their own religion and thus had no great sensitivity for the cultural value of the monuments of other religions for them, the Buddha statues were just fake idols, not "cultural treasures." (And, incidentally, is this outrage not the same as that of today's enlightened anti-Semite who, although he does not believe in Christ's divinity, nonetheless blames Jews for killing our Lord Jesus? Or as the typical secular Jew who, although ne does not believe in Jehova and Moses as his prophet, nonetheless thinks that Jews have a divine right to the land of Israel?)

 

나는 그것을 실제로는(really)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는 실질적으로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되는/전치되는 믿음의 지배적 양식인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우리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12월이면 집집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공공장소들에조차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문화적 라이프-스타일이란 무엇인가? 아마, 그렇다면, “문화는 우리가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실천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과학이 이 문화 개념의 일부가 아닌 이유는 아닐까? 과학은 너무 실제적인 것이라는 이유?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근본주의적 신자들을 야만인들이라고, -문화적이라고, 문화를 위협하는 이들이라고 내치는 이유는 아닐까? 그들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의 믿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오늘날,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매개적으로 문화를 실 생활화 하는 이들을, 문화와 거리를 두지 않는 이들을 문화를 위협하는 이들로 지각한다. 3년 전, 아프카니스탄의 탈리반 무장세력이 바미얀에 있는 고대 불상들을 폭파했을 때의 격분을 떠올려보라: 비록 우리 계몽된 서구인들 중 아무도 부처의 신성함을 믿고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탈리반 무슬림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와 전체 인류의 문화유산에 대한 적절한 존중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격분했다. 문화적인 모든 사람들처럼 타자를 통해 믿는 대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실제로 믿었고 따라서 다른 종교들의 기념비들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아무런 깊은 감수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 부처 조상들은 문화적 보물들이 아니라 허위적인 우상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덧붙여 말하자면, 이 격분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우리 주 예수를 살해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을 탓하는 오늘날의 계몽된 반유대주의자들의 격분과 동종의 것이 아닌가? 또는 야훼를 믿지 않고 모세를 그의 예언자라고 믿지 않는 전형적인 세속적 유대인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대해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과 동종의 것이 아닌가?)


Jacques Lacan's definition of love is "giving something one doesn't have" - what one often forgets is to add the other half which completes the sentence: "... to someone who doesn't want it." This is confirmed by our most elementary experience when somebody unexpectedly declared passionate love to us is not the first reaction, preceding the possible positive reply, that something obscene, intrusive, is being forced upon us? This is why, ultimately, passion as such is "politically incorrect": although everything seems permitted, prohibitions are merely displaced. Recall the deadlock of sexuality or art today: is there anything more dull, opportunistic, and sterile than to succumb to the superego injunction of incessantly inventing new artistic transgressions and provocations (the performance artist masturbating on stage or masochistically cutting himself, the sculptor displaying decaying animal corpses or human excrements), or to the parallel injunction to engage in more and more "daring" forms of sexuality... In some "radical" circles in the US, there came recently a proposal to "rethink" the rights of necrophiliacs (those who desire to have sex with dead bodies) why should they be deprived of it? So the idea was formulated that, in the same way people sign permission for their organs to be used for medical purposes in the case of their sudden death, one should also allow them to sign the permission for their bodies to be given to necrophiliacs to play with them... Is this proposal not the perfect exemplification of how the PC stance realizes Kierkegaard's old insight into how the only good neighbor is a dead neighbor? A dead neighbor a corpse is the ideal sexual partner of a "tolerant" subject trying to avoid any harassment: by definition, a corpse cannot be harassed...

 

자크 라캉의 사랑 정의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 - 종종 깜박하는 것은 그 문장을 완성하는 다른 절반을 덧붙이는 것이다: “... 그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이것은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우리에게 열정적 사랑을 선언했을 때의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경험에 의해 확증된다 가능한 긍정적 반응을 선행하는 첫 번째 반응은 외설적인, 침입적인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강제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궁극적으로 열정 자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이유이다: 비록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처럼 보여도, 금지들은 전치된 채로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날 섹슈얼리티나 예술의 막다른 골목을 떠올려보라: 그 어떤 것이 새로운 예술적 위반들과 도발들 (가학적으로 자신에게 칼질을 하거나 무대 위에서 자위를 하는 퍼포먼스 예술가, 부패 중인 동물 사체들이나 인간의 배설물을 전시하는 조각가) 을 끊임없이 창안하라는 수퍼 에고의 명령에, 또는 점점 더 섹슈얼리티의 대담한형태들에 뛰어들라는, 그것과 평행하는 명령에 굴복하는 것보다 더 둔하고 기회주의적이며 불모적일까? 미국의 몇몇 급진 서클들 내에서는 최근 네크로필리아 (시체와 섹스하는 것을 욕망하는 이들)의 권리를 재고해야 한다고 제안한 이들이 있었다 왜 그들이 그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그렇게, 사람들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의료 목적으로 자신들의 장기가 이용되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이 그들과 섹스하고자 하는 네크로필리아에게 그들의 시체들이 제공되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식화되었다... 이 제안은 어떻게 정치적 올바름 자세가 어떻게 유일한 좋은 이웃은 죽은 이웃인가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오래된 통찰을 실현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예시가 아닌가? 죽은 이웃 - 시체 - 은 어떤 회롱도 피하는 것을 시도하는 관용적주체의 이상적인 섹스 파트너이다: 정의상, 시체는 회롱당할 수 없다...


