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강사로 강단에 선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불안감은 파올로 프레이리의 <<교사론>>이란 책을 읽으면서 달래질 수 있었습니다. 프레이리는 브라질의 교육 운동가로 우리에겐 <<억압된 자들의 교육학>>으로, 혹은 "억압된 자들"이란 용어는 탈락되고 그저 <<교육학>>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사론>>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냉소적이지 말 것"이란 교사의 덕목이었죠. 마치 교사 자신은 자신이 냉소를 보내는 사건 혹은 세계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듯, 제 3자의 입장에서 사회를, 세계를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죠. 만약 교사가 학생들에게 "냉소"를 가르친다면 (물론, 교사는 "냉소"를 통해 세계를 읽는 "냉철한 시선"을 가르치려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학생들은 세계를 제 3자의 입장에서만 보게되고,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재앙들에 대해 한 번 "차갑게 웃고(冷笑)" 마는 태도만을 배우게 되겠죠. 말 그대로, "쿨"한 것이 좋을 수도 있어서,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고받고 쿨하게 헤어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떠나지 않는 이상, 이 세계에 살면서 쿨해질 수 있는 방법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뭐, 그 재앙들이 자신에게 닥쳐오더라도, 그 재앙이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자신을 제 3자의 눈으로 보는 방법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정신분열증 쯤 되겠네요. 추락하는 자기 자신과 그 추락을 지켜보는 자기 자신으로 분열된다고 보면 됩니다.

쿨해 보이는 것, 혹은 냉소가 어떤 역할을 하기는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화~악하고 끌어 모은다는 것이죠. 강단에 선 선생이 멋있어 보인다는 것이죠.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화~악 하고 끌어모으는 것이 "냉소"말고, 풍자, 조롱, 비아냥이 또 있겠네요. "냉소"와는 다르게, 풍자, 조롱, 비아냥은 뜨겁습니다. 핫하죠. 그러나 "냉소"와 마찬가지로 제 3자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동일합니다. 풍자, 조롱, 비아냥의 대상이 되는 사건과 인물은 철저하게 풍자와 비아냥의 대상이 될 뿐, 풍자와 비아냥을 날리는 주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가정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풍자 혹은 비아냥이 냉소와는 다른 것이 비아냥을 날리는 그 주체가 비아냥의 대상과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유머(humor)입니다. 어떤 대상을 비웃었더니, 알고 보니까,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죠. 풍자, 비아냥은 여전히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유머는 비웃음의 대상이 된 자기 자신을 보면서 웃는 것이죠.

노정태가 루저의 난에서 보였던 태도가 바로 냉소와 풍자 사이였습니다. 차갑거나 뜨거웠던 그 때까지는 그나마 봐 줄만 했겠지만, 루저의 난 토론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이메일에서, "따라서 인터넷에서 어떤 선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독자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낫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쓰고, "게다가 남자 네티즌들에게 직접 '그러지 맙시다'라고 말하는 게 훨씬 빨라요.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포스트를 썼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그는 미쳤다"라고 써도 무방할 듯합니다. "남자 네티즌"이라니요??? 루저의 난과 같이 쓰잘데기 없는 토론 같은거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하면 되지... "선한 글쓰기"라뇨? 조롱과 비아냥으로 점철된 글쓰기가 그님의 글쓰기 아니였나요? 전 몇 편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두 가지만 쓰고 글을 접도록 하죠.

들뢰즈는 풍자와 반대되는 스피노자의 글쓰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풍자, 그것은 인간의 무능력과 고통에서 즐거움을 얻는 모든 것이고, 경멸과 조롱을 표현하는 모든 것이며, 또한 비난, 악의, 과소 평가, 저속한 해석들로 영양을 취하는 모든 것이고, 영혼들을 파괴하는 모든 것(파괴된 영혼들이 폭군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폭군은 파괴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이다"라고 쓰네요.

마지막으로, 김수영의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에 대해서... 이건 그냥 한 번 허허허하고 한 번 웃자는 겁니다. 누이의 죽음에 대해 한 번 풍자라도 해보자 이거죠. 혹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 번 풍자라도 해보자 이거죠. 풍자가 안되면, 해탈하면 되잖아요? 이 때의 풍자란 제 3자의 입장에서 누이의 죽음을, 혹은 자신의 죽음을 풍자해 보려는 거죠. 근데, 그게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겠네요...

김수영의 시를 가져왔습니다.
<누이야 장하고나! - 新歸去來(신귀거래) 7> / 김수영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
너의 방에 걸어놓은 오빠의 사진
나에게는 '동생의 사진'을 보고도
나는 몇번이고 그의 진혼가를 피해왔다
그전에 돌아간 아버지의 진혼가가 우스꽝스러웠던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그 사진을 십년만에 곰곰이 정시하면서
이내 거북해서 너의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십년이란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팔월의 하늘은 높다
높다는 것도 이렇게 웃음을 자아낸다


누이야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
그의 앞에 엎드렸노라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니까
동생뿐이 아니라
그의 죽음뿐이 아니라
혹은 그의 실종뿐이 아니라
그를 생각하는
그를 생각할 수 있는
너까지도 다 함께 숭배하고 마는 것이
숭배할 줄 아는 것이
나의 인내이니까


"누이야 장하고나!"
나는 쾌활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광대한 여름날의 착잡한 숲속에
홀로 서서
나는 돌풍처럼 너한테 말할 수 있다
모든 산봉우리를 걸쳐온 돌풍처럼
당돌하고 시원하게
도회에서 달아나온 나는 말할 수 있다
"누이야 장하고나!"
-- (1961.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