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과 게시판의 로나한나님의 연재글을 7회까지 단행글로 모았습니다.

원글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로.

http://theacro.com/zbxe/?_filter=search&mid=special1&category=&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B%8B%88%EB%82%98

 

 

서(序)

 

 니나를 만나러 20일 모스크바로 떠난다. 2005년도에 라쟌의 가브리노 마을에서 만났던 니나,

꼭 7년만의 해후가 된다. 나는 그때 가브리노를 떠날 때 니나와 약속했었다. 반드시 가브리노로

다시 돌아와 니나를 만나겠다고. 니나는 내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지만 암튼 무척 즐거워

했다. 헤어질 때 우리는 악수를 했는데 니나가 갑자기 내 손을 확 뿌리치며 눈쌀을 찌푸렸다.

"무슨 남자 손이 이렇게 고운가 하고"

평생 밭농사를 일구어온 니나 손은 머슴 손처럼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렇다고 내가 부꾸러워

한 것은 아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살아온 내력이 다른데 어쩌랴.

니나는 다시 내 손을 꼭 잡고 자기가 기다릴테니 반드시 다시 놀러오라고 당부했다.

다스비다니아!

러시아 시골의 순박한 할머니 니나를 뒤로하고 나와 아나톨리는 모스크바로 향했다. 내가

니나가 뭘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아나톨리는 시계, 특히 탁상시계나 벽시계 같은 걸 좋아한

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그런 탁상시계 같은 건 흔하고 값도 싸다. 나는 다음에 올 때 탁상시계

를 몇개라도 사가지고 오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생각했던것처럼 러시아 여행이 빨리 이뤄지지는 않았다. 엄청난 삶의 굴곡을 거쳤고

7년만에 겨우겨우 러시아행 항공 티켙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브리노에는 아나톨리 김의 다차가 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니나네 집에 자주

눌러갔다.니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은 계란을 소쿠리에 가득 담아 내오곤 했다. 집단사육이

아니고 밭이나 들에 놓아 기르는 닭의 계란은 우리가 어릴 때 먹던 계란처럼 맛이 일품이었

다. 나는 한꺼번에 다섯개도 먹어치웠다. 그런 나를 보며 니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니나 남편은 제대후 병으로 일찍 타계했고 자손이 없는 니나는 남동생 발로자 내외와 함께

밭을 일구며 산다. 그런데 발로자가 술꾼이라 늘 말썽을 일으킨다.그게 니나의 유일한 고통이

었다.

 

내가 그곳을 다녀온 뒤 삼년째엔가 아나톨리가 서울에 와서 슬픈 소식을 전했다. 니나가

위암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도울려고 애썼지만 너무 늦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니나는 북망산에 묻혔어"

아나톨리가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니나 유택으로 성묘를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뒤

또 몇해가 지나고서야 이제 겨우 니나를 찾아가게 되었다.

소주 한병을 차고 아나톨리의 안내를 받아 니나의 유택을 찾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버섯을

따러 다니며 그 북망산을 몇차례 지나다닌 경험도 있다.

니나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치 니나가 살아있어서 나를 반겨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 소개된 라트비아 태생 첼리스트이자, 작곡가인 칼 다비도프(1838-1889)의 <무언의 로망스>

는 신선한 전원풍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곡으로 내가 니나와의 해후를 생각하며 찾아낸 소품이다.

 다비도프는 모스크바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한창 때 '첼로의 왕자"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첼로음악과 각별한 관련이 있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 내가 페테르부르그의 네브스키 대로에 있는 악보점에서 이 곡의 악보를 구입

했는데 곡이 마음에 들어 동명의 음악칼럼집을 낸바도 있다. 이 곡이 내가 니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주제곡이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

 

통관절차를 마치고 승객 환송실로 나가자, 작은 팻말을 치켜든 잘 생긴 동양청년이 금방 눈에 띠었다. 그런데 팻말에 한글로 적힌

내 이름이 ㅕ를 ㅑ로 잘 못 적혀있다. 한글을 처음 써본 사람 글씨처럼 글씨도 서툴렀다. 그래도 식별에는 지장이 없다. 나는 청년에

게 다가가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도 웃어보이며 얼른 내가 끌고있는 크지 않은 여행가방을 내게서 받아갔다. 나는 그제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울-모스크바 간 9시간 5분의 비행, 적지 않게 지루했다. 귀국시 비행시간은 한시간 이상 단축되는데 지구의 자전으로 비행방향

이 서로 엇갈려 그런 차이가 난다는 걸 뒤에 민박집 어느 손님에게서 들었다. 다섯번째 방문인데 처음부터 모르는 민박집에 묵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체류일정을 짤 때 그것은 내가 원한 것이고 나는 초기 며칠동안만 민박집에 묵기로 했다.

 

 5일이 지나면 A가 나를 데릴러 차를 몰고 민박집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 뒤에는 A와 함께 A의 다차가 있는 랴잔의 가브리노로

 가서 일주일 가량 묵게 된다. 그곳에 니나가 잠들어있는 그녀의 유택도 있다.  가브리노 다차의 체류가 끝나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근교의 페레델키노 작가촌으로 가서 거기 있는 A의 집에서 며칠 보내고 9월 6일부터 시작되는 러시아 작가미팅에 참여

하기 위해 A와 함께 야스나야 팔리아나로 떠난다. 3주 여행인데 대충 이런 일정이었다. 러시아 작가미팅은 -주최측은 세계작가

미팅이란 걸개를 걸어놓고 있으나 참가자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실질적으로는 국내행사- 2005년에도 러시아 여행 중에 우연

찮게 참석했고 좋은 경험을 한 바 있으나 이번에는 나 개인으로는 반드시 참석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정은 A의 희망

이고 A가 미리 정한 것이다.

 

 7년만의 러시아 방문이다. 감회도 새롭지만 낯설기는 초행이나 마찬가지다. 먼저 민박집을 찾은 것은 A와 어울리기 전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이곳 공기와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혼자 낯 선 거리를 지향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은 내가 아주 즐기는 취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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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첫 걸음부터 나는 암초에 부딛혔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바깥은 완전 초겨울 날씨다. 쌩 ㅡ하고 칼날 같은 찬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반팔 셔츠를 입은 나는 몸을 잔뜩 움추린채 움직일줄 모르고 서있다. 서울의 여름은 얼마나 더웠는가.

여름에서 겨울로 갑자기 이동한 셈이다. 경험상 러시아의 8월 하순이 이렇게 추울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무거운 짐

휴대를 극도로 꺼리는 나는 가방 속에 겨우 봄 양복 한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내복도 털외투 같은 것도 없다.