On today's market, we find a whole series of products deprived of their malignant property: coffee without caffeine, cream without fat, beer without alcohol... And the list goes on: what about virtual sex as sex without sex, the Colin Powell doctrine of warfare with no casualties (on our side, of course) as warfare without warfare, the contemporary redefinition of politics as the art of expert administration as politics without politics, up to today's tolerant liberal multiculturalism as an experience of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featur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Along the same lines, what the Politically Correct tolerance is giving us is a decaffeinated belief: a belief which does not hurt anyone and does not fully commit even ourselves.

 

오늘날의 시장에서, 우리는 유해한 성분이 제거된 갖가지 일련의 제품들을 발견한다: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 없는 크림, 알콜 없는 맥주... 리스트는 계속 이어진다: 섹스 없는 섹스로서의 가상 섹스, 전쟁 없는 전쟁으로서의 콜린 파웰의 사상자 (물론, 우리 편 사상자) 없는 전쟁 독트린, 정치 없는 정치로서의 전문 행정기술로서의 정치로의 동시대의 정치 재정의, 그것의 타자성이 박탈된 타자 (매혹적인 춤들을 추며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전일론적 접근을 하는 반면, 부인 구타 같은 면모들은 시야 밖에 남아 있는 이상화된 타자...) 경험으로서의 오늘날의 관용적인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어떤가? 동일한 노선을 따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용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은 카페인이 제거된 믿음이다: 어느 누구도 상처주지 않고 우리 자신들조차도 헌신하지 않는 믿음.


Everything is permitted to today's hedonistic Last Man - you can enjoy everything, BUT deprived of its substance which makes it dangerous. This is why Lacan was right to turn around Dostoyevski's well-known motto: "If God doesn't exist, everything is prohibited!" God is dead, we live in a permissive universe, you should strive for pleasures and happiness but, in order to have a life full of happiness and pleasures, you should avoid dangerous excesses, be fit, live a healthy life, not harass others... so everything is prohibited if it is not deprived of its substance, and you end up leading a totally regulated life. And the opposite also holds: if there is God, then everything is permitted to those who claim to act directly on behalf of God, as the instruments of His will. Clearly, a direct link to God justifies our violation of any "merely human" constraints and considerations (as in Stalinism, where the reference to the big Other of historical Necessity justifies absolute ruthlessness).

 

오늘날의 쾌락주의적인 최후의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 당신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 그것을 위험한 것이 되게 하는 그것의 실체는 빼고. 이것이 라캉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잘 알려진 모토를 올바르게 뒤집었던 이유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관대한 세계에 살고 있다, 당신은 쾌락과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행복과 쾌락들로 가득한 삶을 살기 위해, 당신은 위험한 과도함을 피해야 하고, 알맞아야 하고, 건강한 생활을 해야 하고, 타자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실체가 제거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금지되며, 따라서 당신은 총체적으로 규제되는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반대 또한 타당하다: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의 의지의 도구들로서, 직접적으로 신을 위해 행위한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분명, 신과의 직접적 연결은 우리가 어떤 한갓 인간적인제한들과 고려들도 위반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대타자에 준거함이 절대적 무자비함을 정당화하는 스탈린주의에서처럼). 


