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방에 모셔둔 어린이 세계 문학 전집을 가끔 훔쳐 봅니다.   대략 25년 전 쯤에 읽었다고 치부해 버리고 제쳐 둔 것들이지만 다시 보니 추억이 담배연기처럼 피어오를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이 새롭고 신선한 내용으로 다가서기도 합니다.    어린이 세계 문학 전집을 두고 '고전의 향기'라는 표현을 씌우기엔 좀 면구스러우나 제게는 유채꽃밭에 파묻힌 것보다 더 풍성한  '고전의 향기' 맞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으면서는 어렸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간의 이중성에 빠져들었고, 레 미제라블을 목욕탕에서 술술 읽으면서는 절대 악인으로 등장하는 테나르디에라는 인간형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딸 에데와 떠나면서 남긴 한 마디 "인간의 모든 지혜는 다음의 한 마디로 요약된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는 늘어져 있던 몸과 맘에 샘물 한 모금이 되기에 충분했지요. 


 어제는 '폭풍의 언덕'을 들춰 봤습니다.  복수의 화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그리고 그들의 아들 딸까지 이어지는 얼키고 설킨 사연들을 읽으며 이걸 과연 아비를 닮아 감성제로지대에서 헤매는 아들 녀석이 털끝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갸웃거리는데 주제와는 동떨어진 구절 하나가 눈에 와 박힙니다.  


 "복수요? 내가 당신에게 지독하게 했다고요?"
캐서린은 기가막히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러자 히스클리프가 대답했습니다.

" 하지만 당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니야. 노예는 폭군에게 대항하지 않아.더 약한 자들을 찾아 괴롭힐 뿐이지.  당신은 나보다 강하니까 나를 실컷 괴롭혀도 좋아 하지만 나도 나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겠어 그러니 상관하지마 "


 히스클리프의 비틀린 사랑의 절규는 이 메마른 산하의 감수성이 터치할 바가 아니되, "노예는 폭군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더 약한 자들을 찾아 괴롭힐 뿐이다."는 냉소는 표창이 되어 제 뇌리에 박히더군요.  히스클리프는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겠다고 했지만 노예들은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짓밟기도 하거니와 자기보다는 좀 형편이 낫지만 거기에서 거기인 자들을 질투하고 끌어내리고 욕설을 퍼붓는데도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한 치 앞의 이익과 쾌감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미래를 팔아먹는 자승자박도 불사하는 노예들이 드물지는 않았다는 서늘한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구요.  물론 폭군에게는 눈 한 번 똑바로 뜨지 못하면서 말이지요. 



 수백억짜리 전용 비행기를 사들이고 스키를 즐기기 위해 유럽의 스키장 하나를 통째로 전세내는 '폭군'들에게는 전하~~~를 부르짖으며 엎드리고 "그만큼 벌잖아.   그럴 자격이 있어"라고 넘겨버리면서도 월급을 350만원 이상 받는다면 무조건 '귀족'으로 승격시켜서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헌법적 권리마저 부정해 버리는 분들의 멍든 마음은 일면 이해가 가면서도 딱할 뿐인 것은 히스클리프 탓입니다.   폭풍의 언덕에서 머리칼 휘날리며 잔인한 미소를 찍찍 흘리는 히스클리프의 대사가 귀에 쟁쟁하거든요.  "병신들 내 뭐라던? 


 수백억 자산가(아 참 헌납하셨던가요?)이며 기업가 출신의 대통령의 훈계와 88만원 비정규직으로 박박 기는 이들의 저주가 구절양장 문경새재를 돌지도 않고 똑 맞아 떨어지는 어이없음 앞에서 차올라오는 막막함과 숨막히는 답답함을 피해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꺼내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이런 구절이 있군요

 "인간들이 서로 이다지도 쌀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맨 가슴을 갈기갈기 찢고,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