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701222640

소쩍새 울음이 슬펐다

대통령 노무현이 '대북 송금 사건'의 특검을 수용했다. 국무위원 중 단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반대했지만 듣지 않았다. 통일부 장관 정세현은 이렇게 반대했다.

"대북 사업 추진 과정이 공개되면 남북 대화와 민간 교류 등이 중단될 것입니다. 햇볕 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자 산업자원부 장관 윤진식, 농림부 장관 김영진, 여성부 장관 지은희, 환경부 장관 한명숙 등이 이에 동조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허성관만이 "부산 지역 민심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라며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토론을 지켜보던 노무현이 중간에서 말을 잘랐다.

"이 얘기는 그만합시다. 내게 생각이 있습니다."

노무현의 '생각'은 바로 특검 수용이었다. 노무현은 햇볕 정책 승계를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 근간을 흔들어 버렸다. 소위 '노무현의 사람들'은 국민의 정부와 거리를 두려 했다. 햇볕 정책을 승계 아닌 극복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측근들은 '김대중 산맥' 속의 '노무현 산'이 되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노무현은 대북 정책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남북 관계는 미세한 균열 하나가 파국을 불러올 수 있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결국 멀리 보지 못했다.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특검 수용은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대북 송금은 남북 관계를 고려한 통치 행위로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지만 노무현은 이를 일축해 버렸다. 김대중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특검 수용은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추동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당장 남북 대화가 겉돌았고, 남과 북은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을 허비했다. 북한은 남쪽 정부를 의심했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임기 말에 가서야 남북 정상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그 합의는 이명박 정권에 의해서 간단히 외면당하고 남북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남북 관계의 파탄은 이미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검 수용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국민의 정부 사람들이 줄줄이 불려가 죄인 취급을 받았다. 끝내 금융감독위원장 이근영, 경제수석 이기호, 비서실장 박지원이 구속됐다. 김대중은 비탄에 빠졌다. 칩거하며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한 번은 "모두 내 책임"이라며 특검 수사본부에 직접 나가겠다고 집을 나섰다. 이를 말리며 비서들은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김대중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식사를 거르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침묵이 동교동 사저를 짓눌렀다.

김대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2003년 5월 10일 구급차에 실려갔다. 심장 혈관이 막혀 피가 돌지 않았다. 곧바로 심혈관 확장 수술을 받고 신장 혈액 투석을 처음으로 받았다. 체력이 약해 혼수상태가 지속됐다. 신장 기능을 잃어버린 김대중은 그때부터 기계에 의존해서 연명했다. 김대중이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민주당이 둘로 쪼개졌다.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가 당을 박차고 나가 국민참여통합신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11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듬 해 4월 총선이 있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는 대통령의 회견 내용을 문제 삼아 탄핵안을 기습 상정했다. 김대중은 이를 지켜보며 혀를 찼다. 그만한 일로 국민의 직접 선택을 받은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순 없었다. 민심이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과연 전국에서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벌어졌다. 국민적 분노는 선거판으로 옮겨 붙었다. 열린우리당의 기세가 대단했다.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거대한 역풍에 휘말렸다. 특히 민주당은 표를 달라고 손을 내밀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은 김대중이 나서 줄 것을 간절하게 바랐다. 김대중의 정치 철학과 정책을 계승한 적자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김대중은 나서지 않았다.

나는 그런 김대중의 처신에 감동했다. 김대중이 처음으로 유권자로부터 '자유'를 획득했다고 판단했다. 김대중이 없는 첫 번째 선거였다.

