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 대선의 투표율이 70퍼센트 중반을 넘기며 2000년대 이후 최고 기록을 수립하며 마감했을 때, 문재인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진보, 보수를 통틀어 얼마나 될까? 모든 그림이 제대로 착착 들어 맞고 있는 것 같았다. 안철수는 마지막 광화문 유세에 전격 등장하여 문재인에게 목도리를 손수 걸어주고 서로 포옹하면서 단일화를 최종적으로 완성해 주었고, 윤여준이라는 거물 보수 정객은 유화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언어로 중도 부동층의 표심을 움직일 수 있는 결정적인 지지 연설을 해주었다.  지난 총선 정국에서 정치 생명이 끝난 것 같았던 이정희는 검투사의 역할을 자청,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사퇴해 주면서 문재인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복권이 가능할 듯이 보였다. '망가진 경제나 민주주의는 되돌릴 수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가는 여중생의 목숨은 되돌릴 수 없다' 며 눈물로 호소했던 김여진의 마지막 찬조 연설은 정권 교체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장 진솔하고 울림 있게 전달한 이번 선거 운동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였다. 

반면 상대편은 침몰 직전의 거함에 올라탄 선원들의 마지막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국정원을 동원한 인터넷 여론 조작이 드러나기 일보 직전이었고, 손수조, 김성주 같은 여자들은 대놓고 공중파 방송에서 국회 의원직을 강탈 당했다느니, 민주당은 빨갱이당이라니 저주를 퍼부으며 막장 인신 공격과 저질 네거티브를 노골적으로 시전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이 막장 네거티브로 기울면 기울수록, 이쪽의 확신은 더 강해졌다. 우리는 더 흐뭇해졌다. 왜냐하면 저주와 분노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의 이면이고, 그 불안의 근원에는 강한 열패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집단적인 확신이 말 그대로의 집단적인 '멘탈 붕괴'로 이어지는 데는, 투표 종료 이후 수 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실현될 환희에 젖어 있던 진보 개혁 민주 진영이, 이카루스의 운명적 시선 - 밀랍의 날개를 타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마지막에 추락하는, 즉 거꾸로 뒤집혀져 미끄러지는 세상을 허망하게 목도하며 끝없이 하강하는 이카루스의 현재성의 시선-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출구 조사 결과가 뜨고 나서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2. 
전통적인 대선 방정식에 덧붙인 야권의 희망 방정식이 야권의 바램대로 잘 들어 맞은, 분명히 승리의 조건에 다가간 결과였다. 야권은 희망했던 대로, 30퍼센트 수준에 그쳐 있었던 부울경과 경북의 지지세를 35~40 퍼센트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강고한 지역 대결 구도 속에서 박정희 카리스마와 일체된 영남의 수구적 지역주의 유권자들의 몰표를 가장 강력한 우군인 호남 지역 유권자들이 이번에도 90퍼센트 가까운 지지세로 버텨주는데 성공했다. 거의 호남을 버리는 지역으로 방치했던 여권의 지난 선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박근혜의 호남 공략은 역사상 그 유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 지역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김대중이라는 또다른 카리스마적 리더를 통해 자신의 지역적 정체성과 결합시킨 진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근혜는 분명히 호남 지역에서 절반의 성공 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 성공은 문재인의 부산/경남 공략 성공에 상쇄되고도 남는 것이었다. 

3. 
문재인은 다른 곳에서 패했다. 그는 호남과 영남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지 않았지만, 수도권과 중원, 그리고 강원 지역에서 패했다. 수도권에서는 서울 경기 인천을 통틀어 5퍼센트 이상의 격차를 벌려야 하는 최소의 승리를 따내지 못했으므로 그는 패배했고, 충청권에서는 수도 이전의 최초 디자인을 설계한 정치 세력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충청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함으로서 패배했고, 강원에서는 DMZ 안의 동계 올림픽 공동 개최라는, 교류 확대를 통한 북한 개방 정책 - 햇빛 정책이라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 -의 강력한 지지자인 나조차도 의아스럽게 만드는 정책 레토릭이 흘러나오게 방치함으로서, 안보가 가장 민감한 이슈일 수 밖에 없는 강원 유권자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강원도는 최근 2~3 년간 지속적으로 범진보 진영에 정치 권력을 부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 실수는 더 뼈아픈 것이다.  

