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구체적 사례와 대안이 부족한, 일개인의 관점에 의한 상념에 지나지 않기에 자유게시판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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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비정규직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사회는 명확하게 그룹을 지을만한 결정적인 가치관이 혼재(부재?)된 상황으로 보입니다.
비정규직은 스스로의 정체성이 희미합니다. 임금도 제각각이고 삶의 가치관도 제각각이죠. 일례로 민노당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비정규직도 많을거라 보여지며 진보신당의 경우는 진중권의 이름만 알아도 다행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기존의 한나라-민주당 대립국면에는 점점 환멸을 느껴가고 있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그들이 합의하는대로 수동적으로 따라갈 것처럼 보입니다.
팽배한 양비론은 사회 곳곳에 파고 들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 보았을때 어쩌면 이런 혼란의 상황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친일/반일, 친미/반미, 반북/종북, 좌파/우파, 진보/보수, 영남/호남, 전후세대/전쟁세대, 자본/노동, 개발/환경, 20c/21c.....

어떤 젊은 비정규직이 있습니다. 가끔 알바를 뛰거나, 길에서 핸드폰을 팔거나, 친척의 중소기업에서 영업을 뛰기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사람은 일본 만화를 즐겨 보면서 일본의 독도 망언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욕을 쏟아붓기도 합니다. 푸시켓 도어즈의 음악을 듣지만 미국의 중동전쟁에 관한 정보에는 소극적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노동집회에는 고용안정을 가진자들의 욕심일 뿐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고, 만약 본인에게 빌딩 한채나 로또의 자본이 생긴다면 수집된 재테크정보를 종합하여 사업자로서 효율적 자본활용의 야무진 계획도 꿈꿉니다. 여름에 바다에서 노는것을 좋아하지만 4대강 사업이 환경에 미칠 영향보다 고용에 실질적 도움이 안된다는 의견때문에 대체로 반대를 하지만, 다니는 회사의 업무가 힘들어 다른일을 알아보는것에 대한 관심에 비하면 4대강 논쟁은 한가한 정치놀음으로만 보입니다. 아버지는 영남출신의 골수 한나라당이며 이명박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친구와 만나서 피시방에 게임하러 갑니다. 자신은 무교이지만 여자친구가 기독교인데 그래서 가끔 같이 교회에 나갑니다. 어느날 여론조사 전화에 심심풀이로 응했는데 자신을 중도보수의 카테고리에 포함시킵니다... 이윽고 총선이 다가와 투표장에 갑니다. 과연 이 젊은 비정규직은 어느 정당에 투표할까요....

이 사람은 가상의 일례이지만 이 사람이 현재자신의 비정규직적 정체성을 인식하여 어떤 정치 조직화의 길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의 소득과 고용안정 보장을 해준다는 현실적 기초를 제공하는 집단으로 미니멈하게 요약 될것입니다. 그러려면 그가 자신의 자본 계급적 위치를 각성하고 자신의 현실 소득 이득을 보장할 정치집단을 선택하여 투표하게 되어야 하겠지요. 이런 각성을 촉발 시키기 위해; 진보정당의 어떤 그룹들은 자본의 허위적 선전으로부터 그들의 계급의식의 무지를 끊임없이 계몽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것 같습니다만.. 사실 이들이 정치적 자각을 하는 가장 현실적인 상황은, 그들이 재취업되지 않고 소득없는 실업자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즉, 지속적으로 그들의 몸이 가난할때 입니다.

