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영화 <메멘토>가 재미있다길래 다운로드 받아 보았다. 다 보고 나선 머리속이 복잡하기만 하고 주인공 아내 살해범이 누구인지
조차 헷갈렸다.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 그냥 해설을 읽어 보았는데 내가 생각한 것 보다도 구성이 복잡한 영화였다.
해설에 의존하면 영화내용을 파악했다 하더라도 재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개그든 영화든 책이든 듣고, 보고, 읽는 순간 퍼뜩
깨달아야 재미있는 것이다. 그 때의 그 희열감 누구나 느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3성 인벤션을 재미있게 제대로 감상하려면 영어로 읽어야 한다.(『괴델, 에셔, 바흐』의 대화록 대부분이 그렇다.) 번역
불가능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 독자들은 해설(역주)를 통해서 그 묘미를 파악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해설도 없고
설상가상 심각한 오역까지 있다면? 현재의 우리말 번역본이 그런 상태다. 번역 불가능한 요소가 어떤 것들인지 다 알 것이다.
사투리, 시의 운, 중의성을 이용한 말장난(pun) 따위. 다음은 김삿갓의 시 辱說某書堂 이다.
書堂乃早知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 보니
房中皆尊物 방안엔 모두 귀한 분들
生徒諸未十 생도는 열명도 안되고
先生來不謁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이거 죽었다 깨어나도 영어로 번역 못할 것이다. 끝 3음절을 음(音)으로 읽었을 때 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서당은 내조지/ 방안엔 개존물/ 생도는 제미십/ 선생은 내불알
3성 인벤션은 두 개의 이야기를 교묘히 겹쳐 놓았다. 두 승려의 깃발, 바람 흔들림 논쟁과 이에 대한 혜능(慧能)의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닌 그대들의 마음이라고 한 이야기. 그리고 발빠른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제논의 경주 역설. 이 두 이야기의 연결 고리는 둘 다 운동(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혜능과
제논의 비슷한(?) 이름이다.
아킬레스는 제논이 선불교 제 6조(第六祖) 혜능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거북이가 제논은 그리스 엘레아 출신의
철학자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p39 아킬레스 :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 내가 그 여섯 명의 장로들의 이름을 달달 외우던 기억이 생생한데.
나는 늘 "6대 장로는 제논이다, 6대 장로는 제논이다" 라고 말하곤 했지.
p30 Achilles : I' m all confused. I remember vividly how I used to repeat over and over the names
of the six patriarchs of Zen, and I always said, " The sixth patriarch is Zeno, the
sixth patriarch is Zeno ... "
아킬레스가 선불교 제6조는 제논이라고 착각하게 된 말이
" The sixth patriarch is Zeno, the sixth patriarch is Zeno... " 인데 번역 불가능한 요소가 있다. 해설이
필요하다.
MIT 공개강의 『Gödel, Escher, Bach』강의 노트에도 여기에 대한 공부거리 질문이 있다.
Is Zeno the sixth patriarch or is he not? If he isn't, then why does Achilles think he is?
이걸 보니 영어권 독자들도 왜 아킬레스가 착각을 하는지 금방 파악이 안 되나 보다. 하긴 혜능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p232(번역본 p301) 에서 이다. 참고로 호프스태터는 혜능의 이름을 일본식 발음인 Eno 로 표기하고
있다.
답을 알아낸 분은 댓글로 답하기 바랍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오역부분을 보자. 3성 인벤션에선 제논의 역설이 두 가지 나온다. 경주 역설(Achilles paradox)과
등분 역설(dichotomy paradox) 이다. 그런데 박 교수는 제논의 역설이 한 가지 밖에 없는 줄 안다. 그래서
역설을 복수로 번역해야 할 곳도 단수로 번역하고 있다.