 4. 
그는 지역에서만 패배한 것이 아니다. 팽팽하던 세력추를 결정적으로 기울게 만든 요인이 '50대 중후반, 수도권, 특히 여성 유권자' 들의 유래 없는 결집에 있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 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이 유권자 그룹은 '보수의 잠재적인 지지층의 동원력은 이미 먼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투표율이 70프로를 넘어가게 되면 야권과 비교해서 일찍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 이라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선거의 절대 법칙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그네들은 보수 세력의 새로운 수레바퀴가 되어서 보수에게 다시금 정치 권력을 안겨주었다. 50대의 90퍼센트라는 경악할 만한 투표 참가율과 20대의 65 퍼센트라는 참가율의 대비만큼 이번 대선의 특이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 있을까? 더 놀라왔던 것은, 이렇게 단단하게 결집되어 있었던 유권자 집단이 그 동안 인터넷과 기존의 매스 미디어 같은 다양한 방식의 공론장을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 한 번도 관찰된 적이 없었고, 여론 조사 분석을 통해서도 제대로 포착된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결집되어 있었지만 입을 닫고 있었던, 공론장의 조명 바깥에 있었던 어둠 속의 사람들이었다. 최신의 집단적 의사소통 수단으로 무장한 유명 연예인들과 수 많은 개혁적 청년 유권자들이 sns,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젊은 세대 전체의 감성을 건드릴 정도로 활발히 투표 독려 여론을 투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대의 투표 참가율이 그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이런 사실은 매우 경악할 만한 것이다. 바로 이 침묵의 집단이, 노년을 앞둔 중년의 정치성이 이렇게 강렬하게 폭발했던 적이 있었던가? 

 5. 
기억을 거슬러 보면, 아직 정치를 시작하기 전의 안철수가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계기는 바로 법륜, 박경철 등과 함께 했던 청춘 콘서트였다. 제법 규모가 큰 공개홀에서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이 저명한 인사들은 자신의 겪은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또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성공한 '젊은 기성 세대'와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지고 있는 듯한 청년 세대' 간에 새롭게 시도된 이 자유로운 대화 형식은 주지하다시피, 많은 젊은 세대들의 감수성을 건드렸고, 또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짐작컨대, 젊은이들은 그 명사들에게 자신의 각박한 삶을 개선시키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바랬다기보다는, 자신들의 고민과 문제가 공개적으로 공유되고, 이것이 어느 정도 공적인 공간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 자체에 열광했던 것이다. 

 6.
투표장으로 몰려 나온 50대 '줌마' 혹은 '저씨' 부대들과 안철수의 청춘 토크 콘서트의 장면이 겹쳐지면서 하나 더 필자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독일에 살면서 티브이를 가끔 보다보면 심심치 않게 청춘 토크 콘서트와 비슷한 토크쇼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스튜디오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청년 보다는 중장년이나 노년층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새로 바뀐 노동법 때문에 일찍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중년 아줌마가 방청석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사연, 고통과 억울함을 울먹이며 호소하면, 다른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그 박수가 끝나면 다시 게스트로 초대된 전문가, 정치인 등등이 대화를 나누고..대강 이런 식이다. 말 그대로 '중년 콘서트' 인 셈이다. 독일 방송에서는 흔치 않게 목격했던 방송 장면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방송에서는...중년 세대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들에 관해 토로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본 별로 기억이 없다. 아침 프로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년 부부들의 대화의 주제는 부부 사이나 건강 혹은 자녀 문제나 혹은 신변 잡기를 논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늙어가는 기성 세대들은 그런 자리에 나와 자신의 사회 경제적인 처지와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고민을 토로하는 것 자체를 어색해 하고, 또 수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장면이 교차했을 때 든 생각은 어쩌면 우리나라 50대 줌마들, 혹은 저씨들에게도 청년 세대가 필요로 했고 요구했었던 그 힐링의 장, 즉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관한 공적인 토로의 장을 똑같이 목말라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정희가 아무리 '박근혜는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해서 일본군 장교로 부역한 독재자 박정희의 딸' 이라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려고 노력했을지라도, 그네들의 입장에서는, 연령상으로 자신과 비슷한 '시어머니뻘'의 박근혜가 바로 방송토론을 통해 자기 면전 앞에서  '며느리' 격의 이정희에게 생생하게 면박 당했다는 현실-얼핏 이해가 안되는 상상적인 현실-이 훨씬  모욕 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응집된 한은 어찌보면 그네들이 정치적으로 한번도 타인들에게- 즉 자기 남편 세대나 자식 세대로부터- 제대로 된 발언의 권리와 경청의 권리를 누려 본적이 없다는 점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3자 토론의 한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정희가 아니라 마음씨 좋게 생긴 심상정 아줌마였다면..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7. 