 

 여행을 너무 서둘렀나? 좀 더 침착하게 현지 날씨를 확인하고 세심하게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마치 뭔가에 쫓기듯이 여행을

서두른 건 아닌가. 마중나온 청년을 따라 차를 세워둔 곳까지 백여메터 가는 중에도 나는 감기의 악신을 피하기 위해 잔뜩 몸

을 움츠렸다. 차에 오르자, 그제서야 깊은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노브이 체르무쉬끼'  -지하철 황색선의 정거장 이름이다. 민박집은 그 부근에 있다. 차를 모는 청년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중국 가요를 계속 듣고 있었다.

"유 차이니즈?"

"예스" 

그래. 예감이 그렇더라니. 담배를 피워도 좋은가 하고 물었더니 중국 청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비행시간 9시간 내내

참던 흡연욕구다. 그런데 라이타가 없다. 차오(중국청년)가 도중에 차를 세우고 길가에 있는 끼오스끄로 가서 라이타를 사

왔다. 차가 거리에 홍수처럼 밀려오고 밀려간다. 정체도 만만치 않았다. 한시간 이상 달린 끝에  큰 아파트 촌에 있는 민박

집에 도착했다.-계속

 

지하철 회색선 정거장으로 툴스카야(Tulscaya) 가 있다. 깔쪼에서 밖으로 두번째 정거장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중심가와 가깝다는 얘기다.

깔쪼는 서울의 4대문 안 같은 시내 핵심지역을 둘러싼 지하철 환상선(環狀線)인데 모스크바 지하철 약도를 보면 이 환상선을 중심으로

사방 외곽지역으로 지하철이 뻗어나간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가 있다. 툴스카야에서 지하철을 타면 불과 십분 만에 이르바트나 트베르스카

야 같은 시내 중심지역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교통이 좋은데 비하면 툴스카야 역 부근 일대는 그다지 번화하지도 않고 후르시쵸프 시

절에 날림으로 지었다는 저층의 낡은 소형 아파트들이 여기저기 두서없이 늘어서 있고 그럴듯한 상점 하나도 찾아보기 어렵다. 서민주거난

을 단숨에 해결하기 위해 날림으로 지었다는 이 상자 같은 소형 아파트에는 후르쇼프까란 불명예스런 별칭이 붙어있다.

 

 200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석달 동안 나는 툴스카야의 후르쇼프까를 잠시 빌려 혼자 지냈던 경험이 있다. 그 아파트는 바이올린을 공부하

는 학생이 하기 휴가로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내가 아주 싼 임대료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방에는 피아노와 오디오 컴포넌트, 그리고 그 학생

이 닮고 싶다고 내게 말했던 바딤 레핀의 음반을 위시해서 하이페츠, 그루미오 등 많은 명인들의 CD 음반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방도 비좁고 4층으로 오르는 구식 엘리베이터는 늘 덜커덩거려서 금방 추락할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 지낸 시간은 내가 정말 오랜만에

누려보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날마다 툴스카야 역 부근, 그리고 서민들의 아파트 촌 부근을 실컷 어슬렁거렸고 오랜만에

바이올린 연주도 실컷 들었다. 그날 이후 툴스카야의 기억들은 내게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툴스카야로 다시 찾아가보자. 7년 전 그 거리 모습이 그 사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 그 거리 사람들, 1층의 구두가게 주인장인

젊은 여성, 옆집 할머니, 그리고 과일 노점상을 하던 대머리 아저씨 등 그들이 여전히 그 거리를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무엇보다

유명한 툴스카야의 비둘기들과 만나는 일이 중요했다. 툴스카야에 비둘기가 많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하철 역 부근 피자

가게 앞 마당에는 언제나 수십마리 비둘기들이 떼지어 몰려와서 손님들이 먹다 흘린 피자 조각, 빵조각 등을 부지런히 쪼아 먹는

다. 비둘기들은 사람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 인도에도 비둘기들이 사람과 뒤섞여 뒤뚱거리며 걷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비둘기

는 허공의 전선에도 ,나무가지에도 진을 치고 앉아 있으며 가끔 나의 초라한 처소에 찾아들기도 했다. 아침에 조반을 마련하러 주

방으로 가면 주방 창턱에 비둘기 한마리가 조용히 앉아 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이방인을 찾아준 비둘기에게 너무 고마와

서 비둘기와 대화를 몇차례 시도한 바도 있었다. 국적이 없는 비둘기는 한국말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엉뚱한 기대감을 품었었다.

그러나 대화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인기척을 느낀 비둘기가 허공으로 멀리 날아가버리곤 했던 것이다.

 

 여행계획을 세울 때 툴스카야 방문은 당연히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남쪽의 노브이 체르므쉬끼 역 부근에 민박집을 잡은 것도

그곳이 툴스카야와 가깝다는 게 첫째 이유였다.

 

 

-5층 창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주변 풍경.맞은편 2층 건물은 종합미용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이십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 현관에서 나를 맞았다.

"저희 집에 오셧으니 이제부터 편히 모실게요."

"당신이 이 진 씨?"

"네. 제가 이 진입니다."

서울에서 통화할 때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민박집의 이 젊은 주인은 조선족 출신 여성이다. 조선족?

처음 그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 진의 활달한 성격과 싹싹한 말투가 곧 그런 우려를 씻어주었다.

 안내 받은 방으로 가서 나는 짐을 내려놓고 차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나갔다. 주방에는 이미 세사람의 남자 손님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자, 모두 일어나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년장자에 대한 한국식 예의였다. 이 사람들은 벌써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기네 끼리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참이였다. 초면의 낯 선 사람 끼리도 식탁에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식사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게 민박집의 풍속이다.

"저희는 여기 르노 자동차 회사에 나가고 있습니다."

셋 중 가운데 앉아있는 사십대 남자가 내게 자기들 직업을 소개했다.

"세 분이 같은가요?"

"네. 분야는 달라도 회사는 같답니다."

"한국에 있는 르노 차가 여기에도 옵니까?"

"아니, 아직은 안 옵니다. 오더라도 완성차는 안 올 거에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부품을 여기로 보내면 여기서 조립과정을 거쳐

차를 출시하게 되겠지요. 저희는 지금 조립공정을 세우느라고 파견나와 있는 겁니다."

 

이 세 사람은 장기숙박 손님들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시선이 새 손님인 나에게 쏠렸다. 주인 이 진도 조금 떨어진 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아 나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나이가 마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조금 깐깐한 인상을 주는 르노 차 직원이 내게

불쑥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 러시아에 오셨는지요?"

"아, 저는..."

