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의 자료를 토대로 각국의 혁명이 일어난 시기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참고로 매디슨 자료는 산마로님이 올려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고 오히려 저의 논지를 뒷받침해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경우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은 1인당 GDP기준 974달러수준에서 일어납니다. 1840년대의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면서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활짝 꽃을 피웁니다. 이 시기 영국의 1인당 GDP는 2000달러수준입니다. 영국의 특징은 명예혁명이후 어떠한 독재적 헌정사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일관되게 자유민주주의를 계속해 나간 점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대혁명이 1인당 GDP 910달러수준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내내 혼란하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른바 빈체제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2월혁명의 결과 2공화국이 들어서지요. 즉 1공화국 다음에 제정이 있었고 1848년 2월 혁명의 결과 2공화국이 됩니다. 이 1848년 시기의 프랑스의 1인당 GDP는 1500불수준입니다. 그리고 보나파르트즘체제가 바로 등장하게 되는데 1852년부터 1870년까지 입니다. 이 시기 프랑스의 1인당 GDP는 2000달러근처였고 1870년 비스마르크에게 보나파르트가 패한 이후 들어선 1875년 3공화국시기의 프랑스 1인당 GDP는 2219달러가 됩니다. 이 이후로 프랑스의 경우 자유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되죠.
 
미국의 경우는 1787년 연방헌법이 제정될 당시의 1인당 GDP가 527달러서 1257달러 사이입니다.(1700년이 527달러 1820년이 1257달러) 그리고 1860년 남북전쟁이 일어난 시점의 1인당 GDP는 2178달러입니다.
 
그러면 독일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독일의 경우 프랑스의 1830년 7월혁명과 1848년 2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는데 그 시점의 독일의 1인당 GDP는 1830년이 1328달러이고 1850년 프로이센헌법이 제정될 당시가 1428달러입니다.그리고 비스마르크체제가 들어서는 1862년에는 1645달러이구요. 사실 이 시기 독일은 선택의 갈림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영미프랑스식의 자유민주주의 흐름으로 가느냐 아니면 비스마르크체제하의 군국주의로 가느냐. 안타깝게도 독일은 비스마르크체제하의 계속 군국주의노선을 걷습니다.
 
사실 독일은 혁명이 일어나긴 났지만 그것이 모두 빈체제에 의해 파괴되어 버립니다. 나아가 1000달러에서는 아직 통일도 완성이 안된 상태였구요. 다만 1834년 관세동맹에 의해 나중에 경제적 통일은 이루어지므로서 1850년 프로이센이 주도가 되어 1870년에 정치적 통일이 완성되게 됩니다. 이 통일이 완성된 시점인 1870년의 독일의 1인당 GDP가 1839달러입니다. 
 
결국 독일은 영미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자유주의혁명이 계속 유지를 못하고 매번 빈체제나 군국주의 비스마르크체제에 의해 꺽임을 당하고 만 것이죠. 1000-2000불수준에서 보이는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정착도지 못하고 빈체제와 비스마르크체제에 의한 탄압으로 계속 군국주의노선을 걷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바로 직전의 독일의 1인당 GDP는 3500달러쯤 되죠. 다만 이러한 독일의 1인당 GDP는 한번도 영국 미국 프랑스를 추월하지 못하고 끝납니다.(영국 미국은 완벽하게 1인당 GDP에서 독일을 눌렀고 프랑스의 경우도 독일이 가끔 몇십에서 몇백달러 앞선 경우는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기간동안 독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마지노선의 시기가 2000달러 시기의 독일통일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부정적인 유산이 많은 독일은 마지막 시기인 2천달시기의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지 못한 결과 그들의 헌정질서는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인 의존성에 익숙하게 되어 버립니다.
 
