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 괴델, 에셔, 바흐 』번역비판을 시작하며
원서 : 제목 : GÖDEL, ESCHER, BACH : an eternal golden braid
저자 : Douglas R. Hofstadter.
출판사 : Vantage 1989.5
번역서 : 제목 : 『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노끈
옮긴이 : 박여성
출판사 : 까치 13쇄 2012, 6, 25
GEB 개정 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에 지적한 오역들이 모두 반영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서의 명성은 익히 들어 온 바였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다니던 회사 사장을 통해서였는데 80년대 말에 단순한 전산쟁이가
아니라는 걸 과시하려는 듯 이 책을 들먹이는 이들을 더러 보았다. 괴델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대해 처음 마주친 건 스즈끼
다이세쓰의 저서에서 가려뽑은 글들을 모은 『 Zen Buddhism 』이란 책의 편집자 서문을 통해서였다. 그후 좀 무게있는 책을
읽다보면 거짓말 좀 보태 어김없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마주쳤다. 어느덧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증명과정에 대한 이해가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어버렸다. 해서 『 Gödel, Escher, Bach 』해적판 원서를 사다가 읽었으나 한 챕터도 못 읽고 덮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그 등장배경에 대한 예비지식만 있었어도 끙끙거리며 읽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던 차에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걸 보고 무척 반가워 서점에서 역자후기도 읽어보고 좀 뒤적거려 보았으나 사진 않았다. 4년전 이 책 14장에 대한 이덕하님
의 번역비판을 보고 번역판 읽을 생각은 아예 접어버렸다. 하지만 언젠간 꼭 읽어야지 하는 다짐과 부담을 안고 있다가 우연히
재작년에 먼지덮인 원서 (해적판 원서는 빌려줘서 못 받고 책값이 싸길래 새로 샀다.) 를 다시 꺼내 읽어보니 의외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현재 절반 넘게 읽었다.
인터넷을 통해 번역판에 대한 악명 또한 익히 들어 온 바였다. 그러나 최악의 번역서다, 개판 번역서다, 말만 무성했지 이덕하님
의 14장 번역비판 말고는 구체적인 오역지적을 볼 수가 없었다. 번역비판을 작정하고는 지난 가을 서울에 볼일 보고 갔다가 번역본
상권을 샀다. 집에 와 원서와 여기저기 대조해 보고선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쌍욕이 막 나왔다. 너무 충격이
커서 이틀간이나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마존 독자 리뷰를 보면 이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라는 평이 많다. 번역을 아주 잘 해도 읽기 어려운 책인데 오역으로 뒤범벅이 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고통을 안겨 준 책이라는 이 책에 대한 시골의사 박경철의 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고통스러울 뿐이다. 아니 정상적인
독해능력을 갖춘 독자라면 우리말 번역본을 조금 읽다가 그냥 책을 집어던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날림 번역판이 13쇄를 찍을 수 있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었는데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이 범인일 것이라고
내 나름 결론을 내렸다. 『 총, 균, 쇠 』가 서울대 도서 대출 1위라는 뉴스가 나오고 나서 한달새에 만 5천 부가 팔렸다는 뉴스를
접했다. 서울대 따라쟁이 대한민국. 『 괴델, 에셔, 바흐 』를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에 포함시킨 교수는 원서를 읽으라고 한 건가,
번역본을 읽으라고 한 건가? 그리고 정말 번역본을 제대로 읽어보긴 한 건가? 한심할 뿐이다. 지식융합연구소 이인식 소장은
알라딘 명사들의 추천도서에 『 괴델, 에셔, 바흐 』를 되풀이 해서 읽어야 할 책이라며 추천했는데 번역본을 안 읽고 추천했다면
순진한 독자들 돈 버리고, 골 아프게 한 책임 져야 한다. 명사 명함 함부로 내밀 일 아니다.
긴 말 필요없다. 까치 출판사는 『 괴델, 에셔, 바흐 』번역본을 당장 회수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번역본을 내 놓아야 한다.
심각한 오역만 지적하려 해도 여러번 글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번역이 얼마나 황당한지 우선 맛보기로 보여주겠다.
역서 341쪽 : 그것은 마치 누군가 자신의 생애를 모조리 악보로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갑자기 소리와 악보 사이의
사상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얼마나 풍요로운 신세계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그 연쇄체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그러나 의미가 없는 연쇄체의 모습에 익숙해진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러면 갑자기 누군가를 이야기와 연쇄체 사이의 사상관계로 인도했을 법하다.
원서 263쪽 : It is as if somebody had known musical scores all his life, but purely visually - and then, all of a sudden,
someone introduced him to the mapping between sounds and musical scores. What a rich, new world !
Then again, it is as if somebody had been familiar with string figures all his life, but purely as string figures,
devoid of meaning - and then, all of a sudden, someone introduced him to the mapping between stories
and strings.
제안번역 : 그것은 마치 평생동안 악보를 알고는 있었지만 순전히 눈으로만 봐 욌던 사람에게 어느 순간, 누군가 소리와 악보가
서로 매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풍요로운 신세계인가 ! 또한 그것은 마치 평생동안 문자열에
익숙했지만 의미는 모른채 순전히 문자열 모양에만 익숙했던 사람에게 어느 순간, 누군가 이야기와 문자열이 서로
매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역서 342쪽 :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이 규칙들이 정수의 십진법 표시 왼쪽과 오른쪽으로 변동하는 십진수들이 10의
거듭제곱에 의한 곱하기와 나누기에 연관되었다는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서 264쪽 : If you look carefully at what is going on, you will discover that the rules are based on nothing more
profound than the idea that shifting digits to left and right in decimal representations of integers is
related to multiplications and divisions by powers of 10.
제안번역 :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규칙들이 다음의 아이디어 즉, 십진법으로 표기된 정수에서 숫자들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옮기는 것은 10의 거듭제곱으로 곱하고 나누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서 87쪽 : 즉 Z(z에 있는 붙임표의 수효)가 1보다 큰 두 수가 합성수라면, 다시 말해서 X+1(x에 있는 붙임표의 수효)와 Y+1(y에
있는 붙임표의 수효)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Z는 합성수이다.
원서 65쪽 : This works by saying that Z (the number of hyphens in z) is composite as long as it is the product of two
numbers greater than 1 - namely, X + 1 (the number of hyphens in x-), and Y + 1 (the number of hyphens
in y-).
제안번역 : 이것은 Z (z의 하이픈 갯수) 가 1보다 큰 두 수 즉, X+1 ( x- 의 하이픈 갯수) 과 Y+1 (y-의 하이픈 갯수) 의 곱이라면
Z는 합성수라는 것을 말한다.
역서 274 쪽: ~∃b : ∃c: sssss0 = (ssb·ssc)
맨 앞의 '~' 부호가 없다면, 그것은 2를 더하면 5가 되는 두 개의 자연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서 272쪽 : Without the initial tilde, it would be an assertion that two natural numbers do exist, which, when augmented
by 2, have a product equal to 5.