이런 질문을 예상 못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적당히 꾸며 대답하면 그만인데 구태여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계속

 

나의 여행 목적을 정직하게 말한다면 첫째가 니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가브리노 북망산에 잠들어 있는 니나를 찾아

이 바쁜 세월에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르노 자동차 회사의 이 엔지니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왠지 그 말을 꺼내는 게 내

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황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마치 개인의 기호에 따라 불필요한 사치를 감행한 사람처럼 변명해야 한다.

 

"아, 이곳에 친구가 있어요. 그를 만나 의논할 일도 있고, 그리고 전에 한동안 지내던 마을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어서요. 툴스카야

라고."

 나는 아주 간명한 답변을 쉽게 찾아냈다.

"추억여행인가요?"

셋 가운데 가장 젊어보이는 르노차 직원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결국 그런 셈이 되겠네요."

세사람의 엔지니어들은 대충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모두 일어서서 각자 자기 방으

로 갔다. 그들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여섯시가 되면 출근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이었다.

 

 

가브리노의 호수--건너편에 니나가 살던 마을이 있다.

 

 

 

 여행지의 첫 밤을 잘 쉬고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툴스카야로 가야 한다. 그 거리와 드디어 재회한다

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지하철 약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황색선에서 회색선으로 갈아타는 지점의 역 이름을 눈여겨

봐두었다. 노브이 체르므쉬끼 역에서 툴스카야 역까지는 이십분, 좀 여유있게 잡아도 삼십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오늘 날씨 아주 춥습니다. 저어기 바깥을 보세요. 사람들이 두꺼운 옷들을 입고 나온 걸요."

조반을 먹으려고 주방으로 나갔는데 주방 아주머니가 몹시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주방에 붙은 베란다 창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행인들이 모두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주머니. 어디서 내복을 구할 수 없을까요? 러시아 사람들 내복 입지 않는 걸 알지만."

"근처에는 없을 거에요. 중국시장에나 가면 모를까. 근데 거긴 멀어요. 가봐도 내복을 살 수 있을지 장담 못해요."

북국의 변덕스런 날씨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법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리 추워진 거랍니다."

마음씨 착해 보이는 주방 여인이 커피와 식빵 두조각을 식탁 위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커피와 식빵은 내가 주문한 아침 식

단이었다.

"아주머니는 러시아 말을 아주 잘 하시네요."

주방여인이 아침부터 스마트폰을 들고 러시아 말로 누구와 대화하는 걸 들었다.

"아이, 그냥 필요한 말은 조금 해요. 어려운 말은 못하고요."

"아이구, 부럽습니다. 여기 오신지 몇해나 되었는데요?"

"벌써 십년이네요. "

"처음부터 모스크바에?"

"아니에요. 연변에서 나와서 처음 볼가그라드에서 옷장사를 했어요. 여기 온 건 이제 삼년, 그쯤 되네요."

"아, 볼가그라드...이차대전 때 격전지로 유명하던 곳이죠. 한때 스탈린그라드로 불리기도 했고."

"거기서 옷장사를 오래 하다 장사가 잘 안 되어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지 뭐에요. 장사를 하다 보니 말이 조금씩 늘데요."

 

조반을 마치고 나는 가을 양복을 꺼내입고 외출을 서둘렀다. 주방여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지켜봤다. 그녀는 아래층 입구의

출입문을 드나들 때 필요한 절차를 내게 꼼꼼하게 가르쳤다. 출입문에는 비밀 숫자가 있고 별도의 문자표시가 부착되어 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차례대로 입력하지 않으면 육중한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이건 한국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현관을 나서는데 늦잠에서 방금 깨어난 집 주인 이진이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추워 안 되요. 툴스카야는 날씨 좀 풀리면 제가 차로 모실게요. 감기 드시면 여기서는 약 구하기도 어렵

다구요."

나를 걱정해주는 이 조선족 젋은 여성의 마음이 고맙지만 그렇다고 첫날부터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갔다가 너무 추우면 금방 돌아오겠소. 그래도 여기 땅은 밟아봐야지."

"그러세요, 그럼.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5층에서 엘리베이타를 타고 내려와서 나는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추웠다. 이런 날씨라면 툴스카야에

가더라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 행길로 나가서 지하철 역 방향으로 천천

히 걸었다. 사람들이 내 옆을 분주하게 스쳐 지나갔다. 모두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 외출 한번 하는데 이처럼 비장한 마

음을 갖게 된 건 처음이다. 길 한편에 작은 규모의 끼오스끄가 있고 그 건너편에 여러가지 과일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을 부

르는 과일 노점상이 있다. 어느곳이나 변두리 마을의 풍경은 비슷하다. 여기에도 비둘기가  있었다. 비둘기들과 참새들이

나무숲에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풀씨를 쪼아먹고 있었다. 참새들조차 사람이 다가가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잔디밭에서 풀씨를 쪼아먹고 있는 참새들을 아주 가까이 서서 오래도록 지켜봤다.

 

지하철 역 부근은 언제나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붐빈다. 지하철로 들어가는 지하도 양켠에는 작고 볼품없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모스크바 서민들은 이 지하도 가게들을 유난히 애용하는 것 같다. 값이 싸기 때문일까? 큰 시장까지

가는 게 번거롭기 때문일까?  이 가게에는 손수건과 양말, 머풀러와 질이 낮은 쉐타, 역시 질이 낮은 선그라스와 손톱깍이

와 머리빚 등의 잡동사니들이 진열되어 있다. 주로 많은 여성 고객들이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서서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

었다. 나는 일단 지하도를 지나 맞은편 넓은 광장으로 건거갔다. 지하철을 타더라도 현금이 있어야 한다. 광장에는 큰 상

가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2층 한쪽 모퉁이에 환전소가 있었다. 환전소는 어느곳이나 구조가 비슷하다. 전당포 창구처럼

고객과 주인 사이에 볼펜 굵기의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으며 돈 거래는 창살 아래 쪽에 터널처럼 뚤려있는 좁은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러시아 남쪽 회교권 출신으로 보이는 두 젋은 남자가 창구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잠시 후 그

들이 환전을 끝내고 자리를 떠나자, 나는 창구 앞으로 가서 백달러 지폐 몇장을 내밀었다. 사십대 중년 여인이 내 얼굴

을 힐긋 한번 쳐다보고 달러를 받아 그 중 한장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현미경으로 꼼꼼하게 살펴봤다. 아마도 그들 나름

으로 위폐 여부를 쉽게 식별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100달러는 대충 3200 루불, 루불의 가치가 한때 폭등했다는 소문

을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7년 전과  환율이 크게 다르지 않다. 루불을 건네준 여인은 나를 향해 알듯모를듯한 눈인사를

건넨다.  

