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가치 중립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과학의 가치 중립성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양측이 동문서답하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 이유가 “과학의 가치 중립성”이라는 표현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의미와 논점을 명확히 하지 않고 논쟁을 벌이면 서로 오해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 표현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우선 당위의 측면과 사실의 측면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며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당위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반면 과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정하거나 연구를 할 때 실제로 가치에 영향을 받는지 또는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가치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따지는 것은 사실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당위의 측면에서 세 가지 논점을, 사실의 측면에서 세 가지 논점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 과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정할 때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을 무시해야 하는가? 또는 무시해도 되는가?

 

둘째, 과학자들이 과학 명제의 참/거짓을 가릴 때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을 무시해야 하는가? 또는 무시해도 되는가?

 

셋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또는 끼쳐도 되는가?

 

넷째, 과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정할 때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받는가?

 

다섯째, 과학자들이 과학 명제의 참/거짓을 가릴 때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받는가?

 

여섯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끼치는가?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당위의 측면에서 던지는 질문이고, 넷째부터 여섯째까지는 사실의 측면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논점이 “과학의 가치 중립성”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다 보니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과학자가 둘째 논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학의 가치 중립성을 옹호하고 있는데 사회학자가 다섯째 논점이라고 이해하고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동문서답이 된다.

 

 

 

 

 

첫째 논점 – 과학 연구 주제를 정할 때 가치를 무시해도 되는가?
 

한쪽 극단에는 과학자들이 어떤 주제도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과학자들은 진리에 근접하는 명제를 산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그것은 응용하는 사람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쪽 극단에는 연구 주제 선정을 누군가 항상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과거에는 신성모독으로 이어질 것 같은 연구, 또는 성적인 문제를 다루는 연구가 타부의 대상이 되었지만 현재에는 그런 것들은 거의 사라졌으며 논란이 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는 주제들이 있다.

 

첫째, 인간 파괴 기술을 직접 연구하는 것. 무기 산업이나 고문 기술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과학자들의 연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매우 괴롭게 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과학자들이 무기 산업이나 비밀 경찰에 고용되어서 이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좀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해 연구하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는다.

 

둘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에 어긋날 것 같은 연구. 인종이나 양성의 선천적 차이에 대한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된 연구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렇다. 만약 흑인이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IQ가 낮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 그것은 흑인 차별에 이용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여자가 남자보다 이공계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낮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 그것은 여성 차별에 이용될 수 있다. 게다가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과학의 탈을 쓰고 흑인 또는 여자가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는 명제를 주장할 수도 있다. 즉 사이비 과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런 연구 자체를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흑인의 IQ가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밝혀지는 상황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상당히 찜찜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그런 연구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미 흑인이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에 대한 응답은 과학적 연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적 연구 결과 진짜로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대로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논점 – 과학 명제의 참/거짓을 가릴 때 가치를 무시해야 하는가?
 

일단 연구 주제가 정해졌을 때 어떤 식으로 연구해야 하는가? 진리에 근접하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진리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하는가? 나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면 진리에 근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뭐 하러 하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은 강조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일단 주제가 정해졌다면 객관적 진리에 근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런 뻔한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진리 따위는 어찌되든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진리를 추구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을 무시하고 연구해야 한다. 즉 자신의 도덕적 가치나 이해관계에 부합해 보이는 명제가 아니라 객관적 진리에 근접하는 명제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은 여러분의 도덕적 가치나 이해관계에 항상 부합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런 것을 보장하는 신이나 수호 천사가 없다.

 

진화 심리학이나 행동 유전학과 관련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많은 사람들이 흑인이 백인보다 IQ가 선천적으로 낮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선험적으로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과학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며 오직 논리와 실증이라는 기준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인종 분화가 진행된 지난 5만년에서 20만년 동안 피부색, 얼굴 생김새, 키 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겉모습만 보면 인종 간의 차이는 서로 다른 종으로 분류되는 일반 침팬지(common chimpanzee)와 보노보 침팬지 사이의 차이보다도 더 커 보인다. 피부색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의 빈도가 인종마다 서로 달라질 때 IQ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의 빈도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서 없다. 인종간 IQ가 똑같아지도록 진화를 돌보는 수호 천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흑인의 IQ가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낮을 리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강간과 관련된 논쟁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강간이 적응일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강간의 적응 가설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 남자들 중에서 상황을 봐서 때로는 강간을 했던 남자가 그렇지 않았던 남자에 비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남자가 상황을 봐서 강간을 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 실제로 여러 종에서 그런 식의 자연 선택이 일어났다는 점이 이제는 명백해 보인다. 인류한테만 강간이 적응으로서 진화하지 않도록 진화 과정을 돌보는 수호 천사는 세상에 없다. 따라서 강간이 적응인지 여부는 순전히 과학적 기준으로 따져야 할 문제이며 선험적으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다.