생각해 보면 정치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것만큼 포괄적이고 전인격적인,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불분명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대상도 없다. 정치적인 감수성은 일반적인 감수성처럼 특정한 분야에 대한 실천적 관심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개인의 취향 같은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감수성은 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정치인과 정당이 제시하는 여러 정책들에 대한 개별적 입장들의 총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정치적 감수성은 다른 감수성들보다 더 근원적이다. 그것은 특정 정책과 정치인, 혹은 정치 세력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넘어서 존재하는 선험적인 두 가지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그것은 한편으론 '내가 속한  집단'와 관계하는 다른 집단들에 관한 포괄적 인정/반인정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주체인 '나'를 둘러싼 여러 환경들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적응 태도- 순응적 적응이냐 아니면 비판적 적응이냐- 속에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준에서 존재하는 정치적 감수성은 현실의 정치와 정책에 관한 이해가 전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확고한 형태로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수준의 정치적 감수성은 이것은 현실 정치나 정책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 관계 없이,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독립적으로 폭발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역주의라는 정치적 감수성은 영호남과 관계 없이 바로 이러한 선험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치적 감수성의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8. 
50대 (여성) 유권자들이 갑자기 '정치적으로 활성화' 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번 박근혜로의 쏠림 현상은 정책적 수준이 아닌 바로 그 저변에 깔린 정치적 멘탈리티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박근혜의 성적 정체성 - 비록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고, 따라서 시월드도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과 나이가 중년층 여성들의 묵언의 동일감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그만큼 중년 여성들의 집단적 상실감이 컸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정희가 토론에서 보여준 적대적인 모습은 그네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연령 집단의 정체성, 즉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껴 있는 자신 세대의 삶의 가치의 전체적 부정이라는, '인정 관계의 치명적인 손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9. 
보편/선별적 복지나 경제 민주화의 문제보다는 문재인이 내세운 대북 정책이 대선 국면에서 그렇잖아도 중도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50대의 표심- 아마도 이 쪽으로 끌어올 수도 있었던 표심-을 떠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변수 였다는 주장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박근혜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명박과 5년 내내 차별화 하는 전략을 펼치면서 시대 정신을 리드하지는 못하지만, 철저한 팔로어로서 시대 정신을 따라가는 제스쳐를 일관적으로 취해 온 것이다. 디테일한 내용과는 상관 없이, 자신이 정치를 하는 이유가 복지에 있다고 말하고, '생애 주기형 맞춤 복지' 론을 들고 나왔을 때는 골수 반새누리 주의자인 나조차도 박근혜에 대한 매력이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이 '사람이 먼저다' 라는 문재인의 캐치 프레이즈보다 훨씬 더 참신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었음에 분명하다. 아울러, 이번 대선을 진보 진영이 승리했던 다른 두 번의 대선과 비교해 봤을 때 두드러지는 것 중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충청권을 공략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야권이 못해서라기 보다는 박근혜가 이미 세종시 지킴이로서 이미지와 프레임을 야권에 앞서 선점하여 충정지역 유권자들에게 현 정권 내내 자신을 '정권 연장자'가 아닌 '충정 이익 지킴이'로서 각인시켜왔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이번 대선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패스트 팔로워로서의 박근혜의 탁월성- 그 제스쳐의 진실성은 논외로 하고- 은 경제 민주화의 문제에서도 나타났다고 보는데, 지난 총선 이후 김종인을 영입하면서 이미 야권이 온전하게 소유했어야 할 개혁적 프레임을 같이 공유하는 구도가 되고 말았다. 기존 순환 출자 구조의 해소 혹은 의결권 제한까지 갈 것이냐 아니면 신규 순환 출자만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냐의 문제는 분명 경제 민주화론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사안이지만, 유권자들에게는 이미 '경제 민주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만들어진 여러 입장들 중의 '하나'라고 각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0. 