 

광장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지만 여전히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냉기를 실은 바람도 멈추지 않고 불었다. 바람

을 피해 나는 건물 모퉁이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추운 날씨에 툴스카야엘 가야 할까? 그 해답을 얻는데 십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툴스카야 행을 단념하고 지

하도를 다시 건넜다. 민박집 주인 이진의 충고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계속)

 

 

추운 날씨 때문에 며칠 동안 나는 민박집 근처에서 멤돌았다. 하루 한차례 외출이라고 했지만 고작해야 첫날 나갔던 지하철 역까지

다녀오는 게 전부였다. 만나는 사람도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다. 구지 대화상대라면 풀밭에서 풀씨를 쪼아먹는 비둘기나 참새들 뿐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방의 새들과 이른바 '무언의 대화'를 나눈 셈이다. 하긴 서로 몇마디 얘기를 나눈 유일한  인물이 있다.  조그만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마흔 안팎으로 뵈는 어떤 사내가 마즌편 벤치로 와서 앉아 나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나쁜 인상은 아닌데 옷

차림이 허수룩하고 얼굴은 술기운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서툴지만 영어를 조금 할줄 알았다. 나는 그 남자와 날씨와 로스

트로포비치에 관해 짧은 몇마디 대화를 나눴다. 왜 갑자기 로스트로포비치가 등장했느냐 하면 그 주정꾼은 나와 자꾸만 대화를 하

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나는 별로 꺼낼 얘기거리도 없어서 내가 갑자기 몇해 전 작고한 첼리스트에 관해 아느냐고 그에게 뚱딴지처럼

물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민 첼리스트인 그 이름을 이 주정꾼도 물론 알고 있었다. 이어서 트르게네프와 체홈의 이름도 나왔고 그는

물론 그 이름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 그가 러시아 말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했는데  무슨 얘기인지 대충 추측만 할

뿐이었다. 주정꾼과의 대화는 십여분에 그쳤고 나는 곧 공원을 떠났다.

 

 민박집 방에는 책들이 몇권 꽂힌 서가가 있다. 그 서가의 책을 통해 나는 방 안에 갇혀있는 무료한 시간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몇해 전 국내에서 출간된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아르바트 아이들>이란 소설은 이름만 들었지, 읽지는 않았다. 제목만 보면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벼운 연애담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사회주의 당시의 러시아 젊은 세대들의 수난사를 아주 정

밀하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 새로운 희망을 위하여>라는 에세이 집도 그 방에서 읽었다. 이 책은 92년 그가

대선에 실패하고 영국 체류 기간에 정치에서 손을 뗀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란 특징이 있다. 근엄한 정객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소박하게 자기 삶을 성찰한 내용들이 흥미를 끌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도 이 방에서 읽었다. 평소

에는 이런 책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책을 세권쯤 읽고나자, A를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

 

 A는 모스크바 근교의 작가촌인 페레델키노에 머물고 있다. 그가 차를 가지고 내게 오기로 되어 있었다. 민박집 여주인 이진이

최신 스마트폰으로 내게서 건네받은 A의 연락처에 신호를 보냈다. A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보다 한살 많은 이른바

원로급 러시아 작가이다. 이진과 그가 러시아 말로 잠시 통화를 한 뒤 이진이 스마트폰을 내게 건넸다.

"반갑소"

"네.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내일 만납시다. 오늘은 못 가요."

"?...."

"그럼, 내일"

"알겠습니다. 내일 만나죠."

통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왜 오늘 못 온다는 거죠?"

내가 이진에게 물었다.

"부인이 팔을 다쳐 병원에 있답니다. 형편이 썩 좋지 않은가 본데요."

"엘레오노라가?"

카자흐 고려인 출신 부인을 나는 잘 알고 있다. 7년 전 가브리노 다차에 머물 때 그녀는 갖은 음식을 만들어 낯선 손님인 나를

융숭하게 대접했었다. 이후 그들 부부가 서울에 왔을 때 나는 그 보답으로 후배 사업체인 수입화장품회사에서 독일제 유기농

화장품 세트를 가져다가  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A의 한국말은 다섯살 혹은 여섯살 정도 유아 수준이다. 그걸 감안해도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이때부터 사실상 A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꿈틀대기 시작해서 내가 러시아를 떠나

는 시간까지 줄곧 나를 괴롭혔다.

 

 

 가브리노 호숫가에 있는 A의 다차 건물-뒷뜰에서 찍은 사진

 

 

 오후에 다시 A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전의 약속을 바꾸어 오늘 내가 자기 처소로 찾아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는

이진이 받았다. 페레델키노 작가촌이라면 90년대 초 러시아 첫 여행 때 빠스테르나크 기념관을 찾느라고 일단의 동료작가

들과 함께 그곳에 갔던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그곳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내가 알 길이 없다. 손님

인 내가, 더구나 말도 통하지 않는 내가 그곳으로 찾아와야 한다는 요청은 친구의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

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다섯시까지 모시고 오랍니다. 걱정마세요. 차오하고 제가 모시고 갈테니."

이진에게 그런 의무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친절하고 싹싹했다.

 

"러시아 오시면 꼭 페레델키노로 오세요. 제가 며칠이고 편히 묵으시도록 해드릴게요."

서울에서 엘레오노라가 내게 들려줬던 말이다. 그들이 서울을 다녀간게 삼년 쯤 전인가?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본래 계획

에는 민박집 체류가 끝나는 즉시 리아잔의 가브리노로 떠나야 한다. 페레델키노는 가브리노 이후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순서를 바꿔버린 A의 처사가 미심쩍었지만 그가 하자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즉시 방으로 가서 꺼내 놓은 몇가지

의복들을 작은 여행가방 속에 꾸겨넣고 책상 위에 펼쳐놓은 메모지들을 정리했다.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

다. 며칠 묵었던 방과의 작별! 이런 때는 언제나 그곳에 자기의 지극히 작은 일부나마 남겨두는 것처럼 허전하다.  

 

" 그 할머니의 무덤에 가면 뭐가 있나요?"

"있긴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왜 거기까지...구태여, 거기 유족이 있다면 그냥 여기서 전화나 한통 해주시면 될 걸."

그 당돌한 청년은 거침없이 내게 자기 생각을 제시했다.

 차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후 세시쯤 페레델키노로 가는 동안에 문득 회현동 지하상가 <크림트> 에서 만났던 자칭

도서 수집가인 청년의 말이 떠올랐다. <크림트>는 본래 LP 전문점인데 최근 경기가 좋지 않은지 주인이 자기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책들을 집에서 가져다가 가게 한쪽에 늘어놓고 묵은 희귀본(稀貴本)을 찾는 손님을 끌고 있었다. 이 가게 주

인 김씨야말로 숨은 도서수집가이다. 나는 전에 한번 동대문 밖 회기동 그의 집에 들렀다가 그의 집 거실과 그가 기거하

는 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차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또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했다.