등장인물 제논이 운동은 불가능한 거라고 주장하면서 발빠른 아킬레스가 느림보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경주
역설을 논증한다. 그러자 거북은 운동 불가능에 대한 논증은 경주 역설이 아니고 등분 역설이라고 지적하자
제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p42 제논 : 오, 송구스럽게 .... 물론 당신 말이 백번 지당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 어느 지점 A에서 B로 나아가는
경우에, 그는 일단 그 거리의 반이 되는 지점을 늘 남겨놓고 있음에 틀림없고 나머지 거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남은 거리의 반을 늘 남길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알다시피, 이 두 이율배반은
오십보 백보랍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하나의 커다란 아이디어를 가졌던 것입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요.
p32 Zeno : Oh, shame on me. Of course, you're right. That's the one about how, in getting from A
to B, one has to go halfway first - and of that stretch one also has to go halfway , and
so and so forth. But you see, both those paradoxes really have the same flavor. Frankly,
I've only had one Great Idea - I just exploit it in different ways.
박 교수는 등분 역설을 경주 역설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 기가 막힐 일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의 오역 때문에 글 전체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우리말 독자만 불쌍할 따름이다.
제안 번역 : 부끄럽군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등분 역설은 이렇습니다.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려면 일단
AB의 중간지점을 지나야만 하지요. 그런데 AB의 중간지점을 지나려면 그 전에 AB 중간지점의
중간지점을 먼저 지나야만 합니다. 계속해서 선행하는 무한개의 중간지점을 먼저 지나야 합니다.
따라서 운동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두 역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진 위대한 아이디어는 하나일 뿐입니다. 단지 그걸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요.
글 자체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무한개의 지점을 지나야 하므로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은-유한한 길이를 등분할 때 유의미한 길이를 가진 무한개로 나눌 수는 없으며, 대신 무한 개의 컷을 만들 수는 있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데 이 책에 그런 것이 나오나요?
꽃가루 님, 먼저 윗글에서 문제가 된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각각 인용하고 촌평하겠습니다.
원문 32쪽:
But you see, both those paradoxes really have the same flavor. Frankly, I've only had one Great Idea - I just exploit it in different ways.
박여성 번역본 42쪽:
하지만 알다시피, 이 두 이율배반은 오십보 백보랍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하나의 커다란 아이디어를 가졌던 것입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요.
꽃가루 님 제안번역:
하지만 알다시피 이 두 역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진 위대한 아이디어는 하나일 뿐입니다. 단지 그걸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요.
qualia 촌평:
① “paradoxes” 번역
박여성 번역자가 “paradoxes”를 “역설”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굳이 “이율배반”으로 번역한 것은 괜한 긁어 부스럼 만들기식 번역입니다. 즉 엄밀히 말해서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최선을 놔두고 차선을 택할 까닭이 전혀 없는 사례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번역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위에서 “paradoxes”의 최선의 번역안은 “역설”이지 “이율배반(antinomy)”이 결코 아니란 것이죠.
즉 둘 다 모순이 발생하는 논증(들) 자체와 그런 논증(들)이 내재해 있는 진술 · 사건 · 상황 따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역설(paradox)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이율배반(antinomy)은 좀 더 구체적인 개념이랄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의 역설 내부에 꼬리에 꼬리를 문 형태로 두 가지 하위 법칙(law, nomos, νομος)이 잠복 · 공존하면서 충돌(anti-, αντι-)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구체적인 모순 사례를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는 말 자체 속에 그 점이 명시돼 있죠. 따라서 이율배반은 역설의 하위 개념에 속하는 좁은 의미의 역설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both those paradoxes really have the same flavor” 번역
㉠ 이 두 이율배반은 오십보 백보랍니다. ― 박여성 님
㉡ 이 두 역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같습니다. ― 꽃가루 님
위 구절에 대한 두 분의 번역은 모두 그다지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두 분의 번역 모두 뭔가 좀 미진해 보이고 썩 잘 된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flavor”는 어원으로 볼 때 “smell”을 뜻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보통 냄새 · 향기 · 맛깔이 아니라 다른 것에 비해 아주 독특하고 고유한 냄새 · 향기 · 맛깔을 가리킨다고 하죠. 예컨대 맛도 그냥 밋밋한 맛이 아니라 독특한 감칠맛 같은 것을 맛의 “flavor”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flavor”만이 지닌 저러한 의미의 독특한 질감 혹은 함축 때문에 철학자나 과학자 할 것 없이 “고유한 의미”, “본질적 의미”, “핵심적 의미”, “미묘한 의미” 따위를 가리킬 때 아주 잘 갖다씁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고려해 판단한다면 “both those paradoxes really have the same flavor”라는 문장 속에서 “flavor”는 “본질적 의미”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원문은 “두 가지 역설 모두 그 본질적 의미는 같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flavor”에 대한 두 분의 번역 “오십보 백보”와 “분위기”는 그 핵심 의미를 건져내지 못한 번역입니다. 즉 저자가 의도한 의미 혹은 본문에 나오는 화자들 간의 대화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좀 미흡한 느낌을 주는 번역이랄 수 있습니다.
