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도둑질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양녕대군인데 그 양녕대군에 대한 극과극으로 갈리는 역사적 해석 중 한편인 '양녕대군은 처세술의 달인'이었다...라는 역사적 해석을 이승만에게 대입시켜 보자면 공과에 관련없이 이승만은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문제 제기했던, 물론 나는 이승만에 대하여는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팔레스타인의 꼴이 났을 수도 있었다'라는 의문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 필요한 인물은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이면서 처세술의 달인이었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한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라. 그렇다고 이승만이 국부의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국부의 자격이 되려면 무력으로 독립을 획득한 조지 워싱턴, 그리고 왕위에 오르라는 측근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민주주의 제도를 펼친 조지 워싱턴이나, 실권을 하게된 동기인 부정부패... 그래서 며느리를 총살시킨 장개석 정도는 되어야 국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데 이승만은 처세술의 달인이었으며 좀더 심하게 평가하자면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이런 모든 역사와 인물에 대한 불필요한 논란은 역사에 너무 무지한 것이 첫번째 원인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 독립이 공짜로 얻어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기회주의적 속성은 바로 대한제국 시절 미국의 외교관 '오롬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화 전명운 의사에 대한 법정 통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도미유학 중이던 이승만은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이 터지자 그들을 구명하려는 한인 사회에서 법정 통역'을 부탁했는데 미국의 여론을 살피던 이승만은 '예수신자로서 살인자들의 통역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면서 거절을 한다.


만일, 이 사건 당시 이승만이 법정통역을 맡았더라면 훗날 해방되었을 때 이승만이 그 자리에 있었을까?



최선의 선의로 이승만의 당시 행위를 해석한다면 이승만으로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친일파들의 행적에 대하여 감각이 상대적으로 무디었던 이유'도 이승만의 족보를 보면 이해할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


이승만은 조선을 증오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 것도, 비록 왕족은 '정실과 첩실의 자식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조선 시대의 차별 대상 일순위였던 '첩실의 자식'이었다.



이승만은 조선 세번째 왕인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다섯번째 서자(庶子)인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다.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왕위에 올랐어야 할 양녕대군....의 폐위... 그리고 서자 출신의 후손. 이승만이 조선 왕족의 끝자락격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가난했던 그가 조선에 대한 증오심은 당연했을 것이고 그런 증오심은 친일파에 대하여 무딘 감정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을 증오했던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는 자신이 왕족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양녕대군은 얼마 전에 불타 소실된 숭례문(남대문)의 현판을 썼을 정도로 서예에 재능을 보인 것처럼 이승만은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 발휘되었던 집중력은 미국 유학시절 당시 꽤나 유명했다고 하니 양녕대군의 그런 소질을 이어받은 것은 확실하다.


양녕대군의 태자의 폐위에 대하여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양녕대군과 관련된 사건들에서 그 사건의 성격과 양녕대군의 취한 태도는 공통점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죽어야 사건이 일단락되며 그 죽어야할 사람들 중에 양녕 자신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생사의 기로에서 양녕이 가장 고민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했다"라는 것.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왕자의 난 등으로 궁이 권력다툼의 소용돌이에 처해있던 연유로 외가에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외숙인 민무구 민무질과 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민씨 형제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양녕대군에게 도움을 청하자 양녕대군은 오히려 '외숙집에 문제가 있었다'라고 공박하는데 이런 사실이 태종의 귀에 들어가 민무군 민무질 형제는 고문을 당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역사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양녕대군과 민씨 형제의 대화를 누가 고자질 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외가가 정치적 문제, 그 것도 가장 민감한 변역죄에 연루될 것이라고 판단한 양녕대군이 자구책으로 태종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라고 해석을 내리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양녕대군은 왕위에 오른 동생인 충녕대군과 사이가 좋았으며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세종대왕)에도 친하게 지냈는데 그 것도 처세의 한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석되는 이유는 유정현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 때문이다.


양녕대군을 폐위하려는 태종의 결심에 저 유명한 황희가 결사반대를 하여 귀양을 갔고 대부분의 신하들은 '자구책'으로 가타부타 입장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대하자니 비극적 종말을 맞이할 터이고 찬성하자니 만에 하나 양녕대군이 보위에 오를 때의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때 유일하게 영녕대군 폐위를 찬성하고 나선 사람이 무명에 가깝던 유정현였는데 그 유정현은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영의정으로 발탁이 된다. 자신의 폐위를 '유일하다시피' 찬성한 인물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세종.... 그 세종이 양녕대군에게는 어떻게 비추었을까?


세종이 죽고 세종의 아들 문종이 다시 이년 만에 죽자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가 세조에게 찬탈을 당한다. 그리고 귀양을 간 단종을 사사할 것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양녕대군이다. 물론, 단지 양녕대군은 왕조의 어른으로 '종묘사직을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단종을 사사할 것을 주장했겠지만 동생의 손자인 단종에게 사사를 내리라....... 단종에게 사사를 권할 인물은 집권한 세조 정권에서는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선두에 서서 사사를 주장한 양녕대군.


아마도 양녕대군이 보이고 싶었던 것은 충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과 같이 권력에서 밀려난 입장이었던 세조가 집권한 것은 자신에게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세조는 태종과 생김새가 흡사하다고 하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당했던 양녕대군 입장에서는 세조를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말도 잘 못하다가 그만 분위기에 압도 당해 '사사 주장'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양녕대군의 행동들은 실권한 왕족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을 위해서, 그래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죽어야 사건이 일단락되며 그 죽어야할 사람들 중에 양녕 자신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생사의 기로에서 양녕이 가장 고민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했다"라는 상황에서 초연할 사람이 몇 있을까? 물론 그런 초연한 자세에서 죽음도 불사한 사람들을 역사의 첫머리에 기록함으로서 그의 영혼들을 위로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살기 위하여 몸부림쳤던 양녕대군. 실권한 양녕대군의 후손에 의하여 6백년이 흐른 후 그의 후손에 의하여 그러나 상황은 전혀 반대인, 정권을 잡기 위하여 철저히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던 이승만.


실권을 하고 살기 위하여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던 양녕대군
정권을 잡기 귀하여 기회주의 속성을 보였던 양녕대군의 후손 이승만.


아주 대조적인 삶이지만 문득, 양녕대군이 남겼던 시를 음미하면서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환생은 아닐까?하는 착각을 해본다, 마치, 숙종의 여자인 장희빈이 연산군의 여자인 장록수의 환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품게되는 것처럼 말이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