모두 동의하리라 보지만, 이번 선거는 여권 뿐만이 아니라 야권 역시 모든 역량을 총결집 해서 치뤘던, 사실상 헌정 사상 최초의 대회전이었다. 이것은 우울한 결과 두 가지를 함축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이번 선거 자체가 기존의 민주당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사실상 야권이 완전히 통합된 채로 치뤄진 선거 였기 때문에, 민주당의 틀을 벗어나는 더 큰 형태의 정당- 혹은 국민 연대를 결성한다고 해도, 지금 이상의 지지세를 결집해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여기에 화력을 더할 수 있는 야권에서 동원할 수 있는 파괴력 있는 새로운 인물들이 - 손석희 정도만 제외하고서-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이번 선거는 안철수로 대표되는 중도 성향의 신진 개혁 세력과 진보 정의당, 통합 진보당으로 대표되는 노동 중심의 진보 세력이 민주 통합당에 결합, 역시 올인한 선거 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번 패배는 야권 전체에 엄청난 충격파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우울한 조건은 앞으로 5년후 치뤄질 다음 선거에서는 50대로 유입되는 새로운 인구층이 100만 이상 더 늘어나고 그만큼의 수가 젊은 세대에서 빠져나간다는 인구 지정학적 사실이다. 만약 다음 선거에서도 이번 만큼의 세대결이 이루어진다면- 예상컨대, 지금과 같은 초대 규모의 세결집이 일어날 가능성이 70퍼센트 이상이라고 본다- 지금 현재의 우리 지지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적으로 50대의 수도권과 중부권의 중도 성향 세력을 우리쪽으로 이끌어오지 못하는 한, 진보 개혁 세력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11. 대안은 없는가? 

첫째. 대북 정책에 관한 단계 조절론. 필자는 글 서두에 밝혔다시피 김대중의 북한 개방 유도 정책의 강력한 지지자이다. 개방 유도 정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인 미래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정책이자 비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은 결코 녹녹치 않다. 안보의 우산 속에서 서로 적대하는 세력이 대치하고 있을 때, 공포감에 기인한 적과 나의 심리적인 균형 감각은 그 대치의 성격이 영원 불변한 고정된 것이라는 착시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많은 수의 보수 우파와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은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 즉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북한의 도발이 한 건도 없었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승전하였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오히려 북한의 도발은 더 심해졌고 피해도 악화되었다는 사실- 는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사실상 보수 진영이 북에게 끊임없이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적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환시키는 정치 세력에게 안보를 맡겨야 그 적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철의 환타지에 빠져 있다. 이것이 대선 국면에서 파괴적인 이유는, 이러한 수사가 수구나 보수 진영을 넘어서 상당수의 중도층의 표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취임식에 김정은을 초청할 계획' 이라는 (확실하지 않은) 문재인의 공약은 많이 뜬금없는 것이었고,  취임 1년차에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5년에 한 번마다 정권 교체의 위험을 안고 가는 우리 헌정 제도 구조 하에서 정상 회담이 늦게 이루어지면 남북 정상간 합의의 실효성 있는 후속 조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문재인의 실제적인 경험에서 우러 나온 산물이긴 하지만, 역시 유권자들의 눈에는 성급한 액션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 5년을 맥시멈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다음 정권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다는 전제 하에 10년 정도의 기간을 설정하고, 방향은 확고하게 설정하되 속도는 국민 눈높이에 맞게 조절하겠다는 인식을 유권자에게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본다. 북한을 교류 확대를 통한 호혜적 개방으로 이끄는 정책은 북한에게 퍼주는 것이 결코 아니며 우리의 경제지표 또한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와중에 필요하다면 이 과정에서 남북간 경제 협력과 교류 확대에 관해서는 여야 동수로 합의제로 구성되는 결정 기관을 따로 두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액션이었다. 