제안번역 : 맨 앞의 틸드(~)가 없다면, 이것은 각각 2를 더해서 곱하면 5가 되는 두 개의 자연수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위 두 오역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박여성 교수는 'product'가 '곱' 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14장에서도 곱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산출물이라고 번역한 곳이 있다.(이덕하님 지적)
역서58쪽 : " 그런데 어떤 독자들이 아직 A와 B를 참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연속체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정하겠지,
안 그래 ? "
원서44쪽 : " And if some reader had NOT yet accepted A and B as true, he might still accept the SEQUENCE as a VALID
one, I suppose ? "
제안번역 : " 만일 어떤 독자가 A와 B를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논리의 흐름 (A와 B가 참이라면 Z도 참이다)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일테지 ? "
역서 58쪽 : " 그러면 좋아, 자네가 나를 제 2명제의 독자로 간주하고, 내가 논리적으로 Z를 참으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기를 바라네. "
원서 44쪽 : " Well, now, I want you to consider ME as a reader of the SECOND kind, and to force me, logically, to
accept Z as true.
제안번역 : " 좋아, 자네가 날 두번째 종류의 독자로 생각하고 내가 Z가 참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끔 논리적으로
압박해 보게나. "
역서 288쪽 : 예를 들면 절대 기하학 안에서는 유클리드의 다섯번째 공준은 결정 불가능하다. 우리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얻으려면 기하학에 새로운 공준을 추가해야 한다. 아니면 거꾸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얻으려면 부정을 추가해야 한다.
원서 222쪽 : For example, within absolute geometry, Euclid's fifth postulate is undecidable. It has to be added as an
extra postulate of geometry, to yield Euclidean geometry : or conversely, its negation can be added,
to yield non-Euclidean geometry.
제안번역 : 예를 들면 절대 기하학 안에선 유클리드의 제5공준(평행선 공준)은 결정 불가능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산출하려면
여분의 공준으로 유클리드의 제5공준을 추가해야 하고, 반대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산출하려면 유클리드의 제5공준의
부정을 추가해야 한다.
『괴델, 에셔, 바흐』의 번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은 제가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괴델, 에셔, 바흐(박여성 옮김)』 번역 비판 – 14장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22
이왕 번역 비판을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아직 아무도 비판하지 않은 좋은 책(원서 기준)의 번역을 비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괴델, 에셔, 바흐』가 계속 팔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글에서 밝혔듯이 저는 이덕하님의 이 책에 대한 번역비판을
보고 번역본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덕하님의 번역비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불충분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저는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까치 출판사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괴델, 에셔, 바흐』가 대표도서,
추천도서로 올라가 있더군요. 이인식씨가 알라딘 명사 추천도서에 『괴델,에셔,바흐』를 첫번째로 올린 것이 2012.8.8 입니다.
저는 이 책 번역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더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하하 님,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의 『황제의 새 마음 The Emperor's New Mind』을 읽어보셨는지요?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원서도 그리 좋은 책은 아니다?
위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립니다.
마음철학/심리철학/인지과학 분야에서 명저로 자리잡아 많은 학자들이 인용하는 저작인데요.
어떤 논거에서 좋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하하하 님의 단편적인 촌평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국어판 『황제의 새 마음 ― 컴퓨터, 마음, 물리법칙에 관하여』에는 오역이 쏟아진다고 하셨는데요. 말씀대로 이화여대 박승수 교수께서 번역하셨습니다. 박승수 교수의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상당히 신뢰감 가게 번역 에피소드(일화)를 들려주시던데요. 그런데 오역이 그렇게 많던가요? 그렇다면 그 오역의 사례를 한두 가지만 예시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로저 펜로즈의 책은 한국에는 거의 모두 번역돼 나왔는데요. 아래에 적어놓은 『마음의 그림자 Shadows of the Mind: A Search for the Missing Science of Consciousness』는 아직까지도 번역 · 출간되지 않았죠. 『황제의 새 마음』과 자매편을 이루는 저작이라고 하는데요. 펜로즈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 중 한 권인데, 한국 출판계에서 번역을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서지 사항:
○ Penrose, Roger (1989/New Preface Edition 1999). The Emperor's New Mind: Concerning Computers, Minds, and the Laws of Physics. Oxford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aperback, xxx + 602 pages]
○ 로저 펜로즈 | 박승수 옮김. (1996. 12. 30). 『황제의 새 마음 ― 컴퓨터, 마음, 물리법칙에 관하여』(상 · 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349쪽, viii + 355쪽, 12,000원, 12,000원]
○ Penrose, Roger (1994). Shadows of the Mind: A Search for the Missing Science of Consciousn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Hardcover, xvi + 457 pages]
The Emperor's New Mind (황제의 새마음이라는 한글제목부터 잘못된 것임) 원서에 대해선 저보다 프랜시스 크릭의 서평을 인용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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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로즈는 탁월한 수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이다. 그가 인간의 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는 뇌가 튜링 방식의 컴퓨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아직 양자중력이론이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리학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펜로즈는 올바른 양자중력이론이 등장하면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양자중력이론이 의식의 신비를 해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의 주장의 근저에는 의식이 신비롭듯이 양자중력이론 역시 신비스러우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설명하면 멋지지 않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튜링머신, 괴델의 정리, 양자론, 시간의 화살과 같은 개념들을 다루고 있다. 뇌의 특성에 대해서는 기본개념을 약간 다루고 있지만, 심리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펜로즈는 플라톤주의자이다. 그 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 취향과는 잘 맞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의 중심 개념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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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역과 엉터리 인용에 대해선... 전에 어디 적어둔 것도 있는데 지금 찾을 수 없고 책은 수천 km 밖에 있으니 도저히 다시 체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냥 전처럼 "하하하의 글은 거의 모두 잘못됐거나, 설득력이 거의 없거나, 근거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시지요. ^^
@ 박승수 교수라면 전에 모 게시판에서 여자처럼 행세하다가 들켜서 망신당했던 것만 기억나는군요.
하하하 님, 답변 감사합니다. 하하하 님의 위 댓글과 관련해 한두 가지 질문 겸 응답을 드립니다.
① “The Emperor's New Mind”의 한국어판 제목 “황제의 새 마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처음 듣는 주장이라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떤 근거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참고로 “새 마음”은 띄어써야 맞습니다. 번역판에도 띄어쓰기를 했습니다.)
② 펜로즈와 『황제의 새 마음』에 대한 하하하 님의 비판은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의 1993년 저서 『놀라운 가설 Astonishing Hypothesis』 283-284쪽에 나오는 해당 논평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셨는데요. 그렇다면 하하하 님께선 프랜시스 크릭과 같이 마음 · 의식(consciousness)의 수수께끼가 신경과학/뇌과학으로 완전히 풀릴 수 있다고 보시는 것인가요? 즉 환원적 물리주의를 진정 지지하신다는 것인지요? 아시겠지만 프랜시스 크릭은 의식의 비밀을 신경과학/뇌과학으로 풀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펜로즈의 견해는 그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하하 님께서 프랜시스 크릭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프랜시스 크릭의 펜로즈 비판을 끌어와 하하하 님 자신의 펜로즈 비판을 뒷받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논리에 따르자면 하하하 님께선 환원적 물리주의자라고 자칭/타칭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문제 혹은 심신문제(mind-body problem)에서 환원적 물리주의가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요? 실체 이원론이 반론에 부딪히는 만큼 환원적 물질론/물리주의도 거센 반론에 부딪쳐 좌초하다시피 하고 있는 게 요즘의 추세입니다.
