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있던 날, 투표 전에 조조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봤습니다. <오페라 유령>의 감동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 뮤지컬 영화에 대한 기대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초강추합니다. 제가 본 영화 중에 최고였다고 생각되네요. 영화가 끝나자 저절로 박수가 나오더군요. 내가 지지한 후보가 설혹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레미제라블>이 다 보상해 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여운 탓인지 이번 주는 내내 출퇴근 전철에서 유튜브에 올라온 원작 뮤지컬(2010년에 공연한 25주년 기념공연 실황)을 듣고 다녔습니다. 주말에는 2시간 반에 이르는 원작 뮤지컬을 또 한번 full로 들었구요.


영화가 시작하자 저는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일지, 반전의 복선은 어디에 있을까 부터 이 영화를 찍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라는 속물적 계산까지 영화를 분석하는 나쁜(?) 버릇이 예의 발동했습니다. 그런데 10분 정도가 흐르자 저는 이런 나쁜 영화읽기를 포기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영화에 녹아 몰입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원작 뮤지컬을 영화한 것이라 주요 장면별 중심의 포맷을 그대로 이용해서 그런지 2시간 반이라는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의 전개가 스피디해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거기에다 노래 부르는 주인공 중심으로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는 것도 몰입하기에 뮤지컬보다 훨씬 나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뮤지컬은 무대의 한계를 가지지만, 영화는 이런 한계가 없어 단순 노래만이 아닌 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고  배우의 연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노래로 전달되어 관객의 감정이입이 훨씬 높아지더군요. 뮤지컬에서는 배우들의 노래나 무대 장치로만 스토리를 이해할 수밖에 없고 스토리 이해를 위해 시간과 감각을 할애하게 되어 노래의 몰입을 방해받는 면이 있습니다. 반면 뮤지컬 영화는 연기가 곁들여져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노래 듣기와 스토리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어 한층 감상을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톰 쿠퍼 감독의 탁월한 선택 - I dreamed a dream의 뒤 배치>

판틴(앤 해서웨이)이 애절하게 부른 <I dreamed a dream>이나 <Come to me>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다른 연인과의 사랑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 사랑을 지켜주는 에포닌(사만다)의 빗 속의 <On my own>은 눈물나게 합니다.

판틴의 <I dreamed a dream>은 원작 뮤지컬에서는 판틴이 직장에서 해고된 직후에 판틴이 부르지만, 영화에서는 판틴이 해고되고 생계와 딸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사창가에서 몸까지 판 후의 처참한 극단의 상황에서 판틴이 부릅니다. 이 단순한 노래의 뒷물림(재배치)은 톰 쿠퍼 감독의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습니다. 원작 뮤지컬에서의 <I dreamed a dream>을 들은 느낌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물론 영화가 앤 해서웨이의 연기가 곁들여졌다는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노래를 조금 더 뒤로 물려 인생의 바닥까지 다다라 희망마저 품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상황에서 과거에 꾸었던 꿈을 이야기함으로써  애절함을 극대화시키도록, 그리고 그 애절함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한 것은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장발쟝의 ‘Who am I’>

이 영화에서는 <I dreamed...>나 <On my own> 외에도 <Look down>, <Red & Black>,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등 함께 따라 부르고 싶은 웅장한 노래들도 많습니다만, 저는 장발쟝(휴 잭맨)의 <Who am I>가 또 다른 차원에서 다가왔습니다. 장발쟝을 24601(죄수번호)로 의심하던 쟈베르 경감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장발쟝(죄수번호 24601)으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장발쟝은 갈등과 고뇌에 빠집니다. 자기가 자수를 하여 그 사람의 누명을 벗기게 된다면 자기가 거느린 수많은 직공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자기가 자수를 하지 않으면 자기는 살고 그 사람은 누명을 쓰고 죽게 될지 모른다는 딜레마에 빠졌을 때 갈등하는 장면에서 이 노래가 나옵니다. <Who am I>. 결국 장발쟝은 그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은 자수하려 법정으로 나가게 되지요.

저는 장발쟝이 <Who am I>를 노래할 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지만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장발wid이 아니라 제가 제 자신에게 <Who am I>라고 묻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무엇 때문에, 무엇을 묻는지, 무엇이 답인지 이런 것은 필요 없었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고 영적 경험을 한 바도 없습니다만, 이런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이 구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순간 하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것, 이것이 구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러한 생각은 이번 주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되었고 장발쟝의 선택(자수)에 대한 숙고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엉뚱하게 마이클 샐던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의 예로 든 ‘철로를 이탈한 전차’와 ‘아프카니스탄의 양치기’가 생각났습니다. 장발쟝의 딜레마(자수하여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수하지 않고 어려운 직공들을 살릴 것인가)와 마이클 샐던이 예로 든 서로 다른 정의간의 충돌에서의 딜레마와 유사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철로를 이탈한 전차’는 마이클 샐던 말고도 논리학에서 많이 인용된 것이라 설명을 생략하고, 장발쟝의 처지와 유사했던 ‘아프카니스탄의 양치기’에 대해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미군 수색팀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 탈레반 은신처를 수색하던 중에 양을 치는 소년을 만납니다. 이 수색팀은 이 양치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논의하지만 팀장은 팀원들이 양치기가 탈레반에게 알릴 수 있음으로 죽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양치기가 그렇지 않을 수 있지 않느냐며 살려서 풀어줍니다. 그러나 이 양치기가 탈레반에 수색팀의 접근을 알려 수색팀은 탈레반의 기습으로 16명의 전우를 잃고 구조하러 온 헬기 1대도 격추당하게 됩니다. 양치기를 살려준 이 수색팀장은 큰 부상을 입고 살아났지만, 당시의 자기 결정에 큰 후회를 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수색팀의 안전을 위해 양치기 1명을 죽이는 것이 나은 것인지, 1명의 무고한 희생은 천부의 인권에 반함으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두 가지의 정의가 충돌한 경우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지를 마이클 샐던이 물은 것이죠. 과연 여러분들은 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에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머리로서 이해하고, 제 자신의 선택에 대한 합리화 논거를 찾는데 골몰했던 기억이 납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쟝의 <Who am I>를 듣고서는 왠지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만 찾으려 했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 설득하는 수단, 내 선택을 정당화 하는 수단, 내 양심의 변명거리를 만드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되돌아 보게 되더군요. 장발쟝의 <Who am I>는 제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게 했고 내면으로부터 큰 울림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장발쟝(빅토르 위고)의 용서와 자비, ‘26년’의 복수>