1차세계대전에 패했을때 그들의 1인당 GDP는 전쟁전 3500불 수준에서 2500불수준으로 내려가고 1인당 GDP 1000달러 하락한 시점 그러니까 전체 1인당 GDP의 30프로정도 하락한 시점에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서게 됩니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그 피해정도가 꽤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GDP 2000불 수준이므로 공화국이 들어서는데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체제가 가져온 의존성은 곧바로 히틀러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물론 전쟁이나 세계공황과 같은 외부적인 영향도 켰죠. 하지만 저는 1000-2000달러 수준에서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적 의존성을 키우지 못하고 비스마르크 군국주의노선에 길드여졌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영미프랑스의 경우는 전쟁의 경우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의 국가주의 군국주의를 이겼고 나아가 공황이나 빈번히 일어나는 식민전쟁의 시기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은 1932년에 나치당이 제 1 당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 결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총재로 임명되고 제국의회가 4년간 독재권을 부여합니다. 그 결과 의회의 승인없이 어떤 법률이라도 제정할 수 있는 수권법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죠.(다수의 지배지만 이것이 다수에 의해 대의제 민주주의가 부정됨으로써 대중독재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이마르공화국시기 1919년에서 1932년까지의 1인당 GDP는 어떻게 되었을 까요? 1919년 2500달러에서 1928년 4000달러 1932년 3300달러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상 1차전쟁의 상처를 자유민주주의를 최초로 경험한 바이마르공화국은 나름 회복한 것이죠.(아 그리고 고 사이 1923년 히틀러는 한번 쿠데타를 감행하다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만 바이마르공화국이 어렵게 된 것은 중간에 1929년의 세계대공황이 결정적 이었습니다. 1928년 4000달러였던 것이 세계대공황의 3300달러까지 추락했으니 마치 전시와 같은 상태였죠. 바로 이 시기에 히틀러가 등장한 것이죠. 히틀러의 시기 1932년 3300달러에서 1944년 6000불까지 1인당 GDP가 올라게 됩니다. 1945년도에 4000달러 1946년 2000달러로 뽁삭 내려앉게 되지만요. 하지만 독일인들은 과거 1000-2000달러에서 자유민주주의 혁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비스마르크체제를 용인하는 바람에 매번 전쟁에서 지게되었고 그 결과 1000-2000달러에서 실패한 자유민주주의를 1차세계대전이후에는 2500불에서 2차세계대전이후 다시 2000달러에서 시작하여야 할 운명이 된 것이죠. 1차세계때전이 끝나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음에도 다시 히틀러를 선택하는 바람에 결국 독일의 군국주의헌정은 처참하게 실패로 귀결되고 2차세계대전이후에야 자유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됩니다.
 
이제 한국은 서유럽의 헌정사에 비교해서 어떤 경로를 밟아 왔던 것일까요?
 
한국의 경우 남한만 놓고 보면 1870년에 1인당 GDP는 600달러 한일합방된 1911년는815불수준입니다. 이것만 봐도 1911수준에서 남한에 자유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세인 일본에 의한 한일합병이 가지는 반자유민주주적인 성격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나아가 1894년에 있었던 동학혁명이 가지는 성격이 초창기 자유민주주의혁명의 맹아적 성격을 옆볼 수 있는 것이죠. 나아가 1896년 독립협회와 1898년 만민공동회등은 자유민주주의적 성격이 농후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한국은 1인당GDP 815불 수준에서 식민지가 됩니다. 지금 따져보면 일본은 1688년의 영국을 먹은게 됩니다. 그리고 식민지시기 1930년까지는 1000불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1930년 일본이 전체주의체제로 전환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하면서 1인당 GDP는 상당히 증가하게 됩니다. 1933년에 1247달러를 기점으로 1937년 중일전쟁당시에는 1561달러 1938년에는 1619달러로 피크를 이루죠. 800달러에서 1600달러가지 마치 2배가 올라간 착시효과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다 해방당시인 1945년에 한국의 1인당 GDP는 683달러가 됩니다. 그냥 산술적으로만 보면 기간에 한국의 GDP는 오히려 815달러에서 683달러로 줄어든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이 남한정부를 수립하는 시점인 1948년 다음해에는 1인당 GDP가 819달러가 됩니다.(남북이 나뉘어졌지만 어차피 줄어든 남한만의 GDP를 줄어든 남한만의 인구로 나누므로 1인당 GDP의 흐름을 보는데 문제는 없음) 
 
그리고  1950년 6.25가 있었지만 전쟁물자가 공급되는 통에 1951년만 잠시 줄어들고 다음부터 1인당 GDP는 오히려 올라갑니다. 1953년 전쟁이 종결되는 시점에 1인당 GDP는 1072달러가 되거든요. 그리고 4.19혁명이 일어날 시점의 1인당 GDP는 1250달러 수준입니다.
 