 "아, 이 선생님 생각은 우리가 알 수가 없죠.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니까요. "

내가 고객인 청년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가게 주인이 적당한 말로 그 장면을 얼버무렸다.

"그런가요?...그렇군요."

 내 반응을 기다리던 호기심 많은 도서수집가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페레델키노는 생각보다 시내에서 멀지 않았다. 페레델키노란 푯말이 여기저기서 눈에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역이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넓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시 외곽지대는 어디나 숲으로 덮여있는데 페레텔키노는 특히 구역

자체가 거대한 숲이었다. 차오는 네비게이션을 열심히 드려다보며 종이에 적힌 주소지를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차가

숲속으로 들어온지 이십여분이 되었지만 그 주소지를 찾지 못했다. 한 중년남자가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

고 있었다. 이진이 차를 세우게 하고 그 남자에게 A의 집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길을 두번 돌아가면

바로 지척에 A의 집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A의 집 둘레를 한참동안 빙빙 돌고 있었던 셈이다.(계속

 

 

페레델키노 마을은 러시아 작가촌이다.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빠스테르나크가 말년을 여기서 지낸 걸

보면 사회주의 초창기부터 작가촌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곳은 러시아 작가동맹에서 관리하는데 이곳 주택을 배

정받으려면 일정한 작가이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A는 이미 충분한 입주자격을 갗추었지만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다가 몇해 전 입주신청을 하고 일년 쯤 전에 겨우 주택을 배정받았다.

 

 A의 집 앞에 도착해서 이진이 A와 통화를 했고 곧 A가 나와서 차가 진입할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주었다. 허름한 외투

를 걸친 A는 수염도 깍지 않고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가볍게 두팔로 안으며 빙긋이 웃

는걸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작별한 뒤 3년만인가? 우리는 요란한 인사치레 말은 하지 않았다.

이곳 주택은 아주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층인데 네 가구가 각기 독립 출입문을 갖고 있는데 단층

에 있는 A의 집 앞에서는 다른 세 가구의 출입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기분상으로는 한 건물

에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실내에서도 다른 가구에서 전해오는 소음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집 내부 구조도 별로 넓지 않은 공간을 아주 쓸모있게 잘 구획을 지어 배치해 놓았다. 침실은 두칸,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데 소가족이 살기에 적당한 구조였다.

 

 A는 나를 데려온 이진과 차오에게 아주 친절하게 굴었다. 두 사람에게 자기 책을 가져와서 사인을 해서 한권씩 선물

했다. 함께 사진도 몇장 찍었다. 일정이 바쁜 이진과 차오는 반시간쯤 거기 머물다가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갔고 넓지

않은 거실에는 주인인 A와 손님인 나, 둘만 남았다.

"엘레오노라 지금 병실에 있소. 그래서 선생 접대를 못하요. 팔이 몹시 아파 내일 수술할 거요. 내일 엘레오노라 수술

때문에 내일 거기 못가요."

A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거기'란 니나가 있는 가브리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언제 가브리노에 갈 수 있느냐? 묻고 싶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지금은 그의 결정에 따르는 수 밖에 없다.

"가브리노, 모래 갑시다. 나도 허리를 다쳐 운전하기 어렵소. 병원에 가봐야 하오."

"어떻게 다쳤지요? "

"며칠 전 욕실에서 넘어졌소. "

A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허리 뒤를 몇번 주물렀다.

"A선생, 무리하실 것 없어요. 내가 꼭 거기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니나는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가브리노 가는 걸 서두르지 마시고 치료나 잘 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A에게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건강이 우선 중요하다. 그러나 A는 이 말이 내 진심이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기 갈거요. 내일 수술 끝나고."

A는 탁자 위에 있는 물병을 들고 물을 한모금 마신 뒤 다시 말했다.

"니나 만나는 것 중요해요. 나도 정신의 가치가 뭣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소. 그걸 아니까 내가 운전하고 같이

갈려고 하는 거요."

 작가니까 체면치레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닐까? 나도 A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A의 이 말에서

도리어 A가 나의 가브리노 행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브리노는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곳이 아

니다. 경우에 따라 하루 종일 차를 몰고 가야 한다. 날씨도 춥고 자기 몸도 불편한데 나를 차에 태우고 그곳으로

나를 안내한다는 일이 A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나의 가브리노 방문에 대한 A의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걸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파클론 아드반치쿠-러시아의 민들레. 독성이 강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고 한다. 다차 뒷뜰에 서식

 

 -니나는 본래 나의 오랜 친구이고 당신이 니나를 만난 것은 그때 며칠 사이 두세 차례 뿐인데 니나가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게 맞아? 언제부터였지? 나 아니면 당신은 니나란 존재조차 몰랐던 것 아냐.

A가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그 표정에서 읽었다. 그러나 노련한 원로작가는 자기 생각과

는 전혀 다르게 말했다.

"니나가 선생을 참 좋아했던건 기억이 나오. 아주 좋게 보았던거지. 본래 마음이 큰 사람이지만 그때만큼 처음

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본 일이 없소. 좋은 땅을 거저 주겠으니 이곳이 맘에 들면 여기 집 짓고 와서

살라고 했지. 기억 나오?"

"물론 기억하지요. 그 땅들, 돈 많은 도시 사람들이 욕심낸다던 그 땅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니나 죽고나자, 동생 발로자가 술 마시느라고 죄다 팔아치워버렸어. 집도 팔아치우고. 남은 게 하나도 없어."

"발로자는 거기 있나요?"

"아직 마을에 있는데 오두막 같은데 거처하오. 보기가 딱할 정도로 망했어."

 

 바깥이 점점 어두워졌다. A는 엘레오노라 대신 자기가 저녁을 마련해야 한다며 주방으로 건너갔다. 그 사

이 나는 흡연을 위해 좁은 현관을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입구의 계단에 서있는데 바로 지척에 있는 큰 소나

무 쪽에서 까악까악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크기로 볼 때 굉장히 몸집이 큰 새가 분명했다. 새는

나무기둥에 붙어서 소나무 껍질을 쉬지않고 쪼아대고 있다. 드디어 나무기둥에서 분리된 큰 나무껍질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딱따구리일까? 까마귀일까? 러시아 숲에는 까마귀들이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 그러나 숲의 가지들에 가리워져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우던 담배불을 끄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 A는 벌써 두차례나 불조심을 내게 강조했다. 숲속에서는 더욱 화재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정도

는 나도 알았다.