어쩌면 요즈음이 비정규직이 정치세력으로 결집하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단계일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대규모 실업이란 공포에 의한 반작용이라면 미리 이런 정치적 각성이라는 현상을 빚을수도 있을것입니다. (이런 공포감 조성도 어떤그룹의 전략적 허위일 가능성도 있겠지요. 어떻든지 이런 사태를 미리 예측하여 계몽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식인들의 논쟁의 실질적 의미는 현시된 추상적 불안정함을 관측하고 실체적 대안을 치열하게 고민하여 예측가능한 사태에 대비하는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이른바 지식인의 역할은 과거의 교훈을 공부하여 대중들에 앞서 미리 예감하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어떤 무브먼트를 조직하여 대중을 급속도로 끌어들이기에는 현실적으로 동력이 약할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격변을 맞이하여 몸이 힘들지 않으면 기존체제의 안정성에 끝끝내 기대어 보는것이 역사의 통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테크닉적으로 이들의 소득을 납득가능하게 보장해주는 정도의 정치세력을 넘어서는, 댜양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비슷한 이념이나 가치로 아우르는 정치집단의 존재가 어쩌면 출현하기 힘들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우리사회가 작금의 불경기를 근근히 넘어가고 비슷한 경제규모를 누리면서 유지할 수 있을때(집권 한나라당의 현실적 전략지침일 것입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안정과 행복의 프레임, 예를들어 아파트를 기초로한 가족부양과 안정된 사교육, 약간의 재테크를 원한다면, 이들은 아마도 기존의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도 이미 충분한 선택지가 있을것입니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안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끔만 근근히 상황을 유지시켜도 이들이 사회의 불안 세력으로 돌변하지는 않을것입니다. 여자친구가 생기고 결혼하고 아이가 출산되는 순간, 혁명이란 그저 역사책에서나 구경하는 말이 되겠지요. 당장 홈플러스에 장보러 가기위해 뉴모닝이라도 한대 계약하면 친일이냐 반미냐 그저 하루밤 안주거리에 불과하고, 홈플러스 캐쉬어들의 고용상황이란 본인이 누리고 산다는 것의 대세에는 지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느낄것입니다.
요즈음 위기에 닥쳤다는 민주주의란 어차피 때되면 주어지는 투표용지 한장이 전부인 상황에서 그다지 와닿지 않는 문제입니다. 민주주의란 추상성은 언제 정부가 내 의견대로 돌아간적 있었던가 하는 실체적 경험앞에 무의미해 집니다. 다 시간 지나면 그놈이 그놈으로 보아 버리는게 속 편할 일일 것입니다.(지난주 4대강 반대집회에 인원수나 채워주려 나가보았지만.. 그곳에서 느낀것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환경이란 가치는 행복의 가치에 그다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노무현이 대표로 욕껌을 씹혔듯 지금 그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이명박으로 바뀐것일 뿐 아직까지 역사의 실체적 변화라는 큰 대류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와닿지 않는 가치를 가진 집단의 데모란 생활에 불편한것이지 생활에 절실한 것이 (아직은..) 아닌것입니다. 역으로 당사자 그룹의 생존에 관련된 집단은 그들의 데모에 대하여 가치적 연관이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무관심한 사회에 환멸을 가질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만약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수백만의 비정규직들이 어떤 일정한 정치적 정체성을 가지고 조직화 된다면 현재로서는 이념적으로 친일이냐 반미냐 빨갱이냐 보수꼴통이냐 하는 역사적,이념적 가치 보다는 자본계급에 의한 피고용인으로서의 계급의식에 기인할것이라 보여집니다.
자신의 자본계급의식이 분명하게 조직된 그 양적인 예를 지금 진보정당의 지지율을 근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진보정당의 어떤 이념적 가치를 지지하는 학생과 지식인 계층이 그 지지율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 가치와의 연동으로서 자본계급적 정치의식을 갖은 일반인들도 그정도 비율을 가진다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현실적 소득이익을 위해 자신이 참가한 그룹의 이념적 가치학습을 상식선에서 용인하고 따라가주는 대중들이 갖는 비율일텐데, 계몽에 의한 방법으로는 이정도가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도합 10%만 되어도 정치적 역할은 나름대로 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하지만 역시 상대적 소수역할로 한정 될것입니다.

현재의 경제수준만 근근히 유지한다면 나머지 대부분의 비정규직은 정치이념에 무관심하거나, 한나라당/민주당 프레임에 다 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집권세력의 주요정책이슈인 남북문제도 사실 남한의 정치집단 간의 대북방법론의 변수보다, 북미간의 절대적 상수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대중 전반의 (허무적인?)정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각 진영의 지식인들의 이와 관련되어 제공하는 정보는 이런 무력감을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나와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치에 함몰되어 현실적 만족에서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것은 그저 어리석을 뿐입니다.)