저는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를 생각하면서 그가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쓴 또 다른 작품 <93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마 레미제라블과 비슷한 시기에 조금 먼저 개봉되었던 5.18을 배경으로 한 <26년>과 오버랩 되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두 작품은 하나는 소설이고 하나는 영화이지만, 숫자를 제목으로 했다는 점과 민중의 저항을 배경으로 했다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93년>은 프랑스대혁명기인 1793년의 방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결여한 이념과 사상의 공허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자비와 용서로 문제를 해결하는 레미제라블이 던지는 메시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26년>도 ‘복수’가 아닌 장발쟝의 용서와 자비를 매개로 했었더라면 어떠 했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습니다. <26년>과 <화려한 휴가>가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93년>이나 <레미제라블> 같이 5.18도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용서, 자비, 화해의 관점에서 한번 다루어 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것일까요?


<가혹한 정의, 쟈베르 경감>

아직도 ‘나쁜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앙시앙레짐의 충실한 수호자로 나오는 쟈베르 경감도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자기 자신이 믿는 체계, 자기가 믿는 정의에 따라 쟝발장을 추적하고 앙시앙 레짐의 법 아래 처벌하려하는 쟈베르 경감, 그를 보면서 문득 5.18 전남도청 진압에 직접 참가했던 사촌형이 생각났습니다. 쟈베르 경감은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 신념을 관철하고, 저의 사촌 형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그 현장에 투입되었던 것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인간이 내몰릴 수 있는 극단의 순간에 있었던 것은 비슷하다고 보여집니다. 사촌 형은 제가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시의 경험에 대해 극히 말을 조심스럽게 했습니다만, 저는 그 짧은 이야기에서 사촌 형도 시대의 피해자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본인의 의사(자유 의지)와 무관했던 과거의 행위로 인해 자기 삶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역사의 죄인일까요? 운이 나빴더라면 저나 여러분의 형제들이 사촌 형 대신에 그 현장에서 광주시민과 맞다뜨리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5.18이 장발쟝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작품이 나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질곡의 역사를 직접 거둔 사촌 형의 삶 앞에 겪어 보지도 못하고 그 현장에 내 자신이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로만, 그리고 글로 그것을 대상으로 삼았던 제가 조금 편안해질 수 있겠다는 제 자신의 욕심이라고 비난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동화 장발쟝, 그리고 닥터 지바고>

저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기 전에는 빅토르 위고의 원전 레미제라블을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 동화로 나온 ‘장발쟝’을 읽은 것이 전부였지요. 제가 만약 ‘장발쟝’을 읽은 것으로 레미제라블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영화 레미제라블은 뭐 별 것이냐고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을 후회했을 것 같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동화 ‘장발쟝’으로 나와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레미제라블을 이해하기에는 초등학생, 아니 중등생들도 쉽지 않고 그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제가 중딩생들을 너무 과소 평가하나요? ^*^)

저는 영화 ‘닥터 지바고’를 고등학교 때 처음 보고, 20대, 40대에 TV를 통해 다시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닥터 지바고'는 기차가 설원을 가로 지르면서 달리는 아름다운 장면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20대에는 영화의 주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러시아 혁명을 해석하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40대에 본 '닥터 지바고'는 사랑과 인생이 심중으로 들어오고 영화가 참 잘 만들어졌다고 비로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레미제라블을 보고 <Who am I>, <I dreamed a dream>이나 <On my Own>에 더 감동하고 기억하는 대신, 훨씬 웅장했고 선동적이었던 <Look down>, <Red & Black>나 <Do you hear the people sing>에 감동이 덜 했던 것도 40대에 본 ‘닥터 지바고’의 감정과 유사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아집만 늘고 보수적인 꼰대가 된다고 합니다만, 켜켜이 쌓인 경험으로 인생을 관조하고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는 것도 20~30대가 보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레미제라블에서 민중의 혁명을 읽어내고 좌절한 혁명에 분노와 재기의 다짐을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용서와 화해로 이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가지의 시선이 서로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순수함이 퇴색하고 초심을 잃고 변절한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순수함도 그대로고 초심도 그대로이다. 그 위에 인생이 더해져 얹어졌을 뿐인데 남들이 순수와 초심이 인생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을 변절이라고 부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