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115140412657

(천안=연합뉴스) 15일 천안시 홈페이지에 올라온 저소득층 초·중·고교생을 위한 점심 도시락. 천안시가 방학으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저소득층 학생을 위해 배달하는 도시락으로 단무지 3조각, 김치 5-6조각, 감자튀김 7-8개, 잘려나간 귤 1개가 반찬의 전부다. 2013.1.15

< < 지방기사 참조 > >

jkhan@yna.co.kr




원래 기사 출처

저소득층 학생 두번 울린 부실 도시락



(천안=연합뉴스) 15일 천안시 홈페이지에 올라온 저소득층 초·중·고교생을 위한 점심 도시락. 천안시가 방학으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저소득층 학생을 위해 배달하는 도시락으로 단무지 3조각, 김치 5-6조각, 감자튀김 7-8개, 잘려나간 귤 1개가 반찬의 전부다. 2013.1.15

<<지방기사 참조>>




짜장밥이랩니다. 원래 기사에서도 부실한 급식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왜 다음에 오른 저 기사에서는 그림이 저렇게 편집되어 있을까요? 아래 사진을 볼 때와 윗 사진을 볼 때 독자들이 느끼는 정서는 다릅니다. 윗 사진을 볼 때는 아무래도 반응이 격합니다. 아래 사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찬반이 갈립니다. 짜장밥이니 반찬이 적게 나오겠지만 커 나가는 아이들거라면 저 상태보다 조금은 나아야 하지 않겠느냐 쪽으로 수렴됩니다.

세상의 많은 성체들과 기득권들이 저런 식으로 정보와 여론을 조작합니다.
언론 기사를 접할 때면 항상 그 출처와 배경 그러니까 전체 모집단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체와 기득권의 나팔수나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 것, 그 유쾌하지 않은 성동격서에 휘둘리지 않는 것, 그게 진보나 보수냐보다는 중요해 보입니다. 물론 아크로 내에서도 진보나 보수, 자유주의, 사민주의, 중도 좌파, 좌파, anarchism에 대한 정의는 통일되지 않은 상태로 보이기는 합니다. 물론 공히 인정하는 정의야 원래 불가능한 것이고.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젤 힘든 것은 구강 근육을 움직여 "내가 잘못 보았다"라고 소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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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 1편 회사 뷔페 식당 풍경에서 갑부 이성재 씨가 음식을 그득 담아가서 먹는 회사 직원들을 보며 경멸하는 눈빛을 보냅니다.
원시 시대의 기억을 뇌에 담고 있는 인간은 먹을 게 생기면 한 몫에 왕창 뱃속에 담아 저장해 두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간 인간의 발달사가 개체 안에 저장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항산에 항심이라는데 그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은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부자 갑부래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소수를 제외한 인간 모두가 그렇게 되지요.
10-20대에는 특히나 먹성이 좋게 마련입니다. 쇠도 삼켜 소화해낸다고 그러죠.
지금 무상 급식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부 학생에게는 음식량이 많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학생들이 먹고 나서 조금 더 달라고 해도 별 무리 없는 분위기가 학교 급식 담당자들에게 형성되어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거기서 차이가 생깁니다. 돈 있으면 조금 아심찮은 몫을
매점에 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원래 음식에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언제든 '원하면' 조금 기다렸다가도
보충할 수 있으니까요. 달리 말해 선택할 수 있고 예측대로 원하는 음식을 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몸을 생각해서 소식하거나 단식을 하는 것과 내몰려 소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다릅니다.
정치의 요체는 다수가 항산에 항심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게 아마 동양식 복지국가겠죠. 원래 없이 살아도 항심을 유지하는 소수의 돌연변이들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애린 놈들 먹이려고 자기는 굶거나 소식하는 성체들도 많습니다. 이건 새끼 낳아봤냐 애기 길러봤냐와는 무관합니다.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데 가끔 놀라긴 하지만.
그 소수의 돌연변이를 높이 칠 일이지 그들을 준거로 삼아 없어 허덕이며 음식을 갈구하는 이들의 비웃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혹한기에 놀러 가서 차가운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 대단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편하게 놀러가서 자기가 원해서 잠시 그런 극한 상황을 체험하고 견디는 것은 실은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풍족하면요. 정확히는 잠시 그랬다가 뜨끈뜨근한 방에
들어가거나 바로 따근하게 목욕을 할 수 있는 경우라면요. 그게 보장되지 않으면 그들 역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게임에서야 가능하죠.
그런데 많은 이들은 혹한기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루 종일 추운 곳에서 일하다 들어와
냉기도 채 가시지 않은 방에서 쉬는 사람들을 그 풍경 속에 들어가 폭포 아래서 견뎌보라고
한다면 그건 웃긴 짓이죠. 왜냐구요? 그들에게는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도 따뜻한 물이나
아랫목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걸 아는 한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 게 당연합니다.
수많은 저소득층들의 심리적 기제가 그러합니다.
마흔 넷인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지간한 50~60대들이 얼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나이는 어디로 쳐먹었는지. 남들 눈에야 내가 어려 보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