 나는 손에 든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무심코 그걸 밟아 끄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담배가 버려진 곳 주변에서 쉬

지않고 움직이는 생명체가 눈에 띠었다. 수가 많은 생명체였다. 작은 개미떼들이 모래성을 쌓느라고 행렬을

지어 저녁이 다가오는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는 담배불을 끄려다가 나와 아무

런 인연이 없는 그 러시아의 작은 개미떼들을 지옥으로 보낼뻔 했다. 7년만에 어렵게 찾아온 러시아 땅에서

비록 하치않은 개미의 생명이지만 나의 러시아 여행이 이들에게 끔찍한 불행으로 연결되는 우연의 도미노를

나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A는 그 년배의 남자 치고 요리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식탁에는 밥과 국, 술 안주로 셀러드와 러시아 소시지

등이  차려져 있고 어디서 선물 받았다는 붉은 색 과일주도 한병 놓여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의 해후를 자축

하며 건배를 했다. 술은 보드카 보다 더 독해서 몇잔 마시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두사람 모두 애주가는

아니어서 술병을 서둘러 닫았다.

기분이 고조된 순간에 A와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언어의 벽이 둘 사이를 더욱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낀다. 7년전 A를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이번에는 단절감이 더 심했다. 나는 러시아 말에 먹통이고-러시아

를 여행할 때마다 이점이 늘 너무나 아쉬웠다.- 고려인 2세인 A는 한국말에 유아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

태다. 이야기가 조금만 미묘하게 발전해도 거기서 막혀버린다. 7년 전 A를 따라 가브리노에 갔을 때는 그

런 점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자잘한 데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분이 쌓여진 지금은 대화

가 막힐 때마다 짜증이 생긴다. (계속)

 

 

이쯤에서 7년전 내가 A를 처음 만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3개월의 러시아체재를 계획하고 러시아로 떠났었다. 남들에겐 이런저런 러시아 일정을 부풀려 말했지만 실제는 일종의

도피여행이었다,

 서른살 무렵에 잠시 몸 담았던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섰을 때 초기에 생활자체가 어려웠고 전망도

뚜렷하지 않았다. 갑자기 벽에 부닥친 것이다. 나는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던 남쪽 고향 바닷가로 며칠 여행을 떠났다. 도피여행

이었다. 그 이후에도 어떤 딜레머와 마주칠 때마다 고향의 그 바닷가를 찾았다. 작가생활의 이력도 쌓일만큼 쌓이고 장년기를 훌쩍

 지난 지금 그 방향이 고향의 바닷가에서 러시아로 바뀐 것 뿐이다.

 

 그 무렵에 좋지 않은 일 몇가지가 내 신변에 일어났다. 현실에 환멸을 느끼거나 실망감을 느끼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누군가가

공개지면에 나에 관한 모함성 글을 게재했는데 흔치 않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 지면은 내가 수년 전 연재 작품을 쓰던 지면이

고 그 글 개재자는 소시적부터 나와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동료 작가였다.  작가에게는 이름 몇자, 그게 자산의 전부이다. 분노로

입술이 부르텄지만 마땅한 대응책도 없었다. 이것이 도피를 충동한 직접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로 가자. 몇차례 다녀온 인연으로 그나마 조금 낯이 익은 땅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K 교수가 이때 고려인 작가인 A

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A는 당시 카자흐스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면 나를 데리고 자기 다차가 있는 가브

리노로 가는 걸로 일정이 짜여졌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K 교수가 애써준 결과였다.

 

 툴수카야의 허름한 소형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 나는 무료한 나날을 보내며 A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A는

예정된 날자가 지나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A는 어떤 사람일까? 그가 과연 일면식도 없는 나를 맞기 위해 나를 찾아줄까?

K 교수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때까지 A에 관해 내가 아는 거라곤 오래 전 국내 문학지에

개제된 그의 자전 성격의 글을 몇 페이지 읽은 것 뿐이다. 거기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나온다.

 

-아직 작가로 입신하기 전, 청년기에 A는 모스크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한다. 처음 잡부로 일하다가 뒤에 타워크레인

기사가 되었는데 저녁이 되면 인부들이 모두 퇴근하고 사방이 고요할 때,

A는 공중의 크레인 조종석에 홀로 앉아 거기서 바라보이는 모스크바 중산층 아파트의 내실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취미에

빠졌다. 고독한 이방인 청년인 그는 여인이 옷을 갈아입는 은밀한 장면을 자주 훔쳐보곤 했는데  그는 젊은날의 이런 자기 행위

에 대해 도덕적 자괴감을 느낀다고 자전에 쓰고 있다.-

 

 이 장면을 읽고 나는 A라는 인물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사방이 어두워진 때 타워크레인의 조종석에 홀로 앉아 중산층 생활을

훔쳐보며 신분상승의 열망을 끊임없이 키웠을 것이다. A 에 대한 관심은 그러나 그때 뿐으로 그 이후 그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다차 뒷뜰에 서식하는 붉은 열매 . 소크라테스 독배의 원료가 된 열매라고 하는데 이름은 불명이다.

 

 

 

 K 교수 말에 의하면 A는 고려인이지만 그의 러시아어 문체는 매우 정교하며 특히 러시아 중부 농촌지역 토속어 구사에도 능

하다고 한다. 이런 미덕 때문에 그가 러시아 문단의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에는 톨스토이, 체홉 등 전통적 리얼리즘 소

설이 주류로 되어있긴 하나 독자적 실험을 추구하는 전위(아방가르드)계열의 작가들도 적지 않다. 어수선한 정치적 변환기이

던 20세기 초에도 공상과 현실이 뒤섞인 환상적 작풍을 구사했던 에프게니 자먀찐(1884-1937) 같은 작가가 상당한 활동을 벌

인 걸 보면 역시 이 나라의 문학적 잠재력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A도 전위작가 계열의 작품을 주로 써낸 걸로 알고 있다. 나는

A를 알게 된 이후 최근에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단편 두편을 겨우 읽었을 뿐이다. 한편은 실험적 수법의 소설이고 한편은

평이한 스토리 소설인데 번역상 전달의 난점도 있겠지만 그다지 큰 인상은 받지 못했다.

 

 툴스카야에서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거의 한달 가까이 지났을 때 드디어 A가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

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틀 뒤 A가 차를 가지고 내가 머물고 있는 툴스카야의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 A를 안내한 사람

은 K 교수 제자인 현지 유학생으로 그는 그동안 A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었다. 연락을 받고 나는 부랴부랴 가방

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브리노 다차에서 열흘 정도 보낼 거라면 거기 따른 준비물을 챙겨 넣어야 한다. 양말,내의, 치솔과

치약, 그리고 무엇보다 환전해둔 루불화, 읽을만한 책 한 두권, 한 사람이 움직이는데 참으로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뒤를

따른다.