 

나는 인종 차별과 강간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이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로 가서 진화 과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진화는 나의 정치적 입장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물리 법칙에 따라 무지막지하게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진화의 결과가 나의 이데올로기에 항상 부합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뻔한 것들을 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진리 따위는 어찌되었든 개의치 않기 때문인 듯하다. 과거에 일부 성직자들은 과학과 철학이 신학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성모독적인 결과를 산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현재에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정치적 올바름 또는 진보적 가치를 모독하는 결과를 과학이 산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도덕적 가치가 과학 명제에 투영되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또는 남몰래 믿는 경향을 도덕주의적 오류(moralistic fallacy) 또는 반자연주의적 오류(anti-naturalistic fallacy, “역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이며 “anti”는 부적절해 보이지만 넘어가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범하는 오류다. “신이시여 강간이 적응이 아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아무리 빌어도 과거 진화 과정이 바뀌지는 않는다.

 

 

 

 

 

셋째 논점 – 과학의 연구 결과가 가치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가 『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the Fullness of Life』에서 썼던 교권(magisterium, 敎權) 개념을 빌려서 쓸 생각이다. 여기에서는 과학의 교권과 도덕 철학의 교권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겠다. 과학의 교권은 사실 문제를 다루는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당위의 문제를 다룬다. 과학의 교권의 목적은 현상을 설명하는 것인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의 목적은 어떻게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를 따지는 것이다.

 

굴드가 주장했듯이 교권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즉 함부로 하나의 교권에서 다른 교권으로 넘나들면 안 된다. 도덕 철학의 교권의 명제에서 시작하여 무턱대고 과학의 교권의 명제로 직행하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 도덕주의적 오류에 해당한다. 과학의 교권의 명제에서 시작하여 무턱대고 도덕 철학의 교권의 명제로 직행하는 것을 보통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부른다.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무어(George Edward Moore)이며 그는 나름대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그가 정의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보통 이 용어는 사실로부터 부당하게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하며 나도 그런 의미로 쓸 것이다. 흄(David Hume)이 그런 오류를 비판한 적이 있다. 흄에 따르면 ‘is(그렇다)’에서 ‘ought(그래야 한다)’를 이끌어내는 것은 오류다.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무턱대고 이끌어내다 보면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 모두가 자연주의적 오류인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도덕 공리(axiom)와 도덕 정리(theorem)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수학자들이 어떤 정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을 증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수학 명제가 증명될 수는 없다. 수학자들도 증명을 포기하고 “그냥 옳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부딪친다. 수학자들은 그런 명제를 공리라고 부른다. 이미 2천여 년 전에 에우클레이데스(Εὐκλείδης, Eukleidēs, Euclid, 유클리드) 기하학이 정립되었는데 그것의 강력함은 공리 체계를 바탕으로 정리들을 증명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은 다섯 개의 공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마지막 공리인 평행선 공리가 말썽이었다. 수학자들이 보기에 이 공리에는 완전히 자명하다고 보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2천 년 동안 수학자들은 네 개의 공리들로부터 마지막 다섯 번째 공리를 유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수학자들은 다섯 번째 공리는 나머지 네 개의 공리들과는 독립적임을 밝혀냈다. 즉 네 개의 공리로는 다섯 번째 공리를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일부 수학자들은 다섯 번째 공리를 다른 식으로 바꾸어서 기하학 체계를 만들었고 그것은 비에우클레이데스(non-Euclidean,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비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이 찝찝한 기하학으로 여겨졌지만 논리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으며(만약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에 내적 모순이 없다면 비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에도 내적 모순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 등에서 쓰이게 되었다.

 

수학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도덕 공리라는 말을 누가 처음 쓰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헨리 시지윅(Henry Sidgwick, 1838-1900)이 이미 19세기에 썼던 것 같다. 나는 시지윅의 글을 읽어 보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의미로 도덕 공리라는 용어를 썼는지도 잘 모른다. 어쨌든 수학에서 쓰이는 것과 비슷하게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라는 용어를 쓸 생각이다.

 

도덕 공리는 “그냥 옳다”고 가정된다. 즉 정당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과는 상당히 다른 비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이 있듯이 도덕 공리가 서로 다른 도덕 체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 정리의 경우에도 증명이 필요하다. 물론 수학에서와 같은 엄밀한 증명이라기 보다는 유도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도덕 공리에서 도덕 정리가 유도되는 것이다.

 

모방자(meme) 개념은 유전자(gene)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서 만든 개념이다.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의 경우에는 매우 깔끔한 이론인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 집단 유전학)이 가능할 만큼 명료한 면이 있다. 반면 모방자의 경우에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그렇다고 나는 모방자라는 개념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라는 개념이 수학의 공리와 정리처럼 깔끔하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수학 공리와 도덕 공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래야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라는 개념의 한계를 명확히 할 수 있으며 개념을 남용하지 않을 수 있다.