내 마음 속에는 '그래, 김대중 없이 너희끼리 잘해보라'는 일종의 분노가 생겨났다. 그리고 김대중의 남은 생이 곱게 빛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김대중을 3김으로 묶지 말라'는 칼럼을 썼다. 김대중은 그대로 김대중이어야 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패가 꽤나 안타깝다. 이미지와 바람이 휩쓸고 간 전장(戰場)에는 민주당 장수들의 주검이 즐비하다. 나라를 떠받칠 만한 미래의 일꾼들이 힘 한번 못써보고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정작 지역구에서 '표의 반란'이 진행 중인데도 방방곡곡을 돌며 "민주당을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울먹이던 추미애 의원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철학을 계승한 적자(嫡子) 정당임을 외쳤지만 DJ의 추인이 없었기에 구원 병력은 오지 않았다. 민주당은 절박했고, 그래서 DJ를 향한 구애는 절절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 DJ 큰아들을 앞세우고 다녔다. 하지만 DJ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결과는 참담했다. 아침마다 동교동의 뜨락을 쓸었던 가신들이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일부 언론은 DJ가 이번 선거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정 많은 노인네가 측근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DJ는 꽃 지는 봄밤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선거에서 이겼다. 현실은 노무현, 정동영, 박근혜, 권영길 같은 사람을 승자의 반열에 올려놓겠지만 역사는 DJ를 진정한 승자로 기록할지 모른다. 그는 이겼다. 어쩌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뒀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대로 정치판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청와대를 나온 지난 1년여 동안 그에게는 다시 현실 정치로 복귀할 수 있는 명분과 기회가 많았다. DJ표 정책들이 후퇴 내지는 폐기되고, 자신의 햇볕 전도사들이 잇달아 구속되고, 동교동계 사람들이 모두 구악(舊惡)으로 분류되고 있는 시점에 국면 전환용 반격의 횃불을 들 수도 있었다. 명예 회복을 명분으로, 호남 소외를 구실로 마지막 승부를 걸어볼 만도 했다. 어찌 보면 승산도 있었다. 그에겐 여전히 여러 무기가 있다. 이번 선거만 봐도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주어진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중대한 말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DJ는 아직도 '정제된 입'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논리적이고 판세를 읽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따르는 무리가 있다. 일각에서는 집권세력의 섭섭함, 야당의 무례함을 들먹이며 일전불사를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정확히 읽었다.

그는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따라다녔던 지역 감정의 망령을 잘 알았다. 본인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는 지역 감정의 한복판에 서있어야 했다. DJ는 자신이 나설수록 정치판이 혼탁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D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현장을 쫓아다니는 아들에게 연민의 정이 왜 없겠는가. 추미애 의원의 삼보일배가 DJ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는 선동하지 않았다. 그는 참았다. DJ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지지자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비로소 선거판에서 DJ가 사라졌다.

그렇게 지지자들로부터 지워짐으로써 인간 김대중으로 돌아왔다. 그도 자유를 얻었다. 이제 목포나 하의도에 내려가 사람들이 내미는 탁배기를 '아무 복선 없이' 받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세상사가 정치 아닌 것이 없지만 앞으로는 함부로 '정치인 김대중'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김대중이란 인물이 '3김'으로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복수하지 않았고 대신 고뇌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접었다. 그러나 봄밤이 아플 것이다. 봄이 가기 전에 이제는 늙어버린 가신들을 불러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소쩍새 울음을 타서 술 한 잔 건네기를 바란다. 그들도 떠나갈 때가 되었음을 알 것이다." (<경향신문> 2004년 4월 19일자)


김대중은 대통령 노무현의 국정 운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조마조마했다. 소위 개혁 정책이라는 것들이 곧잘 현실을 떠나 이상적이거나 또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켜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일련의 민주적 조치들은 평가할만한 것이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김대중은 노무현 정부 사람들을 만나면 모든 정책은 "국민보다 반걸음만 앞서가라. 국민의 손을 잡으라"고 당부했다. 끊임없이 국민을 설득하고, 그래도 따라오지 못하면 멈춰 섰다가 국민의 손을 잡고 함께 가야한다고 일렀다. 국민들과 체온을 나눠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은 걷고 있는데 정부만 뛰어가면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다. 목적이 정의로울수록 '국민과 함께'라는 원칙을 지키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야 집을 나간 토끼들이 돌아오고, 그 뜻을 이해한 새로운 토끼들이 들어온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끝내 토끼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2006년 9월 남북 문제 전문가 임동원, 이장희, 백학순, 문정인, 김근식, 고유환 등을 초청하여 오찬을 했다. 북한은 이미 미사일을 발사하며 국제사회에 무력 시위를 한 바 있었다. 그러자 온갖 비난의 화살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참석자들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말 그로부터 보름 쯤 후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지진파가 남쪽에서도 감지되었다. 노무현은 "대화만 계속하자고 강조할 수 있는 입지가 없어진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강경 대응 방침을 암시했다. 다음 날 대통령 노무현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했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 조언을 구했다. 전 대통령 김영삼이 햇볕 정책을 공격했다. 포용 정책을 지속하다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국민 사과를 촉구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대중이 말했다.