③ 피장파장의 오류 + 선결문제의 오류
다음과 같은 프랜시스 크릭의 언급으로써 펜로즈의 양자 의식 이론을 논박한다면, 그런 논리는 일종의 피장파장의 오류 + 선결문제의 오류에 철저하게 걸려듭니다. 왜 그런지 다음에서 봅시다.
“[펜로즈]의 주장의 근저에는 의식이 신비롭듯이 양자중력이론 역시 신비스러우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설명하면 멋지지 않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깔려 있다.”
위와 같은 유형의 펜로즈 비판은 과학저술가 존 호건(John Horgan)이 자신의 1996년 저서『과학의 종말 The End of Science』 속에 아래와 같은 3단논법으로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앞의 책 241-243쪽 참조).
양자역학은 신비롭다.
의식도 또한 신비롭다.
따라서 양자역학과 의식은 서로 연관관계가 있다.
즉 위와 같은 3단논법의 논리를 펜로즈나 양자 의식 이론가들한테 뒤집어씌워 그들이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심리적/감정적 공격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적일지 몰라도, 논리적/과학적 타당성은 전혀 획득할 수 없는 오류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위와 같은 3단논법적 신비주의 뒤집어씌우기는 선결문제의 오류와 피장파장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적 사실로서의 양자역학적 사실은 원칙적으로 그 어떤 신비도 개입할 수 없는 철저한 입증/반증을 거친 사실이라는 점을 우리 인간은 잘 압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객관적/경험적/과학적 사실을 알아낸 뒤에, 새삼 자연/우주/물리 세계의 놀라운 조화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자신의 그 파악 능력에 스스로 감탄한 나머지, 애초의 과학적 태도와는 정반대로 양자역학적 사실에 일종의 신비주의의 입김을 깊숙이 불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양자역학자나 양자 의식 이론가들이 위와 같은 신비주의적 논리를 과학적 논리로 동원한 적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비로움을 방불하는 양자역학적 절묘함에 감탄했을 뿐이란 것이죠. 하지만 과학에 임할 때는 다시 철저하게 경험적(empirical), 논리적, 논증적인 태도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말해 신비 운운하는 위 3단논법은 양자 의식 이론가들을 공격했던 그 비판자들이 일방적으로 뒤집어씌운 누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역학과 의식, 그 둘 사이가 신비로운 관계인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은 오히려 비판자들한테 부메랑처럼 되돌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판자들은 앞의 신비주의적 3단논법은 허구적인 추론에 불과하다고 선제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비판이 제대로 성립하려면 피장파장의 논리에 따라 비판자들 자신 또한 그것이 왜 허구적인 추론에 불과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밝혀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비판자들은 결코 그 허구성을 밝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판자들이 저지른 선결문제 오류와 피장파장의 오류입니다. 이때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는 통찰은 양자 의식 이론가들이 아니라 그 비판자들한테 더 잘 어울리는 금언이 될 것입니다.
④ 양자 생물학
앞으로 신경과학/뇌과학이 패러다임 전환급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양자 생물학(quantum biology)을 도입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현재의 신경과학/뇌과학 수준은 뇌신경 세포인 뉴런과 뉴런의 하위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양자적 현상을 탐지하고 검출하는 데는 크게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까닭들 때문에 양자 생물학적 탐구는 앞으로 필연적입니다. (필립 볼의 아랫글을 참조할 것.)
뉴런의 크기는 세포체(soma, 뉴런의 몸체) 기준으로 4~100 마이크로미터(μm), 그 세포핵은 3~18μm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뉴런의 세포골격을 구성하는 하위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마이크로튜뷸(microtubule)로 불리는 미세소관이 있는데요. 길이는 25μm 안팎, 직경은 약 25 나노미터(nm) 정도입니다. 이 미세소관은 뉴런 내부에서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기능을 합니다. 그 기능들 중 몇 가지를 들면... → 여기서부터 작성중 !!!
⑤ 토론/논쟁의 자세
······
참고 문헌
○ Ball, Philip (June 15, 2011). Physics of life: The dawn of quantum biology. Nature 474(7351): 272-274.
○ Crick, Francis (1993). Astonishing Hypothesis: The Scientific Search for the Soul.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xvi + 317 pages]
○ Horgan, John (1996). The End of Science: Facing the Limits of Knowledge in the Twilight of the Scientific Age. New York: Addison-Wesley/Basic Books. [xiv + 322 pages]
○ 존 호건 | 김동광 옮김 (1997. 06. 10). 『과학의 종말』(The End of Science). 까치글방. [404쪽, 12,000원]
○ Penrose, Roger (1989/New Preface Edition 1999). The Emperor's New Mind: Concerning Computers, Minds, and the Laws of Physics. Oxford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aperback, xxx + 602 pages]
○ 로저 펜로즈 | 박승수 옮김 (1996. 12. 30). 『황제의 새 마음 ― 컴퓨터, 마음, 물리법칙에 관하여』(상 · 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349쪽, viii + 355쪽, 12,000원, 12,000원]
○ Penrose, Roger (1994). Shadows of the Mind: A Search for the Missing Science of Consciousn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Hardcover, xvi + 457 pages]
글이 도중에 중단된 것 같은데... 나중에 더 길게 쓰실 건가요? 그렇다면 본문으로 올리시던가... 아무튼 기다리기도 지루하니 먼저 간단하게 몇가지 답하죠.
1. "The Emperor's New Mind"는 안델센의 유명한 동화 "The Emperor's New Clothes"를 패러디한 제목이죠. 동화에서 그렇듯이 실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본인은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임금님의 새 옷' 아닙니까? 당연히 '임금님의 새 마음'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2. '의식의 수수께끼가 신경과학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전공자도 아닌 제 의견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한 뇌과학, 심리학 및 인공지능 전문가들 중 대부분의 패러다임에서 그 대답이 "그렇다"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펜로즈의 의견은 한 극단적인 비주류의 의견, 아니 사실은 그것조차 못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릭의 말대로 그는 어디까지나 이 문제에 대해서 아마츄어니까요.
3. 죽어서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소리는 전혀 믿지 않으니 유물론자라 할 수 있겠고 송과선 근처 어딘가에서 육체와 영혼이 상호작용한다는 말을 개그로 여기니 이원론자는 아니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현대 과학자 가운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최근에 영혼이 어쩌구 하는 과학자 보신 적 있어요? 펜로즈의 믿음에 따르더라도 양자중력학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의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결국 이건 완벽한 환원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만 물질과 의식이 환원되는 레벨이 크릭 등 주류와 다를 뿐이죠.
4. "이원론이 반론에 부딪히는 만큼 환원적 물질론/물리주의도 거센 반론에 부딪쳐 좌초하다시피 하고 있는 게 요즘의 추세"라는 소리는 "진화론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있으니 창조론과 다를 것 없다"는 꼴통 개독교인들의 말과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피장파장의 오류란 바로 이거라고 알고 있는데요?
5. 위 글의 후반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펜로즈가 말하는 의식의 해결 열쇠는 (아직 우리가 만들어내지 못한) 양자중력학입니다. 양자역학은 이것과 전혀 다르죠. 이는 이미 확실히 검증이 된 이론으로 더 이상 개발되거나 변경될 여지도 전혀 없어요. 그리고 내용상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서 이공계 학부생 수준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철학적 해석에 있어선 조금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도대체 누가 양자역학을 의식과 연결시킨다는 겁니까?