 

첫째, 수학 공리에서 수학 정리를 유도하는 증명 과정은 깔끔하고 완벽하다. 반면 도덕 공리에서 도덕 정리를 유도하는 과정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도덕적 공리 체계가 양적인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보통 도둑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 목숨을 구하기 위한 도둑질(다른 방법이 없을 때)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둑질 자체는 나빠도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용납되는 것이다. 이 때 그 선한 목적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즉 양적인 문제가 개입된다.

 

둘째, 수학의 어떤 공리 체계에서 각각의 공리는 다른 공리들과는 완전히 독립적이다. 예컨대 어떤 공리 체계에 공리 A, B, C, D가 있다면 A, B, C에서 출발하여 D가 참임을 증명할 수도 거짓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 따라서 공리들 사이에 모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면 깔끔하지 못한 도덕 공리들 사이에는 상호 충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수학 공리는 매우 명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 반면 도덕 공리는 애매할 수 있다.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적응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에 분노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강간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은 강간을 설명한 것이지 정당화한 것이 아니다. 이 때 진화 심리학을 비난하는 페미니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로부터 항상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진화 심리학자들을 비난할 수 있었다.

 

강간이 적응이라고 하더라도 강간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번식 경쟁에서의 승리를 도덕적 이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마귀 암컷이 교미를 할 때 수컷을 잡아 먹는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을 모범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점점 똑똑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을 더 똑똑해지도록 만들겠다는 우생학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화의 방향을 우리의 도덕적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자연의 섭리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품어 보아야 한다.

 

한편에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문제를 해명하는 데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라는 개념이 쓸모가 있다고 본다.

 

사고가 났을 때 에어백이 오히려 어린이에게는 해가 된다는 연구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이 과학적 연구에서 출발하여 “어린이를 에어백이 있는 자리에 앉히면 안 된다”라는 규범을 이끌어 낼 것이다. 여기에서 사실(에어백이 어린이에게 위험하다)에서 당위(어린이를 에어백이 있는 자리에 앉히면 안 된다)를 이끌어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제: 사람을 정당한 이유 없이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도덕 공리).

소전제: 에어백은 어린이에게 위험하다(사실).

결론: 어린이를 에어백이 있는 자리에 앉히면 안 된다(도덕 정리).

 

이 예에서 사실로부터 도덕 공리가 아니라 도덕 정리를 이끌어냈다. 물론 도덕 정리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도덕 공리도 필요했다.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로부터 도덕 정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항상 자연주의적 오류인 것은 아니다. 반면 사실로부터 도덕 공리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사실로부터 도덕 공리를 이끌어내려는 것이 자연주의적 오류다.

 

자연주의적 오류를 다른 식으로 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도덕 공리 체계에 “우리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의 공리가 들어 있다면 그런 공리 체계는 자연주의적 오류가 내포된 공리 체계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도덕 공리 체계도 자연주의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의 도덕 공리 체계에는 단 하나의 공리(“우리는 신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가 있다. 자연의 질서든 신의 명령이든 그것은 사실(?)의 영역이다. 물론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라 환상의 영역이라고 볼 것이다. 여기서 내가 사실의 영역이라고 부른 것은 당위의 영역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명령이라는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고 있다.

 

자연계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한다. 따라서 자연의 섭리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는 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서의 신은 이웃 부족에 쳐들어 가서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라고,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 동성애자를 억압하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런 신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그런 것들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계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기도 하며 구약 성서의 신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에 과연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넷째 쟁점 – 과학 연구 주제를 정할 때 가치는 영향을 끼치는가?
 