③ “I've only had one Great Idea” 번역
㉢ 나는 하나의 커다란 아이디어를 가졌던 것입니다. ― 박여성 님
㉣ 내가 가진 위대한 아이디어는 하나일 뿐입니다. ― 꽃가루 님
두 분의 위 번역은 문장론의 측면에서는 거의 동일한 수준의 번역이지만, 의미론의 측면에서는 ㉣이 ㉢보다 더 나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은 화자가 두 가지 역설 가운데 단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부실한 번역인 반면 ㉣은 그 사실을 그런대로 살려낸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두 번역 모두 나쁜 번역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하면 번역가들이 적극적으로 고쳐나가야 할 직역투 번역의 나쁜 면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말 지킴이 이오덕 선생과 이수열 선생께서 숱하게 비판하고 지적하셨던 직역투의 나쁜 유형들 가운데 하나인데요. 바로 “아이디어를 가지다/생각을 가지다”와 같은 번역은 아주 서툴고 나쁜 직역투라는 것이죠. 이런 유형의 직역투가 순수 우리말을 아주 심각하게 해친다는 것입니다. 본디 우리말에는 그런 표현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언론 · 방송 · 인터넷 등에서 “대화를 가졌다”, “인터뷰를 가졌다”, “회담을 가졌다”, “만찬을 가졌다”,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의욕을 가지고 있다” 따위와 같은 영어 “have”의 직역투 표현이 넘쳐날 대로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죠. 그래서 이제는 저런 영어식 말투/글투가 그에 대한 원래의 한국어식 말투/글투를 몰아내고, 우리 언중의 말과 글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아주 자연스런 표현으로까지 굳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태는 우리말글을 우리말글답게 가다듬고 발전시켜야 할 번역가의 시각으로 볼 때는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번역가 혹은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이런 실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나름대로 대처해야 합니다.
이런 비판적 견지에서 “I've only had one Great Idea”는 위와 같은 서툰 직역투가 아닌 원래의 자연스런 우리말법대로 번역해줘야 합니다. 그런 번역안의 하나를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은 정도가 될 것입니다.
㉤ 내가 생각했던 건 그 기발한 착상 하나뿐이었어.
어조와 문체는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부여한 해당 어조와 문체에 맞춰주면 될 것입니다. 꼭 저런 표현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표현으로 옮겨주면 문제 없다고 봅니다. 요컨대, “아이디어를 가졌다(have)”는 식의 직역투 유형들은 나쁜 번역으로서 우리말에서 적극적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주객전도의 상황은 경우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즉 역설과 이율배반 모두 모순이 발생하는 논증(들) 자체와 그런 논증(들)이 내재해 있는 진술 · 사건 · 상황 따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역설(paradox)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이율배반(antinomy)은 좀 더 구체적인 개념이랄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의 역설 내부에 꼬리에 꼬리를 문 형태로 두 가지 하위 법칙(law, nomos, νομος)이 잠복 · 공존하면서 충돌(anti-, αντι-)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구체적인 모순 사례를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는 말 자체 속에 그 점이 명시돼 있죠. 따라서 이율배반은 역설의 하위 개념에 속하는 좁은 의미의 역설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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