저는 어쩌면 더 멀리 내다보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이란 가치>에 속하는 구성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인데, 만약 앞으로 모종의 역사적 과정을 겪은 후에, 그 행복의 가치에 아파트나 사교육 외에 어떤 문화적, 인류의 자기성찰적 가치관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면(제가 생각하는 선진국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사실 이들을 묶는 그룹(정당?)의 탄생이 혼란가운데 준비되어야 할것입니다. 국민소득 몇만불이 되어야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어느정도의 최소한의 소득을 유지하면서 미래의 문화적 정서를 공유하는 행복감이란 먼 미래의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 젊은 세대에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불안정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리저리 돈을 위해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정치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자본계급적 이해에 둔감할지라도 그들이 생활에서 느끼고 행복해하는 요소에서 어떤 문화적 가치를 찾고,지키고 싶어하는 욕망을 발견합니다. 낡은 역사적 대립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뛰어넘고 싶지만 자신들은 절실하게 몸으로 겪어보지 못했기에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 당사자로 보이는 기성세대와 현존하는 정치세력이란 기득권을 갖거나 유지하는데 몰두하는 권모술수의 모습으로 판단해버리고 말때, 새로운 세대의 지나친 정치무관심과 극도의 개인주의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으로 보입니다.(젊은세대들의 부정적인 모습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책임의 대부분은 기성세대에게 기인하기 때문에 이 부정적 측면의 해결에는 사회의 주류세대들의 각성이 선행되어야 할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기성세대는 자신이 겪은 사회를 스스로 매조지하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예를들어 만약 그것이 민주화라는 가치라면 그 가치를 위해 같이 싸워주지 않는다고 젊은세대를 욕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꿈꾸는 사회에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겠지만, 과거 식민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이념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실용이란 이름의 무책임한 물신만을 가르쳤을때 그 혼란의 책임을 사회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에게 돌리려고 하는 기성세대의 불만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파렴치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의 민주주의 정치의 표상들: 한나라당의 몰가치와 민주당의 무능은 기성세대가 흙탕물을 튀기며 온 몸을 더럽히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해결을 보아야 할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문제에 기성세대가 일상생활이라는 울타리로 도피하고 외면하고 무관심해질때, 그 미래의 모습이란 <혼란의 유전>뿐일 것입니다. 투표라는 방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을 결단내든 민주당을 해체하든.. 어떤 모습이던지간에 무관심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설득과 교류에 노력해야 함이 마땅할것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 비극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로인해 야기되는 가치관의 파탄상황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싹이 틔워지는 방법이란...기존체제의 수정과 보완이 아닌, 대체로 <근본적인 붕괴>라는 사태를 동반하는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립적 가치관은 우리나라의 비극적 역사를 떠나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정보는 무차별적으로 오픈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의 현실과 다른 세계의 현실 사이의 괴리는 더욱더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주의와 냉전이라는 대립적 가치관의 역사가 인구 5천만의 사회에 집중되었을 뿐만아니라 점점 오래되어가고(낡아가고) 치유되지 않는 사회적 갈등에 새로운 새대는 점점 환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먹고 살기에도 빡빡한 이들에게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라고 기성지식인이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무관심한 이상 니들 고생이라고 한마디 푸념하는 것으로는 어떠한 만족과 보람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늦기전에 친일/반일의 구조를 뛰어넘는 가치관.. 친미/반미를 뛰어넘는 가치관... 자본/노동을 뛰어넘는 가치관...등등.... 겉모습은 파편화된 지식인들일지언정 아마도 우리 사회는 그런 대안의 가치관을 보이지 않는곳에서 이미 느끼고 이야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청산이 필요하다면 그 방법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여) 과거의 양자택일적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추상적 지향점에서 일치하지만 구체적 관점과 해결방법에서 결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추진력에 아직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막연하게나마 이륙의 연료를 채우고 있지만 점화의 시점은 아직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할까요..
 
문제는 기성 정치권이 아직도 이 대립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인데, 이는 그들 조직의 주류가 아직도 그 프레임이 자신들의 정치력을 지탱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들고 일어날 정도의 빈곤을 모면하는 선에서 자본이 꾸준하게 고용을 해주고 소득을 보장해 주는 한, 어쩌면 이 대립의 프레임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기득권에게서는 그 이용가치를 가질것입니다. 이에대한 사회 지식인들의 반동의 동력이 진정성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대안적 가치를 설득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만, 그 내용이 단순한 자본계급적 만족을 주는 선에서 현실의 문제만 모면해버리자는 기술적인 발상이라면 새로운 세대와 미래를 위한 근본적인 행복의 가치를 고뇌하는 모습은 아닐것입니다.