과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정할 때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생명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치는 인간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의학 연구가 이루어지는데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다른 인종, 민족, 국가 사람들을 마음대로 대해도 된다고 믿는 인종주의자나 민족 우월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있다면 전쟁 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과학자가 참여하는 것을 꺼림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성능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된다. 돈 많은 자본가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 연구를 지원한다. 과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정하는 데에는 호기심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가치와 관련된 문제들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이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다섯째 쟁점 – 과학 명제의 참/거짓을 가릴 때 가치는 영향을 끼치는가?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은 흔히 진화 심리학자들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 심리학자들은 순진하게도 해당 문화권의 도덕적 가치, 이해 관계, 이데올로기 등이 과학 연구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진화 심리학자들 자신의 연구에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다. 그리하여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체제 옹호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성 차별주의 등이 진화 심리학 연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사회생물학 또는 진화 심리학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가 오직 과학적 논리에 따른 것이라고 광고하고 있지만 실상은 과학의 언어로 포장된 반동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판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진화 심리학자들이 이론을 선택할 때에는 과학적 기준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더 영향을 크게 끼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탄생한 진화 심리학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사이비과학에 가깝다. 그것도 매우 해로운 사이비과학이다. 왜냐하면 계급 체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을 옹호하는데 도움이 되는 논리를 제공하는 사이비과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진화 심리학자들은 거의 똑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준다. 그들은 비판자들을 빈 서판론자라고 부른다. 진화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빈 서판론자들은 진화 심리학 이론을 평가할 때 과학적 기준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을 더 따진다. 빈 서판론자는 평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평등주의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이라면 과학적이든 아니든 무작정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진화 심리학 비판론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며 과학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사이비과학적이라며 서로를 비방하는 이 전쟁을 보고 누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얼핏 살펴보아도 적어도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한 가지 면에서는 틀렸다는 점이 명백해 보인다. 그들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순진하게도 “과학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에 이데올로기가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식의 과학의 가치 중립성 테제를 믿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의 반박에서 금방 드러나듯이 진화 심리학자들은 과학적 담론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아예 대 놓고 빈 서판론자들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과학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양측 모두 이데올로기가 과학 담론에 개입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자기 쪽이 아니라 자신에 적대적인 쪽에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과학적 판단을 그르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화 심리학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온갖 이론을 동원하여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역설한다.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개입할 수 밖에 없다고 믿을 이론적인 이유는 진화 심리학자들에게도 있다. 자연 선택의 핵심은 번식 경쟁이다. 인간이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면 여러 측면에서 번식에 이로운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진리 경쟁이 아니라 번식 경쟁이다. 따라서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의 번식에 이롭도록 진리를 희생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번식이라는 이해 관계에 이롭도록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일종의 사고 왜곡 또는 자기 기만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과학 명제의 참/거짓을 가릴 때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어떤 과학자들은 돈, 명예, 권력 등을 위해 아예 의도적으로 사기를 친다.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이 지배했던 소련과 같은 지독한 독재 국가에서는 지배자가 지원하는 이론이 과학적 논리와 무관하게 상당 기간 승리하는 경우가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 또는 자기 학파의 이론에 애착이나 충성심 같은 것을 품는 경우가 있어서 자신은 정직하게 연구하려고 해도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20세기 심리학은 인간의 뿌리 깊은 사고 왜곡 또는 자기 기만 경향을 여러 방면에서 파헤쳤다. 당대의 편견이 과학 연구에 영향을 끼친 예도 많을 것이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결국 극복할 정도로 과학은 충분히 가치 중립적이었나? 이런 질문은 어떤 면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온갖 과학자들과 과학 공동체들이 있어왔고 그 공동체들이 이상적인 과학 즉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독립한 과학에 근접하는 정도는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적인 과학에서 멀어질 때 그것은 사이비과학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과학을 자처하던 공동체 중에는 사이비과학이라는 딱지가 더 어울렸던 경우도 많았다. 스탈린 시절의 유전학이 그렇다. 뤼센코가 이끌었던 소련의 유전학은 마땅한 증거도 없이 현대 유전학을 무시하고 라마르크주의에 집착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스탈린이 뤼센코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과학적이고자 했던 당시 유전학자들은 추방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분은 칼 같은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현대 물리학을 비롯하여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상당히 극복하고 객관적 진리에 상당히 근접할 정도로 성공한 여러 과학 공동체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한쪽 극단에는 현대 물리학과 같이 가치 중립성 테제를 상당히 잘 실천한 과학 공동체도 있었고 다른 한쪽 극단에는 한심한 사이비과학이라는 딱지가 더 어울리는 온갖 자칭 과학들이 있었다.

 

 

 

 

 

여섯째 쟁점 – 과학 연구 결과는 가치에 영향을 끼치는가?
 

과학 연구 결과가 도덕적 가치,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과학의 발달로 미신과 종교의 세력이 약해졌다. 여전히 21세기 선진 산업국에서도 미신과 종교가 맹위를 떨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백 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종교의 힘이 약해지면 예컨대 기독교 성경에서 권하는 도덕도 약해진다. 성경에서는 여성 차별, 동성애 억압, 장애인 차별 등을 당연시하고 있다. 과학 기술이 상품에 응용되기 때문에 당연히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영향을 받는다. 누구는 떼돈을 벌고 누구는 망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에 대한 과학 명제로부터 도덕 정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항상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규범들이 과학 명제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코카인을 사용하는 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코카콜라(Coca-Cola)의 “Coca”는 코카인을 뜻하며 실제로 초창기에는 코카인을 넣었다고 한다. 코카인이 해롭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자 “코카인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도덕 명제가 파생되었다.

 

 

 


2009-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