 "다차가 있는 랴잔의 가브리노는 경관이 뛰어납니다. 모스크바에서 십년 거주한 사람도 지방의 그런 경관을 구경할

기회가 없어요. 선생님은 운이 좋으십니다."

K교수 제자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한마디 더 보탰다.

"여기 한국대사님도 초대받아 가브리노를 다녀오셨는데 A 선생과 함께 버섯도 따고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는 아무나 거기 데려가지 않는다. 당신은 선택받은 것이다.' 이런 뜻을 그 말은 은근히 암시했다. 물론 A는 내가 아니라

K교수 체면을 봐서 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챙겨 넣어 꽤 무거워진 가방을 끌고 4층에서 아래로 내려갔

다. 일층의 구두가게 앞에 지프 차 형태를 닮은 아주 낡은 라다 한대가 정차해 있었다. '라다'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보급

형 국민차로 그 이름에는 '행운의 여신'이란 뜻이 있다. 몸집이 좋은 유학생이 달려와서 내 가방을 받아 차의 뒷 트렁크

에 실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가 천천히 운전석에서 나와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좀 작은 편

이나 몸집은 단단했고 코밑에는 수염을 기른, 나와 거의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그 얼굴은 전에 사진에서 본적이 있

는데 아주 야무지고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웃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앞에 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드물게도 초면인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

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채 나와 악수를 했다. 이런 경우 보통 거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분명히 조금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고려인 신분으로 대러시아의 일급작가가 된 자부심을 그가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A와 나는 함께 차에 올랐고 밖에서 제자가 손을 흔들었다. 차는 곧 구두 가게 앞에서 떠났다.

 

  나는 뒷날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두 사람의 벙어리가 낙원을 향해 출발했다.'는 타이틀을 생각해냈다. A는 한국말은 겨우 유아수준을 벗어난 상태

이고 나는 러시아 말에 완전 먹통이다. 손짓 발짓, 거기에 약간의 초보적 한국말을 보조로 사용하면 그럭저럭 공동생활

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작가인 두 사람이 만나서 열흘 동안이나 기초생활 유지에 머문다면 이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 K 교수는 박사과정인 자기 제자를 통역으로 동행시킨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제자는 논문 마감이

임박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예비박사님은 도리어 내게 반문했다.

"두 분 사이에 꼭 대화가 필요할까요? 아마 걱정 안하셔도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거의 한시간이 지났으나 당연히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

다. 아마 상대에 대한 일정한 신뢰감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아파트 공사장의 타워크레인 조종석에 앉아 모스크바 중

산층의 내밀한 생활을 훔쳐보던 청년을 나는 기억했다. A를 처음 본 순간 그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그 자전을 보면

 자기 성찰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백들과 자주 마주친다. 그런 기억들이 처음 만난 A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지워버린

것이다.

 

 두시간 쯤 차가 달린 뒤에 차는 어느 한적한 교외 주택가로 진입했다. 비교적 잘 지어진 큰 규모의 주택들이 모여있

는 부촌이었다. 어느 2층 저택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건축업으로 재산을 모

은 A의 새 처남의 주택인데 이곳에서 A의 새 아내가 된 엘레오노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오노라는 오십

대?, 실제는 그보다 젊어보이는 여성인데 본래 우즈벡에서 성장했고 근래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생활해온 인텔리 여

성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엘레오노라가 처음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역시 고려인 출

신인 엘레오노라는 남편 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한국말을 구사했다. A의 새 아내를 만난 뒤에 나는 비로소 A가 왜

카자흐스탄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던 초기만 해

도 그의 아내는 젊은 러시아 여성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러시아 여성과 이혼하고 카자흐스탄으로 가서

고려인 출신의 엘레오노라를 만난 것이다. 이혼과 재혼, A의 경우는 세번째, 혹은 네번째 결혼이 된다. 내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대체로 두번 세번 결혼의 전력자들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혼을 우리만큼 큰 사건으로 여기

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작가나 예술가들 경우는 더 그런 경향이 강하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러웠으나 곰곰 생각

해보니 이혼을 죽음처럼 생각하는 우리 풍속 보다는 도리어 그쪽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

다.

 

  A의 처남 집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우리가 다시 출발할 때는 일행은 세사람이 되었다. 엘레오노라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엘레오노라가 조수석에 앉고 나는 뒷자리로 물러났다. 가브리노는 모스크바에서 결코 가

까운 곳이 아니었다. 중간에 조금씩 휴식을 취하고 가다 보면 어느덧 밤이 되어버린다. 다차는 국도에서 벗어

나 숲의 사잇길을 한참 달린 뒤에 겨우 나타났다. 그런데 차가 국도를 벗어날 즈음에는 이미 주위가 어두운 밤

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차로 가는 숲 속 사잇길은 마치 풍랑을 일으킨 물결처럼 노면의 굴곡상태가 극심했

다.(계속

 

굴곡이 심한 숲 사이 길을 차가 마치 널뛰듯 요동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험한 길은 난생 처음이었다.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

려고 나는 손잡이에 매달렸다.

'낙원으로 가는 길은 역시 쉽지가 않구나.'

나는 혼자 생각했다. A도 좀 민망했던지 뒤를 흘깃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 이젠 집에 못 가요."

엘레오노라가 웃었다. 그 말은 지옥길에 한번 빠졌으니 나는 서울 집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농담이지만 내겐 진담처럼

들렸다.

 차는 2~3킬로의 지옥길을 겨우 벗어나 조금 평탄한 숲길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의 속도가 점점 줄더니 몇걸음 더 나가지 못하고

 차가 그 자리에 서버렸다. 골골거리던 엔진 소리마져 뚝 멎었다. 19년 된 고물 라다 승용차가 지옥길을 통과하느라고 가진 힘을 모두 소

진해버린 것이다. A가 혀를 끌끌 차며 차 밖으로 나갔다. 바깥을 흘깃 보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차창으로 드리워진 긴 소나무

가지의 형체만 보였다.

엘레오노라가 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A는 니나에게 갔어요. 나오세요. 곧 올거에요."

나는 그녀 말대로 차 밖으로 나가서 심호흡을 했다. 니나가 누군가? 그걸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있는데 그 구

름 사이로 달이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이 엷어지면 잠시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큰 호수가  눈 앞에 펼쳐졌다.

"저기 이층 집 보이세요?"

엘레오노라가 호수 건너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건물의 희미한 형체가 바라다보였다. 어두워서 실제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A의 다차에요. 수세식 화장실도 있어요. A가 니나에게 맡겨둔 열쇠를 찾으러 갔어요."

차가 멈췄는데 다차까지 갈 수가 있을까?  차를 버려두고 짐을 들고 걸어서 가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호수는 또 어떻게 건너지?  나는

호수를 우회하는 지름길이 있는 걸 몰랐다. 구름이 달을 가리자, 희미한 형체나마 보이던 건너편 다차 건물이 흔적없이 사라졌다.

