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사실은 이번 선거에 있어서, 자포자기로 관망하고 있었다.  박근혜건, 문재인이건. 내가 별로 지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딱히 어느쪽을 지지하거나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관전하되 문재인이 되건, 박근혜가 되건 후보자들이랑 그 지지세력이 알아서 하라고 놓아 둘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국정원 여직원 감금사건에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분하고 화가 났다. 도무지 몸이 막 부들부들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치솟아 오르고, 거센소리가 입 밖으로 절로 새어나왔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분노는, 내가 문재인 후보나 그 주변 사람을 정치인으로 높게 평가치 않는 것과는 아주 별개이다. 정치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이 사건은 대단히 잘못된 사건이었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가치들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이 사건에서 파시즘의 잔재를 보았다.

지금 저 짓거리를 벌이는 패거리들이, 감히 '민주'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던 그 사람들이 맞는가? 그게 아니라면 저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화'는 정말로 일베에서 글쓰는 한량들이 말하는 그런 "민주화"인가?

우리가 왜 군사 독재 시절을 치를 떨고, 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는가? 그 때는 인권도, 절차적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없는 꼬맹이들이 대통령 욕하는거 따라하면, 주변에서 나이든 형들이, '야, 그런소리 하면 잡혀가.' 라고 말해 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너 빨갱이지? 너 집 어디야? 어쭈 말 안해? 켕기는게 없으면 왜 거짓말해 새X야! 가방 내놔봐. 분명 불온서적 있을꺼야. 안내놓는거 보니까 빨갱이가 확실하구만 ' 이딴 식의 논리가 통용되던 군사 독재 시절이었다. 소시민들은 언제 그 억압적인 권력에 자기가 희생될까 두려워 벌벌 떨어야 했다.

파쇼적 군사 독재 사회가 끝나고 민주화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고 법치주의에 따라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그 어떤 권력도 정당한 절차 없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커다란 원칙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저 국정원 여직원이 하루에 2시간만 근무하는 땡보직이었건, 재택근무였건, 일베를 들락거렸건, 엠팍을 염탐했건, 실제로 문재인 후보에 대해 악플을 달았건 아니건,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국정원이 직원 70명씩 세 개 팀을 가동해서, 무려 인터넷에 조직적으로 악플을 다는 일씩이나 시켰다는 황당해 보이는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손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노트북 하드 디스크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로 "문재인 후보 댓글 작성 요령 전달사항, 국정원 심리공작 제1국" 같은 문건이 들어있을 지도 모르지. 그치만 그건, 민주통합당과 그 지지자들이 저지른 행위를 전.혀. 정당화 시켜주지 않는다. 독재 시절, 빨갱이 사냥을 해보면, 실제로 주체사상의 강철서신 같은 문건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걸렸을거고, 진짜로 북에서 내려왔거나 지령을 받는 간첩들도 많이 걸렸을 거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군사 독재 시절의 초법적인 빨갱이 사냥이 절대로 정당화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법적 근거없이, 노란 잠바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집앞에 몰려가서는 생중계 TV로 실명과, 집을 공개 하고, 신분을 노출시키는걸 꺼려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신분을 공개하는 일은 ...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집 문 앞을 봉쇄하고, 개인이 관리하는 컴퓨터와 하드디스크를 영장이나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갈취해 갈 때까지, 개인을 집안에 감금하는 것은 ... 우리가 수십년간 독재와 싸워서 어렵게 얻어낸 인권과 법치주의라는 기본이 되는 권리를 일거에 와르르르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법적 근거가 없다는 말에 대한 관련 자료를 덧붙인다. 선관위발표(http://www.nec.go.kr/nec_new2009/BoardCotBySeq.do?flag=&cmSeq=&bmSeq=8&bcSeq=1116&getYn=Y)에 따르면, 처음 선관위 사람과 제보자(민주통합당)가 함께 이 오피스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법행위 (이를테면 유사 선거운동 사무소)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이후 새로 밝혀진건 그 여자가 국정원 직원이었다는 사실이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딱히 위법이라고 할 만한게 없다. 경찰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영장을 신청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다. 신청해봤자 발부가 안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1212121207013)  결국 30시간이 넘게 갇혀있던, 이 여자는 자기 컴퓨터와 자료를 제출했는데,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었으니 결국 "임의 제출"의 형태를 띄었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1213162414008)