당근 이 시점의 4.19혁명은 서유럽의 헌정사를 놓고 볼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이 모두 이 시기에 한번은 혁명이 일어났거든요. 영국은 그 한번의 혁명으로 끝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유지시키면서 확대발전 시켰고 프랑스는 1000달러수준에서 한번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뒤 제정이 들어서면서 실패했다가 1500불수준에서 다시 한번 혁명이 일어나고 다시 보나파르트즘 체제에 의해 무너졌다가 1870년 보나파르트체제가 독일의 비스마르크와의 전쟁으로 망한 뒤에 2000달러수준에서 제 3공화국 출범으로 확고한 자유민주주의노선을 걸어가게 되었거든요. 반면 독일의 경우는 1000-2000달러에 프랑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혁명이 있었지만 매번 빈체제와 비스마르크체제에 의해 그 기운이 꺽이면서 1차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군국주의노선을 걷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1250달러에서 일어난 4.19혁명과 그 혁명의 유산인 장면정부가 5.16쿠데타로 인해 헌정이 중단되어버린 것이죠. 사실 이때 1공화국은 중단된 것이고 군사무인정부가 들어선 것입니다.(우리나라 헌법학계의 권위자중의 한분인 권영성교수의견해입니다.) 그리고 군사무인정부에 의해 1972년 유신이 나오기 직전의 1인당 GDP는 2000달러 수준이었습니다. 즉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대통령선거는 대한민국이 독일식의 비스마르크 총통체제로 가느냐 아니면 영미식 자유민주주의체제로 가느냐의 갈림길이었던 것이죠. 결국 그 선거에서 한국은 박정희를 택하므로써 대중독재의 시기로 들어간 것이죠. 다수의 지배에 의해 자유민주주의의 뿌리까지 무너져버린 것입니다.(5.16쿠데타로 자유민주주의 골격이 훼손된 것에 비해 유신은 자유민주주의 뿌리가 거덜난 것에 해당됩니다.) 그 결과 한국은 독일식 국가주의 군국주의적인 역사적 의존성의 경로를 밟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식민지시기까지 고려한다면 한국은 독일식모델의 역사적 의존성의 경로를 밟게 된 것이 더욱 확실하죠. 다만 독일과 차이가 있다면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파국으로 귀결되지 않고 기적과 같은 영국식 명예혁명의 경로를 아주 늦었긴 했지만 밟아갈 수 있는 기회를 6.10항쟁을 통해 얻게 된 것이져. 결정적으로 영국식모델이 정착된 것은 1997년의 정권교체와 그 뒤 민주당의 재집권의 성공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다시 급격한 회귀를 막을 수 있게 된 것이져. 자유민주주의적인 헌정경험이 10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어느정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해서 다시는 쿠데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죠.(김대중이 집권할 때만해도 빨갱이론을 들이대며 군부쿠데타 어쩌고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때 4000달러수준에서도 한국은 군부에 의해 그 국민이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참사를 겪게 된 것이고 근 25년 가까이를 군부의 서스런 무장통치아래 전 국민의 정치적 시민적 기본권이 차압당하게 된 것이죠. 참고로 그 시기의 시민적 정치적 자유도는 프리덤하우스의 기준에 의할때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4000달러 수준에서도 그렇게 된 배경은 결국 대한민국이 1971년 선거에서 다수의 지배논리에 의하여 스스로 국가주의 군국주의 의존성을 택한 결과인 것이죠.(물론 선거 자체가 부정선거였던 부분은 별론으로 하구요) http://www.freedomhouse.org/template.cfm?page=5
 
결국 대한민국은 1987년 6.10항쟁으로 인해 새로이 다시 자유민주주의 혁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1987년 당시의 한국의 1인당 GDP는 7000달러 수준이었죠. 이 정도면 늦어도 한참 늦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독일처럼 전쟁이나 경제적 침체를 겪지 않은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이기는 합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1979년에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정희가 말년에 핵개발과 북한과의 전쟁에 골몰하였던 것은 전형적인 군국주의노선의 귀결인 남북전쟁으로 갈 공산이 컸습니다. 그랬다면 한국도 독일과 같은 꼴을 당했겠지요. 다행히 1979년 박정희가 죽어주고 비록 군사정권이지만 다른 군부세력이 들어서고 나아가 알게 모르게 중산층이 확대되어(단 중산층은 결정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독일은 중산층이 나찌를 택했을 정도니깐요. 아이엠에프때 우리가 이회창을 택할뻔 한 것과 비슷하죠.) 1987년의 자유민주주의시민혁명이 성공하므로써 한국은 국가주의 군국주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죠.(1987년 6.10항쟁의 결과 프리덤하우스상의 한국의 정치적 시민적 자유도는 급격히 올라갑니다. 거의 2배수준으로) 즉 서서히 국가주의 군국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코스를 그나마 밟아왔고 그 결과 자유가 확대되면서 한국경제의 창발성도 증진이 되고 그랬던 것입니다. 니아가 1997년 아이엠에프로 인해 구시대적인 박정희모델이 가지는 한계 즉 아드레날린적인 한탕 자본주의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계속 가능하고 창발적인 자본주의로의 전이가 이루어지게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서구유럽은 자신들의 성공케이스를 다른 개발도상국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냉전의 논리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저력을 다른 개발도상국이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도의 논리체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져. 그 대표적인 것이 산업화---->민주화논리인 것입니다. 서구 자신들은 민주화--->산업화 경로를 겪었으면서 말입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고도의 창발성 그 힘에서 나오는 패권주의파워를 그들만이 갖겠다는 리비도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속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서구 근대화가 가능케 한 그 근본적인 정신이지 그 껍데기가 아닌 것이죠. 서구의 패권이 그 근본 정신에서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1000달러에서 2000달러는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화되는 시점이지 산업화가 완료된 시점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동안 자카리나 쉐보로스크등이 주장한 6000달러이상으로 산업화가 완성된 이후 민주화경로노선은 서유럽의 헌정사를 통해 볼때는 100프로 허구입니다. 나아가 군국주의 전체주의 독재노선으로 갔던 독일은 6000달러 가까이 갔다가 2000달러로 꼬라박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