Today's hedonism combines pleasure with constraint it is no longer the old notion of the "right measure" between pleasure and constraint, but a kind of pseudo-Hegelian immediate coincidence of the opposites: action and reaction should coincide, the very thing which causes damage should already be the medicine. It is no longer "Drink coffee, but with moderation!"; it is rather "Drink all the coffee you want, because it is already decaffeinated..." The ultimate example of this stance is chocolate laxative, available in the US, with the paradoxical injunction "Do you have constipation? Eat more of this chocolate!" - i.e., of the very thing which causes constipation. And is not a negative proof of the hegemony of this stance the fact that true unconstrained consumption (in all its main forms: drugs, free sex, smoking...) is emerging as the main danger? The fight against these dangers is one of the main investments of today's "biopolitics." Solutions are here desperately sought which would reproduce the paradox of the chocolate laxative. The main contender is "safe sex" a term which makes one appreciative of the truth of the old saying "Is having sex with a condom not like taking a shower with a raincoat on?" The ultimate goal would be here, along the lines of decaf coffee, to invent "opium without opium": no wonder marijuana is so popular among liberals who want to legalize it it already IS a kind of "opium without opium".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쾌락과 억제를 결합한다 그것은 더 이상 쾌락과 억제 사이의 적당한 정도라는 오래된 관념이 아니라 대립물들의 사이비-헤겔적인 직접적 일치의 일종이다: 작용과 반작용은 일치해야 하며, 손상을 야기하는 바로 그것이 이미 치료제이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커피를 마셔라. , 적당히!”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카페인이 제거되어 있으니... 당신이 원하는 모든 커피를 마셔라이다. 이 자세의 궁극적 사례는 미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변비를 앓고 있나요? 그렇다면 이 초콜렛을 더 많이 먹어보세요!”라는 역설적 권고가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는 설사제 겸용 초콜렛이다. , 변비를 야기하는 바로 그것을 더 먹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억제되지 않은 소비가 (그것의 모든 주요 형태들로: 마약, 자유 섹스, 흡연...) 주요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자세의 헤게모니의 부정적 증거가 아닐까? 이 위험들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오늘날의 생정치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하나이다. 설사제 겸용 초콜렛의 역설을 재생산하곤 하는 해결책들이 여기서 필사적으로 추구된다. [설사제 겸용 초콜렛]의 주요 경쟁자는 안전한 섹스콘돔을 사용한 채로 섹스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라는 오래된 말의 진리를 감식하게 해주는 용어이다. 궁극적 목표는 여기서,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의 노선을 따라서, “아편 없는 아편을 발명하는 것이다: 마리화나가 그것을 합법화화기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그토록 인기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일종의 아편 없는 아편이다.


The structure of the "chocolate laxative," of a product containing the agent of its own containment, can be discerned throughout today's ideological landscape. There are two topics which determine today's liberal tolerant attitude towards Others: the respect of Otherness, openness towards it, AND the obsessive fear of harassment in short, the Other is OK insofar as its presence is not intrusive, insofar as the Other is not really Other... This is what is more and more emerging as the central "human right" in late-capitalist society: the right not to be harassed, i.e., to be kept at a safe distance from the others. A similar structure is clearly present in how we relate to capitalist profiteering: it is OK IF it is counteracted with charitable activities first you amass billions, then you return (part of) them to the needy... And the same goes for war, for the emerging logic of humanitarian or pacifist militarism: war is OK insofar as it really serves to bring about peace, democracy, or to create conditions for distributing humanitarian help. And does the same not hold more and more even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it is OK if human rights are "rethought" to include torture and a permanent emergency state, if democracy is cleansed of its populist "excesses"...

 

설사제 겸용 초콜렛, 그것 자체의 억제 작용자를 포함하고 있는 제품의 구조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 경관 도처에서 식별될 수 있다. 타자들에 대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관용 태도를 규정하는 두 개의 원칙들이 있다: 타자성에 대한 존중, 그것을 향해 개방되어 있음, 그리고 괴롭힘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 간단히 말하면, 타자는 그것의 현존이 칩입적이지 않은 한, 타자가 정말로 타자가 아닌 한, OK이다... 이것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중심적인 인권으로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괴롭힘 당하지 않을 권리, , 타자들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있을 권리. 우리가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에도 분명 유사한 구조가 있다: 자선 활동들로 그것에 반작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OK이다 먼저 수십억 달러를 긁어 모아라, 그 다음 궁핍한 이들에게 그것의 (일부)를 돌려줘라... 전쟁도, 부상하고 있는 인도주의적이거나 평화주의적 군사개입 논리도 마찬가지다: 평화, 민주주의를 야기하는데, 또는 인도주의적 원조를 베푸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창출하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한, 전쟁은 OK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서도 점점 더 같은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문과 영구적 비상사태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고된다면, 인권은 OK이다, 그것의 포퓰리즘적 과도함으로부터 정화된다면, 민주주의는 OK이다...

