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저희 집은 조선일보를 받아봤는데 매주 한번씩 북섹션이라고 하나,
책에 대한 기사만 따로 모아 놓은 신문을 나름대로 챙겨봤습니다.
거기에서 김영하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한국문학의 차세대 주자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길래, 김영하란 작가에 대해서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수업 때문에 그의 단편 <사진관 살인사건>을 읽을 일이 있었는데,
상당히 인상깊어서 더더욱 흥미를 가지게 됐죠.
하지만 김영하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건 군대였습니다.
군대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가 없어서 소설책을 좀 많이 봤는데,
김영하도 그 중에 하나였죠.

<빛의 제국>은 남한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남파 간첩에게 어느날 갑자기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빛의 제국>의 줄거리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빛의 제국>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가 '학생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작가인 김영하 자신이 학생운동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다음 해인 87년,
과 동기였던 이한열의 죽음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 들게 됩니다.
나중에 ROTC 후보생이 돼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잡히니까
'아, 난 ROTC로 감시하러 간거다'하면서 무사히 나온 적도 있다는군요.
결국은 전방입소훈련에 불참함으로써 ROTC에서 제명되지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뒤에 실린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동료들로부터 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학생운동에 꽤나 깊게 관여한 건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의 에세이들에도 학생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혹 나오죠.

심지어 김영하의 첫출판작은 <무협학생운동>이란 제목의,
학생운동을 다룬 무협지(!)였습니다.

김영하도 그렇지만, <빛의 제국>의 주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학생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 그리고 둘의 대학후배인 소지현까지 말이죠.
기영은 남한으로 넘어온 뒤, 연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해서 '정치경제연구회'에 들어가고
거기서 또 NL진영의 활동가가 되는 걸로 나오는데,
NL계열의 학생운동에 대해 회고하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일부만 옮겨 보죠.

주체 사상에 대한 그들의 턱없는 맹신은 오히려 그의 사상적 신념에 조금씩 균열을 가했다.
몇 부의 앙상한 팸플릿과 한민전 방송의 조악한 녹취록만 읽고서 어떻게 저렇게 모든 것,
심지어 역사의 종착역까지를 아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빛의 제국>, 197p 중에서

소위 말하는 주사파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김영하 자신의 경험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마리가 더 심합니다.
마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씬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죠.

만약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그녀는 너무 빨리 떠오른 결론에 조금 놀랐다. 학생운동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야.

                                                                                         -<빛의 제국>, 172p 중에서


마리가 학생운동의 어떤 점에 그렇게 실망한 건진 잘 안 나오지만...매우 부정적이죠.
소지현은 부패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학생운동을 선택했지만,
거기에는 '부유하고 부도덕한 부모를 버리는 사치'도 얼마쯤은 있었죠.

<빛의 제국>은 '이념 같은 건 현실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주인공인 기영이 가장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파 간첩 출신인 기영은 자본주의 남한의 체제에 너무나도 잘 적응한 존재입니다.
소지현은 기영을 이렇게 평가하죠.

"형은 히레사케와 초밥, 하이네켄 맥주와 샘 페킨파나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인간이잖아?
제3세계 인민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극우파 게이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에 밑줄을 긋는 사람이잖아?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고.

                                                                                          -<빛의 제국>, 289p 중에서

기영과 함께 넘어온 남파 간첩들도 모두 마찬가지.
모두 자신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지금의 삶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죠. 
130연락소에서 함께 있었던 이필은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혹시 날 매수할 생각이야? 그럴 거라면 난 생각 있어. 돈, 그래 돈에라면 씨팔, 나는 얼마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어. 진심이야."

                                                                                            -<빛의 제국>,218p 중에서

기영 주변의 인물들, 즉 마리나 지현 역시 마찬가지로 
현실의 삶 속의 과거의 학생운동 같은 것과는 관련없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죠. 
즉, '학생운동'이라는 키워드는 마리나 지현이
<빛의 제국>을 관통하는 주제, '이념 같은 건 현실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영이야 굳이 학생운동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런 걸 보여줄 수 있지만,
마리나 지현은 조금 다르죠.
지현은 학생운동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장면까지는 없지만,
그녀도 지금은 교사로서 그때의 기억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고요.

캐릭터의 대사가 늘 작가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이 캐릭터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쓰는 것도 있겠지만
<빛의 제국>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작가인 김영하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에세이에서 간혹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한 회고록을 보면,
그 당시를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영하는 자신의 80년대 학생운동을 돌아보며,
캐릭터의 입을 빌어 '학생운동? 그런 건 현실 앞에선 아무 것도 아냐'라고
말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념? 그런 거 다 아무 것도 아냐'라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ps. 여담이지만 김영하의 첫출판작이라는 <무협학생운동>은 정말 읽어보고 싶습니다.
학생운동을 무협지로 쓰다니...재미있을 거 같아..;;

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추서 춤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