"햇볕 정책을 통해 남북 관계 발전은 제대로 해왔고, 또 성과도 있습니다. 문제는 북미 관계에 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어떤 단계에 왔든 이를 해체시켜야 하고 또 북한이 더 이상 도발을 못하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다음날 김대중은 광주의 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침에 대통령 노무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제 불편하게 했던 일들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무현은 김대중이 일방적으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노무현의 대북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포용 정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포용 정책은 남북의 긴장을 완화시켰지 악화시킨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죄 없는 햇볕 정책에 북한 핵 실험을 갖다 붙이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햇볕 정책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후 김대중에게는 국내외 언론 인터뷰가 쇄도했다. 북한 핵 실험의 원인과 향후 정세 등을 물었다. 김대중은 북미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북한 핵 실험은 지난 6년 동안 계속된 부시의 대북 강경책이 실패했음의 방증이다. 이제라도 대북 강경책에서 벗어나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후 미국은 강경책을 버리고 북한과 대화를 적극 모색했다. "사악한 정권과의 대화란 있을 수 없다"는 큰소리가 오간데 없어졌다. 부시 행정부는 베이징과 베를린에서 북한과 직접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은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의 북한 계좌 동결을 해제하고 북한은 핵시설 가동 중단과 폐쇄에 합의했다. 이른바 '2·13 조치'였다.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취하고, 미국은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북한은 1만8000쪽에 이르는 핵 가동 문서를 미국 측에 넘기고 영변 핵발전소 냉각탑을 폭파했다. 그 냉각탑이 폭파되던 2008년 6월 27일, 김대중은 남다른 감회를 이렇게 남겼다.

"오늘은 2차 대전 이후의 한반도 역사에 획기적인 날이다. 북한이 영변 핵발전소 냉각탑을 폭파한 날이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의 테러 지원국 지정에서 해제를 국회에 통고한 날이고, 적성국 교역 금지 대상에서 제외한 날이다. 이제 6자 회담은 제3단계, 즉 북의 핵무기 폐기와 국교 정상화를 주고받는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내가 1971년 대선 이래 주장한 한반도 4대국 평화 보장이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94년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주장하고 대통령 재임 중 미국 정부 당국자에게 거듭 주장해온 북미 간의 직접 대화와 주고받는 협상이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06년 북한 핵실험 당시 노무현 대통령 이하 여야 모두가 절망과 대북 일전불사의 강경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내가 홀로 직접 대화와 주고받기 협상으로 경색된 국면을 타개하라고 국내외의 언론 인터뷰와 강연에서 주장하던 일이 감회 깊게 회상된다. 부시는 결국 나와 클린턴이 주장하던 노선에서 결실을 얻었다."

퇴임한, 그리고 병약한 80대 노인이 남북 관계를 이렇듯 명징하게 정리하고 있으니 놀랍기만 하다. 김대중이 평생을 바쳐 완성한 햇볕 정책은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많이 흔들렸다.

2004년 4월, 민주당이 총선에서 참패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 송금 특검'을 받아들였다. "동교동 뜰에 시체가 즐비"하다 할 정도로 적막감이 돌던 때였다.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이었던 김택근은 깜짝 놀랄 만한 방문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인 김한정, 최경환 비서관이었다. 두 비서관은 그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의 제안을 전달한다. 자서전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한 번의 고사,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직접 접촉 끝에 2006년부터 이뤄진
구술 작업은 공식적으로 41회에 걸쳤고 2010년 그의 서거 1주기에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으로 세상에 나왔다.