6. 호건이란 사람 책은 전에 한번 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저자가 자기 능력에 부치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느낌입니다. 현대 과학과 철학의 여러 이론을 다루면서 그 개념을 따라가려고 무지하게 애는 쓰는데 아무래도 인문계 출신으로서는 무리라는 느낌...
꽃가루 님, 번역 비판 작업은, 그 진정성과 엄밀성이 보장만 된다면, 어떤 형태이든 충분히 의미 있고 격려 받아 마땅한 작업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꽃가루 님의 위 번역 비판을 지지합니다.
단 번역 비판/비평을 하는 분들은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항상/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① 모든 번역에서 오역은 필연이다.
② 모든 번역자는 오역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③ 모든 번역 비판 작업에서도 역시 오류/오역은 필연적이다.
④ 따라서 모든 번역 비판자/비평가 또한 오류/오역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⑤ 따라서 완벽한 번역과 번역 비평 작업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⑥ 다만 번역과 번역 비판 작업 모두 최선을 추구해 가는 하나의 상호작용적 소통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위 명제들을 ‘머리로는’ 쉽게 인식하죠. 하지만 ‘실천의 측면에서는’ 저 명제들 대부분을 까마득히 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 때문에 번역가들 자신은 물론이고 번역 비평가들 모두 항상/반드시 상기하고 자각해야 하는 필수 사항들입니다.
그리고 번역 비판 작업은 일단 “남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하는 유리한 작업”입니다. 즉 번역 비판자는 원 번역자의 지적 능력(과 그 정반대의 지적 무능력까지를)을 지렛대 삼아 자신의 지적 능력을 (좁혀 말해 자신의 번역 능력의 상대적 우월함을) 과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자는 시시비비에 관한 한 엄정하고도 단호하지만 도를 지나쳐 무자비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수백수천 길 높이를 날고 기는 각 방면의 현자들이 즐비한 지식 세계에서 우물안 개구리식의 착각과 오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겸허해져야 하는 까닭입니다.
첫 번역자가 애초에 지녔을 법한 번역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수준 높은 해외의 지적 성취물과 그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고 싶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시도조차 않는, 게을러빠진) 남들보다 앞서서 과감하게 첫발을 내딛는 도전 정신 등등은 충분히 높이 평가하고 찬사를 보내줘야 할 것입니다.
(물론 『괴델, 에셔, 바흐』와 같은 상상 이상의 ‘오역 사건’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역 사건’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교수 사회, 출판계, 지식인 사회의 장기간에 걸친 무책임과 범죄적 방치 행위는 그 오역 사건 자체보다도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안은 번역 문제를 초월해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비정통성, 비정당성, 무철학/반철학적 심리기반, 등등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으로서 훨씬 더 총체적이고 심층적인 파악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번역비판을 하더라도 인신공격성 발언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개는 반발만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이재호 교수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 오역 오독이 거의 공해수준이라고 비판받았던 이윤기씨도 뼈아픈 지적도 있지만
공해수준이라는 비판은 하등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장미의 이름』 번역서에 대한 강유원씨의 지적엔
감사를 표했습니다. 비판을 받는 것 기분 좋을리 없을 겁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제시하는 번역도 바른
번역이라 하지 않고 제안번역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괴델, 에셔, 바흐』번역은 제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저 입에서는 "어떻게 이걸 번역서라고 내놓았지" 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꽃가루 님, 전체적으로 꽃가루 님의 ‘제안번역’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다만 문장의 매끄러움이라는 측면에서는 꽃가루 님의 번역안도 조금 더 가다듬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아래 원문에 나오는 “mapping”을 그냥 “매핑된다”는 식으로 음역하셨는데요. 이에 관해서 짧게 촌평하겠습니다. 먼저 인용을 하고 그 아래에 촌평을 덧붙이죠.
역서 341쪽 :
그것은 마치 누군가 자신의 생애를 모조리 악보로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갑자기 소리와 악보 사이의 사상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얼마나 풍요로운 신세계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자신의 전생애에 걸쳐서 그 연쇄체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그러나 의미가 없는 연쇄체의 모습에 익숙해진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러면 갑자기 누군가를 이야기와 연쇄체 사이의 사상관계로 인도했을 법하다.
원서 263쪽 :
It is as if somebody had known musical scores all his life, but purely visually - and then, all of a sudden, someone introduced him to the mapping between sounds and musical scores. What a rich, new world ! Then again, it is as if somebody had been familiar with string figures all his life, but purely as string figures, devoid of meaning - and then, all of a sudden, someone introduced him to the mapping between stories and strings.
제안번역 :
그것은 마치 평생동안 악보를 알고는 있었지만 순전히 눈으로만 봐 욌던 사람에게 어느 순간, 누군가 소리와 악보가 서로 매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풍요로운 신세계인가 ! 또한 그것은 마치 평생동안 문자열에 익숙했지만 의미는 모른채 순전히 문자열 모양에만 익숙했던 사람에게 어느 순간, 누군가 이야기와 문자열이 서로 매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qualia 촌평:
위 원문에서 “the mapping between A and B”라는 구문이 쓰였는데요. 이런 구문은 아마도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 Hofstadter)가 수학의 함수(function) 개념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 겁니다. 즉 위 원문에 나오는 “sounds ↔ musical scores” 그리고 “stories ↔ string figures”는 일종의 함수적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때 호프스태터는 이 대응 관계를 자신이 다루는 주제와 『괴델, 에셔, 바흐』의 전체적 문맥에 잘 어울리게 (수학 용어인 동시에 일상적인 용어로도 두루 쓰이는) “mapping”이라는 낱말을 끌어와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때 “mapping”은 “사상(寫像)하다” 따위로 번역해줄 수도 있긴 한데요(일종의 서툰 직역이죠). 그러나 위에 보듯이 박여성 번역자는 해당 원문 내용을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전혀 엉뚱한 의미로 오역했기 때문에, “사상(寫像)”이 지니는 원래의 함수적 의미가 전혀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함수와 관련된 “mapping”의 개념은 한국 지식인들이 일본 지식인들의 번역어 “사상(寫像)”을 그대로 가져와서 썼기 때문에 일상적 문맥에서는 아주 생경하고 지나치게 전문적/현학적으로 보입니다. 즉 함수의 대응 관계로서의 “mapping”은 결코 난해한 개념이 아니랄 수 있는데요,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가져온 “사상(寫像)”이라는 번역어는 지나치게 난해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함수의 기초적 (맞)대응 관계를 사상(寫像)이라는 어려운 용어로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관계를 설명하는 쉬운 순우리말도 얼마든지 있고, 훨씬 덜 어려운 일상적 한자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여성 번역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수학적/과학적/철학적 난해함에 압도당한 나머지 대부분의 용어들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생경한 한자말투로 옮긴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례로 “self-reference”를 “재귀 준거”라는 지극히 현학적이면서도 그 핵심을 빗나가는 번역어로 부적절하게 옮겼더군요. 그러나 『괴델, 에셔, 바흐』의 문맥에서 “self-reference”는 (조금 무리는 있지만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끔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이외의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에 관한 정확한 번역어의 설정과 그 개념적 설명은 언제 한번 기회가 나면 상세하게 다뤄보고 싶군요.