 

In our era of over-sensitivity for "harassment" by the Other, every ethical pressure is experienced as a false front of the violence of power. This stance gives rise to the effort to "rewrite" religious injunctions, making them adequate to our specific condition. Is some command too severe? Let us reformulate it in accordance with our sensitivities!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 except if it is emotionally sincere and serves the goal of your profound self-realization... Exemplary is here Donald Spoto's The Hidden Jesus, a New Age tainted "liberal" reading of Christianity, where we can read apropos of divorce: "Jesus clearly denounced divorce and remarriage. /.../ But Jesus did not go further and say that marriages cannot be broken /.../ nowhere else in his teaching is there any situation when he renders a person forever chained to the consequences of sin. His entire treatment of people was to liberate, not to legislate. /.../ It is self-evident that in fact some marriages simply do break down, that commitments are abandoned, that promises are violated and love betrayed." Sympathetic and "liberal" as these lines are, they involve the fatal confusion between emotional ups and downs and an unconditional symbolic commitment which is supposed to hold precisely when it is no longer supported by direct emotions. What Spoto is effectively saying is: "Thou shalt not divorce - except when your marriage 'in fact' breaks down, when it is experienced as an unbearable emotional burden that frustrates your full life" - in short, except when the prohibition to divorce would have regained its full meaning (since who would divorce when his/her marriage still blossoms?)!

 

타자에 의한 괴롭힘에 과도하게 예민한 우리 시대에, 모든 윤리적 압력은 권력의 폭력의 허위적 간판으로 경험된다. 이 자세는 종교적 명령들을 다시 쓰려는”, 그것들을 우리의 고유한 조건에 적합한 것이 되게 하려는 노력을 낳는다. 일부 명령은 너무 가혹한가? 그럼 우리 그것을 우리의 감수성에 맞게 재공식화하자! “너희는 간음하지 말지어다!” - , 그것이 정서적으로 성실하고 당신의 심오한 자아-실현 목표에 봉사하는 경우는 예외다... 여기서 범례적인 것은 도널드 스파토의 <숨겨진 예수>이다. 기독교에 대한 뉴 에이지 풍의 자유주의적독해인 이 책에서 우리는 이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예수는 분명 이혼과 재혼을 비난했다. /.../ 그러나 예수는 더 나아가 결혼을 깨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그의 가르침 어디에도 그가 사람을 영원히 죄의 귀결들에 묶여있게 한다고 본 상황은 없다. 사람들에 대한 그의 대우는 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 사실 어떤 결혼들이 절대적으로 깨진다는 것, 헌신이 포기된다는 것, 약속이 위반되고 사랑이 배신당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구절들은 공감적이고 자유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정서적 상승 및 침체와 직접적 정서들에 의해 더 이상 지지되지 않을 때도 엄밀하게 유지해야 하는 무조건적인 상징적 헌신을 치명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스파토가 결국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당신들은 이혼해서는 안 된다 - , 당신의 결혼이 사실상깨졌을 때는, 그것이 당신의 온전한 생활을 좌절시키는 참을 수 없는 정서적 하중으로서 경험될 때는 예외다” - 간단히 말하면, 이혼 금지가 그것의 온전한 의미를 재획득한다면 예외다! (그렇치만, 부부사이가 화기애애하다면 누가 이혼하려고 하겠는가?)


Does this mean that, against the false tolerance of the liberal multiculturalism, we should return to religious fundamentalism? The very ridicule of Gibson's film makes clear the impossibility of such a solution. Gibson first wanted to shoot the film in Latin and Aramaic and to show it without subtitles; under the pressure of distributors, he later decided to allow English (or other) subtitles. However, this compromise on his part is not just a concession to the commercial pressure; sticking to the original plan would rather directly display the self-refuting nature of Gibson's project. That is to say, let us imagine the film without subtitles shown in a large American suburban mall: the intended fidelity to the original would turn it into its opposite, into an incomprehensible exotic spectacle.

 