▲ <새벽 : 김대중 평전>(김택근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SCRIPT type=text/javascript src="/books/common/js/book/bookcp.js"></SCRIPT> <SCRIPT>aladinOrderButtonWrite('8958286296');</SCRIPT> btn
그리고 이 운명의 변환은 그로 하여금 2년간 다시 거물의 삶을 붙잡게 했다. 2012년 서거 3주기에 나온 <새벽 : 김대중 평전>(사계절 펴냄)은 스스로 다시 걸어 들어간 "김대중이라는 감옥"의 결과물이다. 지난 1년간 <프레시안>에 연재된 김대중 평전에서 그는 자서전에서 못 다한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와 "말로는 할 수 있어도 글로는 쓰기 어려운 대목"들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새벽> 출간을 기념하여 <프레시안>과 사계절출판사, 예스24가 공동으로 기획한 좌담회가 지난 30일 오후 7시 30분부터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김대중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좌담회에는 저자 김택근과 함께 '직설'로 잘 알려진 소설가 서해성 그리고 서해성이 "김대중 대통령이 너무 사랑해서 늘 질투의 대상"이었다고 표현한 18대 국회의원 박선숙이 참여했다. 세 사람의 족적과 책 <새벽>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자연스레 엮은 사회는 성공회대학교 교수 김민웅이 맡았다.


두 시간여 진행된 좌담회에서는 김 전 대통령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물론 그의 삶에 대한 각자의 평가가 오갔다. 100명 가까운 청중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큰 지도자가 없는 시대에 더욱더 강해지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반영하는 듯했다. 다음은 좌담 참여자들의 입말을 주요 테마 별로 재구성해 옮긴 것이다. <편집자>

▲ (왼쪽부터) 박선숙, 김민웅, 김택근, 서해성. ⓒ프레시안(최형락)

● <새벽>, 거리 조절 실패다?

"<김대중 자서전>과 <새벽>을 보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이만큼의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어느 누가 사망 뒤에 핏줄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이 정도의 애정을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애정이 평전의 약점이기도 하다. 너무 깊이 사랑하다보니 거리가 유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김대중이 가진 보편적 가치를 더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언제나 선택을 한다. 기자들은 보통 우물 밖에서 두레박을 던진다. 기자와 검사의 공통점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는 아직 안 나온 이야기에 대해서도 쓸 수 있다. 우물 속에 들어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새벽>은 두레박을 던지는 기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우물 안에 들어가 우물의 깊이를 재어보고 싶었던' 인간 김택근의 바람이 느껴지는 책이다." (서해성)


● 대통령 마음에 들어갔다 온 작가

"나도 이 책의 유일한 단점으로 너무 깊은 애정을 꼽겠다. 그 애정의 증거가 너무나 많지만 딱 두 군데만 꼽겠다. 하나는 '김대중을 3김으로 묶지 말라'라는 칼럼이다. 2004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글이고 이 책에 내용이 전재(全載)되어 있다.

또 하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생 대국민 연설을 시작할 때 빠뜨리지 않고 해 왔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을, 딱 한 번 다르게 말한 적이 있는데 김택근이 그걸 알아챈 부분이다. 1992년 대선에서 패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했을 때, 거의 유일하게 '사랑하는'을 빼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했다. 차마 사랑한다는 말이 안 나왔을 것이다. 작가는 그때의 심정을 끄집어냈다.