[왜냐 하면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은 바로 이 “self-reference”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묶음 그 자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self-reference”의 정확한 개념적 파악과 올바른 번역은 아주 중요합니다. 『괴델, 에셔, 바흐』의 문맥에서 “self-reference”는 “자기 지시” 외에 “자기 언급”이라는 번역어도 그런대로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 개념의 단일성 · 통일성, 그리고 다른 인접 분야에서도 별다른 수정을 거치지 않고 쓸/쓰일 수 있는 상호통용성 · 중립성 · 적절성 따위를 고려할 때는 “자기 지시”라는 번역어가 최상이라고 판단합니다. 여기서... → 이 부분은 작성중!
위 단락에 이어서 추가로 덧붙이는 글: 왜냐 하면 여기서 “self-reference”는 여러 가지 형태로 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학에서의 거짓말쟁이 크레타인의 사례처럼 말과 글로써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자기 언급), 3차원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계단/폭포/건축물 따위를 그려낸 에셔의 작품들처럼 그림으로/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묘사적 지시(무한 순환적인 자기 반복), 프랙탈 기하학(fractal geometry, 쪽거리 기하학)에서 나타나는 자기 유사성(수학적 자기 지시), 디엔에이(DNA)의 이중나선 구조나 생물들의 면역 체계에서 나타나는 유전학적/면역학적 지시(자기 복제, 자기 인식 기제), 등등 아주 다양한 형태로 발현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언어적/논리적/감각적/관념적/상징적/수학적/생물학적 “self-reference”의 사례들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번역어로는 “자기 지시”만한 것이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언급도 결국은 자기 지시의 하위 범주에 들어가므로 “self-reference”의 적절한 대표 번역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거에 따르자면 “재귀 준거”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데다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애초에 의도한 “self-reference”의 개념적 핵심 파악을 오히려 방해하는 거의 엉터리에 가까운 번역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약간 샛길로 빠진 듯도 한데요. 그런데 “mapping”에 대한 꽃가루 님의 음역어 “매핑된다”도 꽤 불충분하고 불성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례가 아닌 한 음역은 되도록 피하고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해줘야 합니다. 무분별한 음역은 번역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그 근원부터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위 원문은 악보의 음표들과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황홀한 순간, 단순한 기호들의 나열이 일련의 이야기들과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의미심장한 순간을 “mapping”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번역은 전혀 난해할 것 없이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상(寫像)”이라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불충분한 “매핑”이라는 음역어로 옮기는 것은 지극히 쉬운 내용을 오히려 어렵게 바꿔서 독자들한테 강요하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즉 잘못된 번역이거나 나쁜 번역의 전형들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오타와 뛰어쓰기 오류는 올바로 고치시기 바랍니다. 남의 오류를 비판하겠다면, 우선 내 자신의 오류부터 완벽하게 바로잡고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원래 모든 비판가/비평가들한테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앞으로 『괴델, 에셔, 바흐』 한국어판에 대한 꽃가루 님의 번역 비판이 더욱 기대됩니다. 위 표젯글의 제목으로 보아 『괴델, 에셔, 바흐』 한국어판에 대한 번역 비판 작업은 계속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아크로 문화/예술/과학 게시판에서 꽃가루 님의 흥미진진하고 훌륭한 번역 비판 글을 더욱 많이 볼 수 있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위 댓글에서 “작성중”이라고 해놓고 미처 써올리지 못한 내용을 오늘 아침 09시 30분쯤에 마저 써올렸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독자분들을 위해 보충한 부분을 따로 아래에 적어놓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은 바로 이 “self-reference”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묶음 그 자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self-reference”의 정확한 개념적 파악과 올바른 번역은 아주 중요합니다. 『괴델, 에셔, 바흐』의 문맥에서 “self-reference”는 “자기 지시” 외에 “자기 언급”이라는 번역어도 그런대로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 개념의 단일성 · 통일성, 그리고 다른 인접 분야에서도 별다른 수정을 거치지 않고 쓸/쓰일 수 있는 상호통용성 · 중립성 · 적절성 따위를 고려할 때는 “자기 지시”라는 번역어가 최상이라고 판단합니다. 여기서... → 이 부분은 작성중!
위 단락에 이어서 추가로 덧붙이는 글: 왜냐 하면 여기서 “self-reference”는 여러 가지 형태로 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학에서의 거짓말쟁이 크레타인의 사례처럼 말과 글로써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자기 언급), 3차원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계단/폭포/건축물 따위를 그려낸 에셔의 작품들처럼 그림으로/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묘사적 지시(무한 순환적인 자기 반복), 프랙탈 기하학(fractal geometry, 쪽거리 기하학)에서 나타나는 자기 유사성(수학적 자기 지시), 디엔에이(DNA)의 이중나선 구조나 생물들의 면역 체계에서 나타나는 유전학적/면역학적 지시(자기 복제, 자기 인식 기제), 등등 아주 다양한 형태로 발현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언어적/논리적/감각적/관념적/상징적/수학적/생물학적 “self-reference”의 사례들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번역어로는 “자기 지시”만한 것이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언급도 결국은 자기 지시의 하위 범주에 들어가므로 “self-reference”의 적절한 대표 번역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거에 따르자면 “재귀 준거”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데다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애초에 의도한 “self-reference”의 개념적 핵심 파악을 오히려 방해하는 거의 엉터리에 가까운 번역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덕하님의 14장 번역비판에 대한 퀄리아님의 비판도 읽어본 적 있습니다. 용어 번역문제는 본격적으로 번역비판 작업을 할
때 언급하려 했는데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간략하게 제 생각을 밝혀 보겠습니다. 저는 어려운 한자어 쓰는 걸 아주 싫어합니
다. 우리의 언어생활에 한자말이 주는 폐해가 아주 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자말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수많은 공사장 안내문 끝에 '공사장 소장 백' 이라고 쓰여 있지만 '백'이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白' 인데 '희다'는 뜻이 아니고 '사뢰다'는 뜻으로 쓴 것이지요. 저 같으면 그냥 '공사장 소장 알림' 이라고 쓰겠습니다.
분유광고 문구중에 '우리 아기 최초의 만찬 무슨무슨 분유' 라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산모가 모두 저녁때
아이 낳는 것도 아닌데 웃기는 문구입니다. 제 생각엔 카피라이터가 '만찬'의 뜻을 잘 모르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균질 우유' 광고도 생각나는군요. 박찬종이 광고 모델로 나와서 무균질 정치인 어쩌구 저쩌구 한 걸로 기억합니다.