이정도 먹고 살게 해주었으니 결국은 나는 내가 존재하기에 바쁜것이고 너는 너의 존재하기에 바쁜것이니라..라고 대충 얼버무린채 가족의 안녕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그저 그들에게 일상이란 익숙하고 진부한 현상적인 현실론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한정된 이익을 각자 능력껏 다투어 적자생존한다는 시장만능 우생학의 결론으로 귀착될 것입니다. 그에따른 박탈감은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분열과 적대감으로 되돌아 올것입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에의 희망은 질식해 사라질 것입니다.
역사는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우리는 분열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고속성장으로 절대빈곤을 벗어난 사실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정의나 원칙, 인간본성에의 성찰등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런 가치관이 실용주의라는 무차별적 몰가치적 허구의 가면으로 포장되는 이상, 우리의 행복이란 여전히 아파트와 사교육,자동차에 저당 잡혀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비극의 역사는 외적인 물리적인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내적 가치관의 손상이 세대를 이어서 환멸이란 이름으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에게서 새롭게 창조되는 문화란 아직은 부족합니다. 조상들의 유산을 과대포장하거나 지나치게 폄하하는 조울증적 자세라거나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몇몇 공산품과 스포츠스타에게 전 국민들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려하는 허전함이 있을 뿐이지요. 수많은 인문 문화적 가치들을 이식받아왔지만 아직 우리 스스로 미래에 누릴 어떤 생활철학적 문화적 가치관을 생산하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누리는 문화에 자긍심이 없는 한 우리는 배불리 먹고살아도 늘 허기져 있을것이며 세계가 치열하게 창조하는 정치, 문화적 권력에 눈치를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늘 다른 사람의 뒤를 쫓아 그들의 흉내내기에 급급할 따름이겠지요. 냉소적으로 본다면,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아직까지는 엄혹한 역사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주장의 반복이야 늘 패배주의적 악순환만을 전망시키겠지요. (하나의 예로서 한국연예인들의 미국진출에 언론이 대대적 기대감을 부풀리는 현상을 들어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세계라는 메이저에 대해 마이너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현상적 문제는 현실적 고용보장과 기초소득 보장의 틀에서 꼭 해결되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 비정규직이란 문제도 우리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한계적 상황에 귀결될 것이란 점입니다. 그 한계적 상황이란 기존의 제국주의적 욕망의 희생자이면서도 그 가해자적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이 학습되어왔고, 물신적 가치관이 실용으로 포장되어 문화, 인문적 가치관이 박물관에조차 말석으로 처박힌 상황에서 기초 소득을 보장하는 차원이란 우리나라의 운명을 강대국에 맡기는 거대 프렉탈의 모습이 한 개인이 사회에 패배적으로 귀속되는 기초적 프렉탈을 띄게 되는 상황으로 특정지워보는 비관론입니다.
이 한계상황에 대한 반동은 현재의 기성 지식인들 사이에서 꾸준하게 반성 비판되어가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현실적으로 엄습하고 있는 패배주의를 극복하여 더욱 가시적일 수 있도록 힘을 내어야 할것이라 생각합니다.(이곳 아크로도 그런 모습의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저의 느낌으로 이미 새로운 세대는; 스스로 그런 가치를 창조하고 발견하고 싶은 열망에 가득차 있고, 그들이 납득할만한 기성세대의 반성의 열매라면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기성세대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세계로 열려있는 정보를 토대로, 기존 우리역사가 극복하지 못한 대립적 관점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그들만의 문화적 행복의 가치를 심고 가꾸어 나갈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젊은 비정규직들도 결국 소득보장의 불안함을 다른 정서적 만족으로 채워나갈것이 분명하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 또 우리역사의 비극적 특수성 가운데에서 세계의 보편적 구성원으로서 역할하는 새로운 문화적 가치마저 발견해낼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관은 기성세대의 몫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식민과 분단의 고통을 유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그 후 60여년만의 상황에서 어쩌면 대단한 일을 해낸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의 결과를 당장 눈앞에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미래에 대하여 희망하는 자세만큼은 버리지 않는 모습을 다음 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