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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있으면 삶은 보이지 않는다. 산 한가운데 있으면 산이 보이지 않듯이 말이다. 물론 삶 한가운데 있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일부러 삶 한가운데 있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삶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삶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불가능한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학문이고 그중에서도 철학이다. 추상적 지식이나 현학은 결정을 내려야 할 개개의 경우들에서 훌륭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나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지식으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깨달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현학에 대한 비판적 식견 없이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돈의 지위에 대한  추상적 고찰 없이 돈에 대해 덜 걱정하는 법을 배우는게 어떻게 가능한가? 정신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인지과학과 포스트인지과학의 관점들을 서로 대질시켜 온전한 정신이라는게 도대체 뭔지를 감잡지 않은채 온전한 정신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생각, 고찰, 대질은 전문가들의 몫이고 일반대중을 위한 간편한 지혜는 따로 생산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성생활의 현실적 문제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이 어째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더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만족하겠다는 것인가? 터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다 억압된 것인가? 사적 영역, 특히 성 영역에서의 충족에 대한  노골적 추구 자체가 다른 사적 충족들  및 공적 영역에서의 충족에 대한 기대치의 억압을 대가로 생산되고 부과된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인가?  섹스에 대해서도 철학적 사색이 필요하다면, 그 사색은 바로 이,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충족들의 배치 또는 경제에 대한 사색의 일부이어야 하는것 아닌가?

 

현실 자체가 총체적으로 빈곤하고 삭막한데 어떻게 역동적 지식과 충만한 삶이 가능한가? 어떤 포지티브한 의미망 안으로도 온전히 끌어모으기 힘든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그대로 부정적으로 그려내는 것만이, 그 조각들을 허위적으로 아름답게 짜맞추거나 어느 한 조각에서 일시적으로, 또는 다른 조각들의 허위성이 더 심화되는 대가로, 달성되는 충족감에 기만당하지 않는 것만이, 즉 우리 삶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과 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삶만이 오늘날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역동적 지식이고 충만한 삶이다.

 

보퉁은 약간의, 그렇지만 이미 독서와 생각이 생활화된 이들한테는 전혀 새로울게 없는, 통찰들로 양념된 그럴듯한 미문들로 자신들의 현재 교양수준과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할 정도의 어려운 책들에는 관심이 없는 대중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의 책들이 얻고 있는 인기는 본질적으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같은 책이 얻고 있는 인기와 별 차이 없다. 사색에도 키치가 있다면 바로 보퉁의 사색이, 그 미문과 더불어, 키치다. 보퉁을 넘어서는 방법은 간단하다. 더 어렵고 덜 동감되고 먹물들 사이에서 더 인정받은 책들을 읽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