무균질(heterogeneous)이 균질하지 않다는 뜻이지 균이 없다는 뜻입니까? 고시 3관왕이라는 박찬종이도 무균질의
뜻을 모르고, 박찬종이와 갈라섰던 김동길이는 박찬종이 균이 득시글거리는 정치인이라고 깠습니다. 다 코메디 같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보았던 전공원서에 hollowed bar 란 말이 있었는데 번역서엔 中空棒 이라 되어 있는 걸 보고
웃었던 기억도 나는군요. 제가 한자에 엄청 매력을 느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매핑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심을 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우리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매핑이라고 했는데
컴퓨터 용어사전도 뒤져보고 고중숙 교수의 『수학 바로 보기』책도 뒤져보니 mapping 이 寫像 으로 나와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컴퓨터 하던 시절에 매핑이라는 말을 사상이라는 용어로 쓴 적이 한번도 없
었습니다. 퀄리아님은 매핑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제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오타는 바로잡겠습니다마는 띄어쓰기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한 번 훑어 보니까 원 번역자보다 꽃가루님 번역이 훨씬 좋아보이네요. 일단 원문의 평이한 문체를 우리말로 기계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 쓸데없이 어렵게 만들어 버리지 않고 그대로 우리말 평이한 문체로 옮기려고 노력하는 점이 제일 눈에 띕니다. 사실 제가 보기엔 번역에서 제일 중요하면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이거라고 보거든요. 평이하게 표현된 원문의 사상을 단어대 단어 직독직해라는 명분하에 불필요하게 난해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기. 독자들에게 이해되어야 할 번역의 궁극적인 대상물이 원저자가 쓴 자구 자체가 아니라 원저자의 생생한 생각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번역가들이 제일 많이 저지르는 오류지요. 전 꽃가루님 번역 비판 프로젝트 응원합니다.
mapping --> 저라면 본문에 <대응관계를 맺고 있다>라 옮기고선 따로 역자주를 달아주는 방법을 고려해보겠습니다.
또는 단순히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번역해도 좋다고 봐요.
""" 또한 그것은 마치 평생동안 문자열에 익숙했지만 의미는 모른채 순전히 문자열 모양에만 익숙했던 사람에게 어느 순간, 누군가 이야기와 문자열 간에 서로 (함수적) 대응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하 수학맹/물리맹의 취중 횡설수설.
어떤 사람이 개개 음표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에 대응하는 게 악보라는 걸 깨닫게 해준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음표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파형을 그래프로 그려낼 수는 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어떤 음을 들려주면 거기에 해당하는 음표를 골라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알파벳을 알아서 소리내어 읽을 줄은 알지만(음가는 알지만) 정작 음가에 담긴 뜻(meaning), 다시 말해 현실에서 음표가 가리키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musical scores는 악보라기보다는 아마 개개의 음표들에 가까울 겁니다.
음표(音標) [명사]
[명사]<음악>악보에서, 음의 장단과 고저를 나타내는 기호. ≒노트2(note)ㆍ소리표ㆍ음부2(音符).
장단, 고저하면 당연히 물리학의 파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죠.
참조: http://117.53.101.13/qna/view.html?n=7783653
음표를 놓고 보자면 정약용의 글에 보면 줄을 튕길 때 줄의 길이에 따라 음이 달라진다는 내용을 기술한 서신이 있습니다. 여기서 sound는 음표에 대응하는 특정한 음을 가리키는 것일 겁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musical scores를 악보로 보자면 거기 purely visually라는 표현과 결부하여 known이라는 의미는 이런 것일 겁니다. 시각만을 작동시켜 아래 그림처럼 파형으로만 score 하나를 이해한다는 뜻이죠. 시각만 작동시켜 파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악보 보고서 소리내어 음을 내지 못합니다. 정확히는 파형과 파형 사이를 잇지 못합니다.
mapping은 함수이고 함수는 변화죠. 저쪽 값이 변하면 이쪽 값이 이렇게 변한다. 함수는 영어로 function이고 correlative change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as a function of~. 어려운 말인 사상이나 함수도 있지만 map은 짝(쌍)을 이룬다가 근사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 글에서 그 쌍은 변화하는 쌍일 겁니다. 함수 관계가 당연히 그러하듯이. 짝을 이루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짝이 그 결합이 형태는 바뀌더라도 절대 깨어지지 않도록 '어떤' 규칙(끈, 접착제, 제목에 나오는 braid)이 항상 그 짝 안에 존재합니다.
댓구를 이루는 게 아래 나오는 string과 stories입니다. 내 생각에 여기서 string은 단어나 문자열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얼개로 보자면 단어가 모여 이야기를 이루는 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아마 아래의 뜻일 겁니다.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String_figure.
우리가 어릴 적에 줄 가지고 많이 했던 놀이죠. 이걸 뭐라고 하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둘이서 셋이서 번갈아 가면서 게임하면 씨줄과 날줄이 모여 다른 모양을 만들어 냅니다. 이걸 지칭하는 게 story입니다. 저 문장 뒤로 이어질 내용은 아마도 각각의 score와 string 사이에 모종의 힘 혹은 interaction(물리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힘에 비유해도 되겠죠. 가장 단순하게 물리 세상을 설명해내는 원리)이 작용하여 전혀 새로운 유형의 결과(형상)가 나온다는 것 같습니다. 뭐 아님 말고 :)
흥미가 닿아 인터넷에서 파일을 받아놓았지만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수학맹/음악맹이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부깨나 해야될 것 같지만 얼추 방향이 어떤 것이겠나 싶기는 합니다.
위키피디아:
A string figure is a design formed by manipulating string on, around, and using one's fingers or sometimes between the fingers of multiple people. String figures may also involve the use of the mouth, wrist, and feet. They may consist of singular images or be created and altered as a game, known as a string game, or as part of a story involving various figures made in sequence. String figures have also been used for divination, such as to predict the sex of an unborn child.[1]
score 하나와 어떤 모양을 이룬 string 하나는 그 자체로 사실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게임 상대가 개입하여 다른 string figure로 변형되거나 앞뒤에 다른 score figure가 연속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musical note나 story를 이루어야만 어떤 의미를 낳습니다.
story를 이해하기 전까지 독립된 string figure 하나 하나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래 그림 1에서 그림 2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그 변화의 과정을 접하게 해주면서 법칙을 보는 새로운 눈이 트이는 것이죠. 보여준 그 사람이 stroy->string figure로 역어셈블하여 표현하는 표기법은 모를른가 몰라도.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문자가 먼저냐 말이 먼저냐를 놓고서 그간 학설과 달리 문자가 먼저라는(이것두 적확한 표현은 아님), 요새 유명세를 탄다는 프랑스 철학자(뭐 이 사람의 그 주장 역시 아주 독창적인 것이라 하기는 힘들겠지만서두) 생각도 납니다.
음..결론? 술 먹고 댓글 달아서 쓰레기 생산하지 말자.
그림 1
↓
이 댓글은 잡설이니 깊게 파고드실 것 없고 단지 string figures에서 string은 문자가 아니라 위에 저 그림을 뜻하는 게 맞을 겁니다.
뭐하면 코쟁이들한테 확인해 보시면 될 듯.
이공계는 아닌데 93년에 운영체제 개론 수강했습니다. 물론 점수는 형편 없었고 :)
프로그래밍 용어에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익숙합니다.
string(문자열 값)이 컴퓨터 공학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는 건 아니고 이 책에서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건 짐작이 가는데
string figures에서 string이 integer 등등과 같은 류로 쓰인 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뭐 아직 읽어보질 않았으니 그쪽 분야 일하는 분들
의견이 그렇다면 아마 그렇겠죠. 이 책을 천천히 읽어볼랍니다. 쉬운 책이 아니지만서두.
뭐하면 전체 번역을 함 시도해보죠. 아크로 분들하고 같이 해보든가. 무척 오래 걸리겠지만.
