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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등 구 공산권의 실패 원인을 얘기할 때 민주집중제 부재 등 의사결정 절차상의 문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미누에 님이 저에 대한 답글에서 거론하신 문제도 결국 의사결정 절차의 적절성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학생체벌 금지라는 구체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학생체벌 금지라는 정책을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조업체 등에서 사용한다는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즉, 이 문제의 정답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정답에 이르는 과정이 어떠해야 했을까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접근의 시초에서부터 저는 딱 막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 다들 인정할 수 있는 모델이 있느냐는 거죠. 혹시 미누에님은 갖고 계십니까?
저는 그런 정답, 좌우 양쪽 모두는 아니라 할지라도 학생과 교사, 학부모 나아가 정책 담당자 및 일반 국민여론까지 설득할 수 있는 어떤 모범답안이 있는지 생각해봤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설혹 그런 모범답안이 있다 해도 그 답안에 대한 인지도나 합의 수준은 무척 빈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적이라 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형태와 성격은 다르겠지만 결국 문제는 발생할 것이고 정책적 효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봐요. 저는 지금 좌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모든 사안을 양자택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흑백논리라고 말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저는 보다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부재, 대안 창출의 능력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체벌 금지 문제에 대해 좌파는 찬성이냐 반대 외에 다른 선택지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토론이 나오기 어렵다는 거죠.
저는 학생체벌 금지 제도를 도입할 때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장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교사와 학생이 상호 거부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학생은 교사로부터 수업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교사의 수업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교사 역시 자신이 감당할 수 없고 감당하기도 싫은 학생에 대해 "너는 내 수업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령하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없는 한 체벌금지니 뭐니 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실효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런 교사-학생 상호 거부권 및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애초에 체벌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필요조차 없어집니다. 왜 체벌을 합니까? 학생은 교사가 마음에 안들면 다른 교사를 찾아가면 될 것이고, 교사는 싸가지 없는 학생놈들 그냥 교실 밖으로 쫓아내면 그만인데요. 체벌이 필요해지는 이유 자체를 근원적으로 없애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대안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좌파의 체벌금지 운운하는 얘기는 무척 공허한 얘기가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체벌금지의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얘기들이 모두 김 빠진 맥주 얘기일 수밖에 없다고 보구요. 문제는 논의가 이렇게 확산되면 이것은 체벌금지냐 아니냐의 차원을 떠나 현재의 학교시스템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 좌파라면 이런 논의를 조직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상상력이나 기획, 실행능력 모든 측면에서요.
그래서, 님이 말씀하시는 의사결정 절차상의 문제를 저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나라 좌파들이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구요. 대안의 존재 여부를 떠나 사실 체벌 자체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인지도 저는 잘 모르겠구요. 체벌보다는 빵셔틀이니 일진이니 하는 게 훨씬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에게 절실한 문제 아닐까요?
읽고 나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는데 제가 당초의 글을 약간 이상하게 썼다는 겁니다. 해서 제 생각이 '일부분'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점이 있고 그 부분에 관한한 독자들이 오해하기 좋게끔 쓴 부분이 있어 이를 여기서 바로잡아 보고 싶습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된다면, 미투라고라님과 제 생각 중에 (엇갈리는 점도 있지만) 겹치는 부분도 적잖게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 봅니다.
우선, 체벌 자체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 말은 체벌이 (문제일지도 있지만) 우선순위라는 면에서 그다지 급한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는 빵셔틀이니 일진이니 하는 문제가 '현장'의 교사, 학생, 학부모에게 정말 문제임 분명하다는, 말을 다소 완곡하게 하신 것에 지나지 않죠. 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100% 동감합니다 (왕따로 자살한 학생은 곧잘 나와도 체벌 당했다고 목숨을 끊는 학생은 없거나 극히 드물죠).
저 역시 체벌보다는 학생간 학내폭력문제가 훨씬 시급하고 중차대한, 적어도 체벌문제에 비교하면, 그렇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저는 곽노현 교육감이 체벌금지에 저토록 열을 내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어요. 이미 했던 말이지만, 그 의도는 좋습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학생 간의 권력위계에 의거한 물리적 폭력을 한번 없애보겠다는데, 그 취지 자체를 거부하긴 어렵거든요. 그런데도 떨떠름한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는다고 할까.....