나는 자신이 찾아온 성 주변에서 끝없이 배회하는 어느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역시 낙원에 이르는 건 쉽지 않구나.'

 

 이십분 쯤 지난 뒤 A가 돌아왔다. 니나네 마을이 근처에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필요한 짐만 챙겨들고 니나네 집으로 가서 하룻

밤 묵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다차에는 내일 가기로 했다.

니나네 집은 차가 멎은 곳에서 아주 가까왔다. 짐을 들고 밭고랑 사이를 잠시 걸어가자, 통나무 울타리로 바람막이를 한 단층 목조주택

이 나타났다. 경위야 어떻든 러시아 중남부 농가에서 뜻밖에 하룻밤을 묵게 된 건 행운이었다. 고물차 라다 덕분이었다.

 좁은 마당 안으로 우리가 들어서자, 마당 한켠의 닭장에서 닭들이 웬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자기네 끼리 쑤근거렸다. 집 주인 니나가

마루로 나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니나는 칠순에 이른 노인이지만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촌여성답게 얼굴이

구리빛으로 그을렀으며 내 손을 맞잡은 손에서도 사내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때 니나가 처음 보는 내 손을 맞잡으며 마치 오랜 친

구를 맞아주듯 살갑게 웃어주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니나네 집에 들어설 때 나는 이미 솔제니친의 소설 <마뜨료나네 집>을 떠올렸다. 그 무대가 아까강 근처 농촌인데 니나네 집이

있는 가브리노 마을 역시 근처에 아까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농가의 거실에 앉아 주인이 내온 빵조각과 우리가 가져온 음료수로 급한대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니나는 남동생 발로자

부부와 셋이 함께 살았는데 발로자가 집을 나가버린 아내를 찾으러 인근 소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지금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러시아 농가의 거실 풍경을 흥미롭게 둘러봤다. 거실 안쪽 벽에 성모의 사진 액자와 예수의 사진 액자가 나란히 걸

려있고 그 아래 제단에는 십자가 목걸이와 예수와 성모의 인형상 등이 가즈런히 진열되어 있다. 반대편 거실로 들어오는 입구에

는 말로만 듣던 농가의 빼치카가 버티고 있는데 장방형의 이 빼치카는 일인용 침대만큼 덩치가 커서 그 위에서 사람이 잠을 잘 수

도 있다고 A가 말해줬다.

 밤이 깊었고 먼 길 오느라고 지쳤기 때문에 나는 발로자의 빈 침대-사실은 침대라기 보다 벽에 붙여놓은 널빤지-에서 잠을 잤다.

잠을 자다가 누군가가 모포 한장을 내  몸 위에 덮어주는 바람에 잠시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침에 내가 그 얘길 꺼내자, 니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집은 웃음을 웃으며 자기가 한짓이라고 고백했다. 니나는 새벽 같이 일어나 손님들의 아침 준비를 했다.

식탁에는 검은 빵은 물론, 우유와 삶은 계란, 야채 셀러드가 나왔는데 이때 맛본 삶은 계란의 구수한 맛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맛이란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 맛보던 그 계란 맛이었다. 수천마리 닭들을 닭장에 가둬놓고 집단사육하는 양계장

에서 나오는 계란에는 그런 맛이 없다. 내가 삶은 계란을 맛있게 먹는 걸 곁에서 지켜보던 니나가 주방으로 가더니 삶은 계란

 몇 알을 더 가져왔다. 니나는 마치 정 깊은 누나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A와 내가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니나 남편이 전쟁에서 폭탄 파편을 맞고 거길 다쳐 아이를 못 낳았지. 남편은 일찍 죽었어."

식사 뒤 잠깐 문 밖 배추밭 언저리를 산책할 때 A가 들려준 말이다. '거기'란 생식과 관련된 남자의 신체 기관일 것이다.

 

 A와 니나는 마치 오랜 소꿉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웃고 떠들었다. 두사람이 즐겁게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A의 신

부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엘레오노라가 질투할까봐 마음이 쓰일 정도였다.

니나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우리는 아침 일찍 차를 놓아두고 걸어서 A의 다차로 갔다. 가브리노는 과연 듣던대로 풍광이

좋은 마을이었다. 다차가 넓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어서 다차의 앞뜰에서 보면 마치 넓은 호수가 정원 안에 있는

것 같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니나네 마을이 아련히 바라다보인다. A의 다차는 그다지 호화 건물은 아니지만 아방가르드

작가 답게 적어도 외관 만은 주변의 다른 다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건물이었다. 나는 아래층에 배정

받은 방에 짐을 풀어놓고 먼저 앞뜰로 나가서 그곳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았다. 마침 햇빛이 밝게 일대를 비추고 있고 사

방은 고요했다. 그곳에서 방금 떠나온 니나네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고 모처럼 ,정말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맛보려고 낙원을 찾아 헤맬 것이다.

-파클론 아드반치쿠- 이건 러시아에 서식하는 민들레의 일종이다.

 내가 앉아있는 벤치의 바로 옆 자리에 딱 한 그루의 그 민들레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그 민들레가

키가 너무 커서 처음에는 어떤 종류의 식물인지도 몰랐다. 키도 그렇지만 이파리와 꽃수슬이 한국에서 보던 보통 흔한

민들레와는 너무 달랐다. A가 이름과 함께 사람이 먹을 경우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독성을 가졌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틈만 나면 앞뜰의 벤치로 나가서 시간을 보냈고 그때마다 파클론 아드반치쿠를 만나고 이 민들레와 대화를 나눴다.

'다른 민들레는 보통 무리지어 서식하는데 너는 왜 혼자 여기 서있나?'

내가 물으면 민들레는 내게 되묻는다.

'당신도 여기 혼자 있지 않나요?'

'그렇군. 그런데 넌 어디서 여기까지 흘러온거지? 고향이 어디야?'

'고향 같은 건 없어. 여기저기흘러다니다가 혼자 씨앗으로 여기 떨어진 거지.'

'하긴 나도 너랑 비슷해. 몇달 전까지 상상도 못하던 곳에 지금 와서 있는 거야.'

집 밖에 나오면 나는 언제나 이 민들레를 먼저 찾아봤다. 버섯을 따러 A와 숲으로 들어갈 때나 약수물을 길러 약수터로

나갈 때도 파클론 아드반치쿠가 잘 있나 반드시 눈여겨보곤 했다. 열흘 가량 그곳에서 머물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려고

다차를 떠날 때 나는 그 한그루의 민들레와 작별하는 게 무척 아쉬웠다.

"잘 있어. 파클론 아드반치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