이것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허위적인 관용[적 자세]에 맞서 우리가 종교적 근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깁슨의 영화에 대한 바로 그 조소는 그러한 해결책이 불가능함을 분명히 한다. 깁슨은 처음에 라틴어와 아람어로 그 영화를 찍어 자막 없이 상영하기를 원했다; 배급자들의 압력을 받아 그는 나중에 영어 (또는 다른 언어) 자막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그의 편에서의 이 타협은 상업적 압력에 대한 양보인 것만은 아니다; 원래 계획을 고수했다면 오히려 깁슨의 기획의 자기-반박적 성격이 직접적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 그 영화가 자막 없이 미국의 대형 교외 [쇼핑] 몰에서 상영된다고 상상해 보자: 의도된 실제 그대로는 그것을 그것의 대립물로, 파악할 수 없는 이국적 스펙터클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But there is a third position, beyond religious fundamentalism and liberal tolerance. Let us return to the "politically correct" distinction between Islamic fundamentalism and Islam: Bush and Blair (and even Sharon) never forget to praise Islam as a great religion of love and tolerance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the disgusting terrorist acts... In the same way that this distinction between "good" Islam and "bad" Islamic terrorism is a fake, one should also render problematic the typical "radical-liberal" distinction between Jews and the State of Israel or Zionism, i.e., the effort to open up the space in which Jews and Jewish citizens of Israel will be able to criticize the State of Israel's politics and Zionist ideology not only without being accused of anti-Semitism, but, even more, formulating their critique as based on their very passionate attachment to Jewishness, on what they see as worth saving in the Jewish legacy. Is, however, this enough? Marx said about the petit-bourgeois that he sees in every object two aspects, bad and good, and tries to keep the good and fight the bad. One should avoid the same mistake in dealing with Judaism: the "good" Levinasian Judaism of justice, respect for and responsibility towards the other, etc., against the "bad" tradition of Jehova, his fits of vengeance and genocidal violence against the neighboring people. One should gather the courage to transpose the gap, the tension, into the very core of Judaism: it is no longer the question of defending the pure Jewish tradition of justice and love for the neighbor against the Zionist aggressive assertion of the Nation-State. Along the same lines, instead of celebrating the greatness of true Islam against its misuse by fundamentalist terrorists, or of bemoaning the fact that, of all great religions, Islam is the one most resistent to modernization, one should rather conceive this resistance as an open chance: it does not necessarily lead to "Islamo-Fascism," it can also be articulated into a Socialist project. Precisely because Islam harbors the "worst" potentials of the Fascist answer to our present predicament, it can also turn out to be the site for the "best".

 

그러나 종교적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적 관용을 넘어 제3의 입장이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이슬람 사이의 정치적으로 올바른구별로 돌아가 보자: 부시와 블레어는 (그리고 샤론조차도) 이슬람을 혐오스러운 테러 행위와는 무관한 위대한 사랑과 관용의 종교라고 찬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선한이슬람과 나쁜이슬람 테러리즘 사이의 이 구별이 위조품인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국가 또는 시오니즘 사이의 전형적인 급진-자유주의적구별, 즉 유태인들 및 이스라엘의 유태인 시민들이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와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반유태주의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비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 그들의 비판을 유태인적임에 대한 그들의 바로 그 열정적인 애착에, 그들이 유태인 유산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에 토대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식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노력 또한 미심쩍은 것으로 판결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마르크스는 모든 대상에서 두 측면, 즉 나쁜 면과 좋은 면을 보고 좋은 면은 유지하고 나쁜 면은 맞서 싸우려고 하는 프티 부르주아지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유태주의를 상대하면서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정의, 타자에 대한 존중과 책임, 기타 등등의 성격을 갖는, “좋은레비나스적 유태주의에는 찬성하고 이웃 종족들에게 복수와 제노사이드적 폭력을 분출하는 야훼의 나쁜전통에는 반대하기. 그 간극을, 그 긴장을 유태주의의 중핵 속으로 옮겨놓는 용기를 내야한다: 그것은 더 이상 시오니즘적인 공격적인 민족국가 주창에 맞서 정의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순수 유태주의 전통을 방어하는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이슬람의 위대성을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이슬람의 오용에 맞서 찬양하거나 모든 위대한 종교들 중에서도 이슬람이 현대화에 가장 저항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사실을 한탄하는 대신, 오히려 이 저항을 하나의 열려 있는 기회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슬람적 파시즘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사회주의 기획으로 분절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현재의 곤경에 대한 파시즘적 응답이라는 최악의잠재력을 감추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슬람은 또한 최상[의 것]”을 위한 장소인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Instead of trying to redeem the pure ethical core of a religion against it's political instrumentalizations, one should thus ruthlessly criticize this very core in ALL religions. Today, when religions themselves (from the New Age spirituality to the cheap spiritualist hedonism of Dalai Lama) are more than ready to serve the postmodern pleasure-seeking, it is paradoxically only a consequent materialism which is able to sustain a truly ascetic militant ethical stance.

 

한 종교의 순수 윤리적 중핵을 그 종교의 정치적 도구화에 맞서 구제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바로 이 중핵을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 모든 종교들에서. (뉴 에이지 영성으로부터 달라이 라마의 싸구려 정신주의적 쾌락주의에 이르기까지) 종교들 자체가 포스트모던적인 쾌락 추구에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일관성 있는 유물론만이 하나의 참되게 금욕적인 윤리적 자세를 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