나는 이런 행위가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고 화가 났다.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것도, 새누리당 광신 지지자들이 아니라, 지금 민주통합당 쪽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독재시절 빨갱이 사냥 시절로 우리가 후퇴하고 있는 것인가? "죄가 없으면 빨리 노트북 내주면 되는거지. 미적대는거 보면 뭐가 있어."라는 류의 소위 야권 지지자들의 댓글은 더더욱 가슴 아팠다. 저 사람들은 왜 야권을 지지하고 있는지... 왜 독재를, 독재자의 딸을 반대하고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단 몇 분이라도 고민해 보았던 적이 있는 것일까? 혼자서 안주없이 소주라도 먹으면서 속을 삭혀 보려고 하였지만, 도저히 가라앉지가 않았다. 저 따위 인간들을 한때나마 아군이라고 믿고 있었던 건가.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크게 봐서 야권 지지자이기 때문에, 혹시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돕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선거에서 유-불리 하기 때문에 조용히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새누리당 알바라고 야유 받아도 상관없다. 일베충 소리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지금 본 현장은 불의요, 야만이요, 우리가 그토록 힘들게 얻어낸 민주적 가치를 정면으로 짓밟는 행위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꽤 높고, 그렇게 되면 이 행위를 비판하는 나같은 사람들은 비웃음 받겠지만, 상관없다. 이 민주적 가치를 얻어내려고, 훨씬 더 암울한 시기의 지식인들은 훨씬 더 어려운 고통을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이야기 했다. 이 가치가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나의 양심의 문제이다.


나는 고발한다.

민주통합당과 그 지지자들이, 문재인TV와 트위터등을 이용하여, 이 여직원의 실명과 집을 공개하고 지지자들을 집앞으로 불러 모은 것은, 인권의 보호라는 민주적 가치를 정면으로 침해한 것이다.

민주통합당과 그 지지자들이 초법적으로 국정원 여직원의 집을 봉쇄하고, 컴퓨터와 자료를 요구한 것은, 법치주의라는 또다른 민주적 가치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민주통합당과 그 지지자들이 저지른 이 일련의 행위는 광기어린 파시스트들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동과 다름이 없다.


나는 다시 고발한다.

소위 '진보진영'의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진보진영'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진보진영'의 멘토라는 사람들이, 민주적 가치가 정면으로 훼손되고 있는 광경을 못본척 하고 있거나, 심지어 거기에 동참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고발한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진영이 선거에서 불리하게 될까봐. 혹은 그 진영의 지지자들에게 야유를 들을까봐. 자기 때문에 선거를 망쳤다는 책임을 묻게 될까봐. 입을 닫고 있는 그 한심한 꼬락서니들을 고발한다.

사람(인권)이 먼저고, 정의(법치)로와야 한다는 구호를 앞세우던 문재인 후보는 이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가? 새정치를 위해 네거티브 흑색선전을 없애야 한다던 안철수 교수는 이 문제가 안보이는가? 조국 교수는 본인이 법학 교수라는 사람이, 이런 문제점을 지적할 생각은 커녕, 본인이 신나서 저 여직원 집주소를 리트윗하고 앉아 있나? 파시즘에 대해서는 언제나 일기당천으로 저항할 것 같던 진중권 교수는, 여직원에게 수상한 뭔가가 있다고 하면서, 입을 닫고 있지 않은가.


나는 또 고발한다.

수많은 '야권 지지자'들이 이 사건에 불편을 느꼈으면서도, 선거에 누가 될까봐 입을 다물고, 그냥 넘어가기를 바라고 있는 행태를.


지식인으로서, 나의 양심을 걸고 나는 고발한다. 지금 이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광기, 파시즘의 광기이다.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 된다는 광기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보다 큰 선'을 위한 것이고, 상대방의 집권은 '절대악'이라는 광기이다. 우리편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제거해야할 대상이라는 광기, 그 광기가 이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건 나는 두렵다. 이 광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 뿐이다. 그러니 좀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양심을 걸고 나는 지금의 이 광기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야권 정치인, 야권 지식인, 야권 지지자라는 사람들이, 그중 일부라도 나의 고발을 듣고 지금의 이 광기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