문자와 이야기가 대응 얼개라면 character나 words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굳이 string figures라는 표현을?
본문에 오른 구절들을글들만 보고서 처음에 나도 그 댓구를 생각했습니다.
(string figures와 특히 story를 보면서 문자열을 가리키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한 것은
'나도 모를' 내 경험칙에 따른 겁니다. 그러니까 아래 내용은 다른 분들 의견 보면서
내가 틀렸겠구나 하면서 해당되는 원문을 일부 읽어나가며 확인한 것입니다.
물론 이 내용 역시도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string figures와 story가 문자(혹은 단어-문자와 단어는 다르죠.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 모르겠지만)와 이야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노끈으로 혼자서 형상을 만들어 내는 체험과 여럿이 번갈아
그 만들기에 참여하는 게임(이게 story 혹은 string game?)의 상호작용이 낳는 결과는 차원(아래에 domain 혹은
magnitude에 근사)이 다른 체험입니다.
글 앞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 duality는 무척 자주 나옵니다.
Achilles: Then there are some String Manipulation Rules, by which you can make more
complex string figures. In particular, you are allowed to modify your string by doing
certain basic motions of the hands. For instance, you can reach across like this-and
pull like this-and twist like this. With each operation you are changing the overall
configuration of the string draped over your hands.
Tortoise: Why, it looks just like making cat's-cradles and such string figures!
Achilles: That's right. Now as you watch, you'll see that some of these rules make the
string more complex; some simplify it. But whichever way you go, as long as you
follow the String Manipulation Rules, every string you produce will have Buddhanature.
꽃사랑(죄송, 꽃가루 님이군요) 님이 쓴 본문이 속한 문단 전체를 옮겨봅니다.
TYPOGRAPHICAL RULE I: From any theorem whose rightmost symbol is ' 1' a new
theorem can be made, by appending `0' to the right of that 1'.
They would have the same effect. This is why the right-hand column has a "dual nature":
it can be viewed either as a series of typographical operations changing one pattern of symbols into another, or as a series arithmetical operations changing one magnitude into another. But the are powerful reasons for being more
interested in the arithmetical version. Stepping out of one purely typographical system
into another isomorphic typographical system is not a very exciting thing to do; whereas
stepping clear out of the typographical domain into an isomorphic part of number theory
has some kind of unexplored potential. It is as if somebody h known musical scores all
his life, but purely visually-and then, all o: sudden, someone introduced him to the
mapping between sounds a musical scores. What a rich, new world! Then again, it is as if
somebody had been familiar with string figures all his life, but purely as string figur devoid
of meaning-and then, all of a sudden, someone introduced him the mapping between
stories and strings. What a revelation! The discovery of Gödel-numbering has been
likened to the discovery, by Descartes, of t isomorphism between curves in a plane and
equations in two variables; incredibly simple, once you see it-and opening onto a vast
new world.
데카르트를 인용한 isomorhism은 첫 번째 비유, 음표 또는 악보와 실제 파동(진동)을 일으켜 나오는
소리가 대응한다는 뜻일 겁니다. 두 번째 string figures와 story는 방향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나중에 읽어보면 서툴거나 전혀 삽질일지 몰라도 제 의견을 좀 자세히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척 걸릴 듯.
무척 흥미로운 책입니다. 동양의 개념들(부다의 인문학, Zen이라는 거 불가의 선이죠.
서양에 전해진 불교 중 일부는 서양과 먼저 교류한 일본을 거쳐서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전에 그 외의 경로로 많죠. Zen은 일본에서 쓰는 '선'입니다)도 많이 나오고
동양의 인문학과 서양의 학문이 많이 뒤섞인 걸로 보입니다. 아크로 수준이
이공계 출신이 아니라면 저 책 논하지 마라 그럴 정도는 아닐 것 같습니다. <--사족. 수준이 낮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 관용은 발휘하는 곳이라는 뜻임.
물론 서양 수학 등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뭐 여튼 저 책 이해하려면 엄청 배경 지식을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 string은 getabeam 님 말대로 문자의 나열로도 물론 쓰입니다.
이 책 제목이 metaphorical이라는 말도 들어 있고
또 제목에 braid라는 표현도 있고 여튼 앞에서부터 읽어왔어야
지금 string figures와 stroy가 무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Chapter 1
The MU-puzzle
Formal Systems
"Can you produce MU?" is the puzzle. To begin with, you will be supplied with a
string (which means a string of letters).*
three letters of the alphabet: M, I, U. That means that the only strings of the MIUsystem
are strings which are composed of those three letters. Below are some strings of
the MIU-system:
MU
UIM
MUUMUU
UIIUMIUUIMUIIUMIUUIMUIIU<--이것 역시 string의 나열이고 또 string manipulation(두 가지 의미로 쓰임)에 들어갑니다.
혹 내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라도 소화해낸다면 그때 다시 댓글이라도 함 달아보겠습니다.
워낙 방대해서 일단은 내 깜냥 밖이군요.
각설하고 때로는 두 단어의 연속 배열이 전혀 다른 대상을 지칭할 때도 있습니다. 글 전체에서 string figures가 가지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string만 따로 내어놓고 보지 말고. string figures는 줄을 써서 만든 형상이지 알파벳이나
ㄱ, ㄴ, ㄷ 같은 문자 형상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데 5만원 겁니다. getabeam 님도 5만원 거세요 :)
진질 님, 문제의 “string figures”는 위 문맥에서 “기호열” 혹은 “문자열” 혹은 “숫자열”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어떤 기호들(symbols), 글자들(letters), 숫자들(numbers)이 줄줄이 이어진 기호의 줄(string)이나 글자의 줄(string), 숫자의 줄(string) 따위의 시각적 형상(figures)을 말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문제의 “string figures”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 Hofstadter)가 위 인용문에서 거론하는 까닭은 괴델수 매기기(Gödel numbering, 괴델수 붙이기)에 관한 유추적 설명을 위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괴델수(Gödel number)는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구상하고 증명하기 위해 초천재적 발상으로 창안한 것으로서,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에서 핵심적 열쇠 역할을 하는 개념입니다. 편의상 간략히 말하자면, 이 괴델수는 증명하고자 하는 수학적 형식 체계 내의 연산 기호/부호, 공식, 명제 등등에 하나씩 하나씩 갖다붙이는 고유한 자연수들을 말합니다. 이때 이런 절차와 방법을 일컫는 괴델수 매기기(괴델수 붙이기)는 일종의 함수(function)로서 쌍방간의 짝맞추기(mapping, 사상, 寫像)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일한 연산 기호/부호는 하나의 괴델수가 할당되므로 줄이나 열(string)을 이루지 않지만, 특정한 공식이나 명제 따위는 다수의 괴델수가 부여되기 때문에 매우 길고 복잡한 줄이나 열(string)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앞에서 말한 “기호열/문자열(string figures)”과 같은 맥락의 숫자열(sequence of numbers)인 것입니다. 이런 숫자열은 괴델수/괴델수 매기기(붙이기)/불완전성 정리 따위 등등의 배경적 맥락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저 단순한 숫자들의 나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의 그 배경적 맥락의 심오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새롭고도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사 앞부분 20쪽 정도 읽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qulia 님이 지금 설명해주신 내용 중 도입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 재미는 있지만 내 모르는 부분이 많아 출처를 참고할 게 워낙 많아서 한번 읽어보는데만도 얼추 1년 걸릴 것 같습니다.
