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도 비슷한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진보개혁진영이라는 이상한 말"
http://theacro.com/zbxe/574205 

사전적 정의만을 보더라도 진보라는 단어에는 좌파나 우파같은 이념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다. 좌클릭을 진보클릭으로 바꿔서 사용하면 뭔가 이상한 말이 되는 것은 그래서다. 빌게이츠와 스티브잡스가 인류사회를 혁신적으로 진보시켰던게 사실이지만, 그들더러 좌파라 부르는 사람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에서는 진보가 좌파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위 링크의 글을 참고하시고.

우리는 지난 수천 수만년의 시간동안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해왔다고 믿고 있다. 극소수 예외는 있겠지만, 현대사회의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시석기시대' '귀족평민노예로 나뉘고 왕이 통치하던 시대'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가 없던 시대' 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사회와 과거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그 차이점들과 변화들의 총량이 바로 진보이고, 인류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진보해온 것이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는 양쪽 공히, 이런 역사관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성립할 수 있는 말이다.

보수란 현대사회에 축적된 모든 것들이 과거시간동안 조상들의 무수한 노력과 피와 땀을 통해 진보해온 결과임을 믿는 것이고, 온갖 시행착오들을 극복하며 찾아낸 최적의 소중한 해법들이라 믿는 바탕위에서 비로소 출발하는 입장이다. 보수는 이렇게 진보라는 개념의 바탕위에서만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개념이고, 진보를 긍정하지 않으면 보수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보수란 무언가를 지킨다는 의미인데, 대체 뭘 지킨다는 것일까? 바로 '과거의 진보' 이다.

진보 역시 그런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인류가 과거시간동안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보해왔듯이, 미래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 바탕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입장이다. 수천 수만년동안 계속돼온 인류사회의 변화와 진보가 하필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시점에서 딱 멈추고서 정지해야만 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의 변화와 진보는 필요없다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수꼴이라고 부르고, 인류가 지난 시간동안 진보해온 결과물인 현재의 방식들을 대책없이 부정하며 무조건  바꿔야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을 좌좀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에 도달하면, 사실은 누구나 보수이고 누구나 진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제 아무리 극강의 좌좀이라도 컴퓨터를 사용하고 한국어를 사용한다. 이미 스스로 기존에 존재하는 방식들을 최선의 것이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보수이다. 또한 제 아무리 극강의 수꼴이라도, 영원히 지금의 방식대로만 살아야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일에는 더 진보된 성능의 스마트폰이 등장할 것이고, 그는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진보이다.

그런데 사실은 보수가 진보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수천년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선되고 교정되어 최적이라 인정받고 있는 해법과 그것에 대항해 새롭게 제출되는 해법 사이의 경쟁력 차이는 누가 봐도 뻔한 것이다. 매년 수없이 많은 새로운 기획들과 아이디어들과 상품들이 시장에 쏟아지지만, 선택되어 살아남는 것들은 극히 드물다. 이 법칙은 사회적 제도와 법률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진보시킨다는 것은 이렇게 몹시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하다. 대부분의 새로운 기획과 아이디어들과 상품들이 시장에서 도태되지만, 그렇다고 그 것들을 금지시키는 시장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저 시행착오에 대한 아무런 검증도 없이 무작정 하고 보는 경거망동을 경계하면 될 뿐이다. 그런 경거망동을 우리는 사회적 낭비라고 부른다.

그러면 우파와 좌파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우파적인 방식으로 진보해가야 한다 믿으면 우파이고, 좌파적인 방식으로 진보해가야 한다 믿으면 좌파이다. 물론 양쪽 공히 '시행착오의 피해가 검증되지 않는 한, 기존의 것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라는 보수적인 자세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보수적인 좌파' 도 성립하고, 역으로 '진보적인 우파'도 성립한다. 경거망동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우파와 좌파도 아닌, 그저 경거망동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 우파적인 방식은 뭐고, 좌파적인 방식은 무엇일까? 굳이 이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차후에 기회가 오기를 바라며 미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