 둘째. 세대간, 지역간 유권자들의 정치적 이해 관심을 구체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맞춤 공약들을 개발할 것. 특히 충청권과 수도권의 표심은 우리가 새누리당보다 반발 앞서서 가져간다는 마음가짐을 항상 가지고 있을 것. 이것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지역별, 세대별, 소득별, 직업별로 균형 있게 취합된 최소 3000명 이상의 유권자 집단을 대상으로 장기적인 사회 심리학적인 질적 연구 조사 프로젝트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이 조사의 기본 목적은 단순히 정책간의 선호도를 기계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어떤 이슈나 정책에 관해, 정치인의 언행 등등에 관해 어떻게 반응하고 평가하는지에 대한 심리적인 추이의 분석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번 대선의 가장 특이하면서 결정적인 변수 였던 50대 수도권 (여성) 유권자들의 사회 심리에 대한 조사 분석이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앞으로 5년 후 있을 다음 대선을 지금부터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셋째. 범야권이 모두 연합하여 지금까지 묻혀 있던 기성 세대의 정치적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 낼 것. 인터넷과 sns 로는 중장년층의 고민을 읽어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이번 선거를 통해 분명해 졌으리라고 본다. 범야권의 지지자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뼈아픈 실책은 박근혜를 선호하는 유권자들의 집단 심리를 인터넷상의 극히 한정적이고 극단적인 여론장(일베 여론이나 넷우익으로 대표되는) 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이상 범야권이 이런 집단적인 착시 현상에 갇혀서는 안된다. 나꼼수의 활약상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지만 나꼼수가 갖는 B급 진영적인 정치 담론의 한계 역시 보수 세력에 대한 야권의 유권자 전체의 시야 확대를 가로 막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공론장 설립이 다시 한 번 필요하다. 공론장 설립의 목표는 온건한 보수 세력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게 해서 공론장 안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들과 성공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만이 지역간 대립 구도와 세대간 대립 구도에서 열위를 차지하고 있는 진보 개혁 진영의 핸디캡이 극복되고, 개혁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 일 수는 새로운 기성 세대 지지 세력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이들은 그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더 보수적인 집단의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지지점이 될 수 있다. 설득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설득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말하게 하고, 또 그것을 먼저 인정해 주는 것이다. 누가 주최가 되었든, 안철수가 시도한 청년 콘서트 뿐만 아니라 여러 포맷의 중년 콘서트, 그리고 노년 콘서트들이 언제 어디서든 수시로 열릴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어떻게든 진보 진영의 자본을 모조리 끌어 모아서 진보 성향의 종합 편성 채널 방송국을 새롭게 설립하는 것이다. 생생함과 강렬함에서 영상 매체가 유권자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은 활자 매체(그것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의 그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넷째. 세력 물갈이론에만 매몰되지 말 것. 인적 쇄신론이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자기 세력뿐 아니라 다른 세력들까지도 동의할 수 있는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비판 원칙을 세우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비판할 것. 예컨대, 정책 실무 개발자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 실례로, DMZ 내 올림픽 공동 개최라든지 아니면 임기 1년 내 남북 정상 회담 같이, 대선 후보의 안정적 이미지의 구축 실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공약의 제안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것이 아니라 이런 정책적인 이유가 아닌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그 책임을 묻는 쪽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이유 때문에, 왜 물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는 것이 맞다.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물러나라라는 식으로 몰아치는 것은 잘 이해도 되지 않을 뿐더러, 범진보 진영의 쇄신에 전망적이지도 않고, 진보의 분열만 부추기는 것이다. 달콤한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단일화된 보수 진영이 다시 언제 분열할 지는 지금 단계에서 누구도 알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할 진대 어떠한 비젼과 구체적인 대안 없이 인적 심판론, 물갈이론만 가지고 야권 혁신에 성공한 사례가 단 한건이라도 있었던가? 개혁 성향의 유권자들이 현 상황에서 절실히 원하는 것은 빈 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지' 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을' 변화시키겠다는 문제 의식의 공유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