이 책 내용은 숨은 그림 찾기 게임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게임의 유일한 법칙은 거기 참여한 사람들이 실은 자신이 숨은 그림 찾기 게임에 뛰어들었다는 걸 알지 못하게 하고서 게임에 참여하도록 한 것 같고.
많은 승려나 서예가들이 一體唯心調를 한자로 써내려갑니다. 흘려써내려가고 때로는 생략해 버리는 그 타이포그래피를 보자면 저게 일체유심조라는 걸 어찌 알까도 싶습니다. 그런데 고수는 아니더라도 불교쪽 문화와 한문에 어지간히 익숙한 사람들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아 저거 일체유심조군 하고 알아냅니다.뭐 모른다고 문제될 건 없지요.
항상 문제가 되는 건 그 상황에서 그걸 알아알 책임을 진 이들이 모를 때.
(예외 없는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예외 없는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라는 명제가 완전하게 성립하려면 예외 없는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라는 명제에 예외가, 그러니가 예외 없는 법칙이 있어야 되겠죠. 물론 예외 없는~~ 예외가 없다라는 게 명제 혹은 법칙에 해당하는지 먼저 가려야 하겠고)
self-reference도 잘 모릅니다. 대충 그런 쪽인갑다 하는 정도고 또 분야마다 의미가 조금 달리 쓰이기도 하고. 두루뭉술하게 집합론 쪽 이야기 같기도 한데 그게 또 양자물리학 쪽에서 관찰자의 개입이 있는 한 관찰 대상의 좌표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하고도 좀 맥이 닿는 것 같고 그게 또 동양 불교 쪽하고 연관이 있다고들 하고.
인간의 인지 능력은 영원히 상수 찾기(답은 특정할 수 없으나 적어도 어떤 범위 안에 있다. 범위는 갈수록 좁혀지지만 양질전화를 거쳐 또다른 차원에 들어서면 또다른 범위가 나타난다)차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인간의 문제로 치자면 정작 가장 큰 문제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누구나 이 책을 읽어서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나 이 책 읽고서 책 내용 이해했고 또 배경이 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공부해서 이해하더라도 중요한 점은 거기에 이르게 된 출발점이 지적 '호기심'이어야 하지 않냐는 점일 겁니다. 그러면 잘 이해하고 있는 남들과 비교하여 채 이해하지 못했다 해서 낙담하거나 자학하거나 역으로 이해하는 그룹에 들었다고 뻐기고 우쭐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지적 호기심을 알아볼 수 있는 시험지는 아마 모르면 더 아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 하는 것 정도? (아크로가 그런 점에서 그래도 낫습니다. 특정 분야 사람들이 아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세상은 그 호기심을 억누릅니다만. 그 호기심을 억누르지 않는 풍토가 문화 선진국의 토양 같기도 하고.
지식을 주었던 전문가는 또 다른 분야에 대해선 잘 모르니 상황이 역전되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아는 누군가에게 또 편하게 질문을 하는, 지적 交換 속에서 交歡을 체험하는 게 어쩌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기전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기전이 그것 하나 뿐이 아니고 성적 접촉도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하는 것도 있고 좋은 음식 먹는 것도 있고... ... .
내가 아는 한에서 젤 재미나고도 어처구니 없는 폭력은 말하자면 아무나 붙잡고서 당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아냐고 이해하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상대가 뻘줌해 하면 막 비웃는 것입니다. 대개 그때 사람들은 질문은 던지는 당신은 아느냐는 반문을 않더군요. 자신도 답을 하지 못하고 어쩌면 세상 누구도 답을 못할 질문을 던지고서 상대가 답을 못하면 질문이 던졌던 사람이 내가 이겼다라고 하는 게 묘한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가 모르고 쩔쩔 맨다는 것이죠. 상대는 약자가 되고 작아진 상대를 보며 자신은 커졌다는 행복감을 느끼는 우리네 사람들은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앳띤 소녀가 어느 공익광고에서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로 시작되는 멘트를 하던데 그 음성 빌어서 "중요한 것은 ~ 이상한 존재입니다"라고 광고 보내면 대박날 것 같습니다 :)).
이게 사람이라는 동물 종에서 권력의 본질입니다. 자신은 숨기고 상대는 드러내 보이는 것. 법학에 무기 평등의 원칙이라는 장치도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는 않죠.
니도 모르지 반문하는 순간 전세가 역전되는데 그때 그럼 우리 함 같이 알아보자로 정반합이 이루어지는 분위기라면 세상 사는데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쐬주 한 잔 걸쳤지만 qualia 님 덕분에 징검돌 몇 개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고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을 본받는 것이죠. '여기가 아닌게비여'라고 말하는 용기.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이런, 이게 바로 나야!>도 번역되었습니다.
호프스태터가 서문을 달았으며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이야기한 <괴델의 증명>도 번역되었고요.
물론 꽃가루 님이 결정하실 일이지만 저는 이 책 두 권의 번역을 꽃가루 님이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다른 일에 집중할 생각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번역 비판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올해는 <이덕하의 진화 심리학 강의> 집필과 <종의 기원> 번역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이런, 이게 바로 나야!>의 원서가 호프스태터와 다니엘 대닛이 편집한 『The Mind's I』이지요. 옛날에 사둔 해적판 원서가
있긴 합니다. 저도 바로 며칠 전에야 김동광씨가 이 책을 번역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블로그에서 번역이
엉망이란 말을 읽었습니다.
어니스트 네이글과 제임스 뉴먼의 <괴델의 증명> 은 원서 무료 다운받아 지금 읽고 있습니다. 호프스태터의 서문도 읽었고
앞부분을 읽었는데 상당히 재미 있더군요. 본격적인 증명 부분은 아직 못 읽었는데 어렵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번역자 곽강제
교수와 고중숙 교수는 신뢰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중숙 교수의 『수학 바로 보기』를 읽었는데 훌륭한 책이었습니다.
곽강제 교수는 제가 애독했던 『An Introduction to Philosophical Analysis』를 번역했던 분이라 믿음이 갑니다. 그런데
번역을 비교해 본 건 아닙니다.
저의 머리는 짧고 다른 할일들도 많고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머리속에 입력은 해 두겠습니다.
진질님 외 / 아무래도 제가 틀렸고 진질님이 옳은 듯.
아래 링크 보세요.
아래 동영상도 보시고.
https://www.youtube.com/watch?v=5qdcG7Ztn3c
minue622 님, 진질 님께서 전적으로 틀리셨다고는 할 수 없을 듯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즉 위에서 문제가 된 문맥에 한정해서 볼 때, 진질 님의 “string figures”에 관한 독해/해석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위 문맥에서 “string figures”는 괴델수(Gödel number), 괴델수 매기기/붙이기(Gödel numbering),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 함수(function) 따위의 개념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용어입니다. 애초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 Hofstadter)는 독자들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심오한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 문제의 “string figures”가 어떻게 생성되고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기초적이고 유추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질 님의 상상력은, 진심으로 말해서, 정말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질 님의 글을 읽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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