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한지 얼마 안되는 어떤 분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회사를 대표해서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에게 절을 하고 상주와 마주앉아 덕담을 늘어놓는 의례적인 행위들.

그 분은 아버님과 자신의 삶을 나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분의 70년생애를 요약한 몇 문장을 가슴에 새기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해 보곤 합니다. 만일 내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어렸을 때 외로왔고, 젊었을 때, 방황했으며, 나이들어서도 정신 못차리고 있다?

나도 모르게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더군요. 웃으면 안되는 자리인데 말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홀로 월남해서 오로지 자식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가다가 두 자식 모두 외국에 있는 동안 돌아가신 외로운 분이라고.

지사에 근무하던 분이라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제 아침 비행기로 겨우 올 수 있었고 자신의 동생은 아예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정말 외로우셨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잘 자라줘서 뿌듯하셨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는 의례적인 회사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빈소였기에 찾아간 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아버지를 기억못합니다. 제가 돌이 지나자 마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아버지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아들들은 아마도 아버지를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집에 와서 잠들어 있는 큰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요즘 부쩍 짜증이 늘어서 제게나 엄마에게 덤벼들곤 합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데. 그리고 애기엄마는 가끔 하소연하고 합니다. 애가 말을 안들어서 속상하다고. 그래서 아들에게 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와이프에게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이렇게 애들이 말 안듣는다고, 속썩인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라고. 그러다보니 엄하게 말해도 잘 통하지 않을 때가 많죠. 눈치가 빨라서 아빠가 진짜 화내는 것은 아닌 걸 벌써 알고 있거든요. 

나중에 아이들이 아빠를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 중 얼마만큼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큰 애는 벌써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서울 오기 전 밤마다 걸음마를 하던 자신과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놀았던 그 시간들. 하루라도 나가지 않으면 나갈때 까지 울면서 손을 잡아 끌었던 그 모습들. 놀이터의 붉은 나트륨 등 아래에서 그네를 타고 모래놀이를 하던 그 시간들은 전혀 생각조차 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죽으면 그 시간들과 기억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요. 그러면 그 아이는 아마도 자신이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 아버지를 이야기하겠죠. 그때쯤이면 그 아이는 어쩌면 아버지에게 너무 실망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니까요.

그러나 내게는 이미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미 네게 받아야할 것들은 그 때, 그 놀이터의 붉은빛 가로등 아래에서 함께 흙장난을 하며, 미끄럼틀을 타며 다 받았다고. 그 행복한 기억들을 넌 가져가지 못하지만 내게는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고. 그래서 행여, 니가 내게 실망하고 나를 미워하는 시간들이 있을지라도 나는 영원히 네 존재 자체를 고마워하며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이 아이가 커서 아마 이 글을 읽지는 못하겠지요. 그래서 아빠가 다들 잠든 새벽, 2009년 12월 6일 새벽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잠든 자신을 들여다 봤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게 자식과 아버지가 가지는 보통의 모습이겠죠. 그리고 아버지들은 그 보통의 모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구요.

어제 돌아가신 그분의 아버님도 어쩌면 외롭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아들들의 어린 시절을 그리며 편안하게 미소지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저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놀이터에서 넘어져 울먹이는 녀석의 얼굴, 아침에 출근할 때면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난간에 매달려 울던 녀석의 울음소리, 그리고 퇴근 길에 문구점에 들러 값싼 장난감이라도 사오면 세상을 다 가진듯이 빛살처럼 웃으며 달려와 안기던 녀석의 얼굴과 웃음소리....... 난 다시 그 시간대로 돌아가 편안하게 웃음지으며 눈을 감을 거 같습니다. 녀석이 절대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들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슬며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갈 거 같습니다. 녀석은 그 웃음의 의미가 궁금하겠지요. 그러나 그 비밀은 녀석이 다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새벽녘 누군가의 아버지의 빈소를 찾았다가 돌아와 잠든 자신의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볼 때까지 감춰져 있을 겁니다.

그건 세상의 아버지들만이 가지는 비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