그래서 든 생각(짐작)이 이런 거였습니다. 만약 곽노현 교육감이 공교육 현장이라는 '기반'의 상황을 제대로 알았다면 정말 저 체벌금지라는 시책을 우선순위 1순위로 삼다시피 했을까? 만약 곽노현 교육감이 학내 폭력을 없애는 것을 시급한 과제로 상정했다면, 그 문제에 관해 일선교사들 및 학부모, 학생들의 생각을 폭넓게 들어봤으면 어땠을까? 그게 좀 뭐하다면 하다 못해 자신과 코드가 잘 맞을 전교조 소속 교사들만이라도 대상으로 삼아 그 의견들을 들어봤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교내폭력 가운데 학생들 간의 폭력이 훨씬 더 위급하다는 점을 감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당장 부정적인 시나리오가 떠오르더구요. 어쩌면 곽노현 교육감은 자기 나름 '이상'에는 충실하려고 애쓰지만, 앞뒤가 꽉 막힌 '좌파꼴통'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많죠. 꼴통은 좌우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건 아마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의견 공청이고 뭐고 그런거 백날 해봤자 답이 안 나옵니다. 꼴통이 우파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까진 저나 미투라고라님이나 의견 차가 크다고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갈리기 시작하는 건 아마 여기 이후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그닥 자신은 없지만, 미투라고라님은 좌파들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상상력, 구상력을 발휘해 학교교육현장의 병폐를 해소할만한 전면적인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탑다운 방식의 문제해결안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이래요. 학교 현장의 학교폭력문제에서 가장 그 해결이 시급하게 요청되면서도 심각한 사안은 빵셔틀이니 일진이니 하는 것이라는데 현장에 관련된 이해관계자들(교사, 학생, 학부모) 공히 잘 알고 있다. 다 알다시피 체벌 받았다고 자살하는 학생은 없거든요. 왕따당해서 자살하는 학생들은 곧잘 나오지만. (아마도) 곽노현의 탁상공론적 추론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본다면, 이런 왕따 현상은 창의성과 자율성을 말살하는 억압적 공교육 체제 및 교사부터 솔선수범해 보이는 체벌폭력에서 비롯된'파생'적 현상으로 이를 뿌리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면 해결안은 때묻지 않은 순진한 백지상태의 학생들을 폭력화로 물들이는 공교육 시스템의 발본적 진보개혁에서 찾아야 한다. 그 일보가 체벌금지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일선 현장에서 몸으로 현실을 접하는 교사, 학생, (및 학부모) 가운데 이 시각에 선뜻 동의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거라고 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현장의 실태를 익히 아는 교사(학생, 학부모)들이 공히 (좌우파 가릴 것 없이) 왕따현상이 교내폭력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사안이라고 인식하며, 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역시) 공히 생각할 것이라는 제 전제가 정말 맞다면, 그 현상의 해결책을 현장 당사자들에게 묻고 행정에 이를 반영하는 절차를 '제도화'시키지 못 할 이유를 딱히 떠올리지를 못하겠습니다. 교사, 학생, 학부모 중에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라는 나름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잖게 있을 법 하단 말이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만약 시교육정책의 구상, 실행의 흐름이 이와 같았다면, 곽노현식 상명하달 현장무시 막무가내 체벌금지정책이 애시당초 나올 수조차 없었겠죠.
참고로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이런 밑으로부터 위로 흐르는 문제해결책 산출 방식이 성공을 거둔 사례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브라질의 좌파정당인 노동자당이 포르투 알레그레시에서 시도한 뒤 시행착오과정을 거친 뒤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시민참여예산제도가 그런 경우겠죠. 한국에서도 그 제도가 대체론 껍데기만 본 따 형식적으로, (또 소수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그 제도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참고 링크 몇 개
자작나무통신 http://www.betulo.co.kr/2041
용인신문 : http://www.yongi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37 )
민노당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vLYwlD6O-XQJ:cfile207.uf.daum.net/attach/186AA3474F7C1E210BBBA7+&cd=10&hl=en&ct=clnk&g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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