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가 실제로 겪은것/한 것이 무엇이냐는 논란될 만한 것이 아니다. 영화 어디에서도 파이가 보험회사 직원들한테 해 준 얘기가 실제에 바탕해서 적당히 꾸며낸 얘기라는 점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파이 자신이 꾸며낸 얘기라고 말하고 있고 그 말을 믿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물론 그 얘기는 실제보다 덜 아름답기도 하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예쁜 동영상으로서는 만점이지만 극영화로서는 저급하다. 극영화가 갖추어야 할 갈등이 전혀 펼쳐지지 않는다. 파이는 서로 긴장관계에 있는 것들을 아주 편하고 쉽게 동시에 받아들인다. 호랑이의 눈빛에서 영혼을 느꼈다는 가장 공감되는 주장과 등가화되어 그 화해공존도 스리슬쩍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의 화해공존을 가능하게 한 것은 파이의 사람 좋은, 어둠과 균열을 들여다 보기 싫어하는 낙천적 성격이지 그것들 사이의 객관적인 친화성이나 공통성이 아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태교, 힌두교, 불교를 동시에 믿거나 좋아하는 인도출신 캐나다 국적 종교학 교수라는 위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주의 지식인의 전형이다.


다문화주의는 여러 문화들 중의 한 문화의 자리가 아니라 그 문화들 모두를 자애롭게 내려다 보는 유일하게 보편적인 특권적 문화의 자리를 함축한다. 영화에서는 캐나다로 대표되는 서구 자유주의라는 문화의 자리이다. 문화들의 이질성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채로 걸러지고 그것들의 피상적인 공통성만 남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그 현실태면에서 실제로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과학기술이라는 공통의 물질문명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 문화들의 잠재적 특수성들은 온전하게 인식될 수도, 발현될 수 없다. 그것들은 그 물질문명과 타협했고 그만큼 서로 닮았다. 그래서 그것들의 화해와 공존도 그만큼은 이미 가능해 왔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 가능성을 확대시키는 데 관심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주의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자유자본민주주의의 관심이다. 그래서 화해와 공존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현실을 가리키는 피튀기는 장면들은 억압되고 예쁜 장면들만 가득하다. 유일하게 광포한 폭풍의 모습조차 호러보다는 서블라임이다. 


그 관심으로 인해 연꽃은 숲 속에도 있어야 하며 거대한 화물선이 흔한 규모의 폭풍에도 원인을 알길 없게 침몰해야 하며 뱅골 호랑이와 200일 이상을 거의 같은 공간에서 공생할 수 있어야 하며 각각의 종교들의 헤게모니/보편성 클레임들과 그것들의 해방적이거나 현실부정적 잠재력과 타락 모두 스크린 밖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화면들은 즐기시되 그 화면들의 연속이 함축하는 편하고 쉽고 좋은 얘기는 외면하시라. 진정 온 가족용 영화라면 이런 주제를 다뤄서는 안되며 이런 주제는 오직 어른스럽게만, 극적으로만 다뤄질 수 있다. 현실 속의 균열들과 적대들을 이런 식으로 속이 빤히 보이게 무시하고 깊은 생각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 예쁘기만한 판타지를 꾸며냄으로써 이안 감독은 자신의 빈약한 지성을 과시한 것 말고는 한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