낯가림이 심했지만 사람을 기용함에 있어 어떤 편견이나 거리낌도 없었던 김 대통령은 김택근을 모르던 때에도 그가 쓰는 <경향신문> 칼럼을 보고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박선숙)


● 김대중이라는 감옥에 갇혀

"평전을 쓰게 된 건 자서전에서 못했던 이야기를 좀 자유롭게 내 나름대로 구성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자서전을 쓴 작가이기에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질책을 받아들이겠다. 나로서도 찬양 일변도가 아닌가 고민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김대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시간을 좀 더 두고 더 많은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더는 끌 수 없는 작업이었고, 무엇보다 김대중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웃음) 김대중 대통령이 총 6년가량 감옥에 계셨는데 나는 김대중이란 감옥, 혹은 김대중 대학에 한 8년 있었던 것 같다." (웃음) (김택근)


▲ 김택근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프레시안(최형락)

● 김대중은 '고아'다

"김대중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고아'다. 그는 결코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다. 삶의 대부분이 제약 사항이었다. 불편한 것들을 다 가지고 태어났다. 섬사람이었고 호남이란 '원죄'를 갖고 있었으며 다른 대통령들처럼 엘리트가 아니었다. 봉건 세계로부터, 기득권으로부터 단절된 고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좌절하곤 하는 이 모순을 정면으로 돌파했고 항상 자신의 근육으로 바꾸었다. 객관적으로 김대중이 한국사에서 신선하고 독특한 인물이유바로 이 고아 의식에 있다. 식민지, 독재, 아버지를 단절한 고아인 사람만이 혁명가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야말로 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사 지낼 만한' 어른인 것이다." (서해성)


● 김대중이 싫어했던 것은?

"1995년 여름 김근태 선배의 부름으로 야당 부대변인이 되었는데, 여자로서 처음이어서 기사도 나고 그랬다. 당시 총재였던 김대중과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3년간 그가 치르는 모든 선거에서 그를 모셨다.

▲ 박선숙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사람들한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화 날 법 한 순간에 한숨을 쉬는,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이다. 나처럼 지위고하·남녀노소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사람을 어떻게 다 참아내셨을까 싶다. 그래서 김대중 하면 떠오르는 단어 첫째는 인내심이다. 포용력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솔직히 나는 그에 대해 잘 알거나 존경심을 가진 상태에서 그를 만난 게 아니다. 존경심은 날짜가 지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생겼다. 일면식도 없던 날 뭘 보고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물어본 적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질문은 그가 많이 했다. 그래서 김대중 하면 떠오르는 두 번째 단어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화는 안 내도 싫어하는 건 있었는데, 공부 안 하는 거였다.

세 번째는 의인 혹은 거인이다. 한 발 앞서가는 사람, 그래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200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러 평양에 갔다가 잠시 서울에 들렀을 때 "김대중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서 더 멀리 볼 수 있었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박선숙)


● 산인 줄 알았는데 산맥이었다

"자서전을 쓰기 전까진 나 역시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잘 몰랐다. 2004년 그분이 비서관들을 통해 나를 부름으로써 이렇게 엄청난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뭔가 해보려고 새로운 길이다 싶어 걷다 보면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참모들이랑 다 같이 와서 도시락까지 다 까먹고 간 길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웃음) 그래서 무력감에 휩싸인 일이 많았다고 했다. 정치의 천재였고, 이야기하기 겁날 정도로 박식했다. 구술하다가 내게도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농민 운동 아시죠"라는 식으로 묻곤 했는데 내가 알 턱이 있겠나. (웃음) 이런 의미에서 그는 '산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산맥이었던 사람'이다." (김택근)

● 김대중을 김대중으로 만든 것은?

"실제로 '김대중을 만든 것은 이희호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120퍼센트 동의한다. 평생을 남편보다 먼저 잠자리에 든 적이 없는 분이다. 잠이 오면 일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조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먼저 가서 눕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아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열일곱 살의 단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이희호 여사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마음이 주저앉고 싶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다고 말했다. 국민에 대한 사랑과 역사에 대한 믿음이 추상적이라면, 그것의 구체 상(像)은 이 여사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동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크나큰 행운 아니었을까." (박선숙)


● 김대중의 '언어'

"그는 새로운 언어를 만든 사람이다. 누가 들어도 맞는 말, 보편적 언어라는 힘을 갖고 있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을 봐라. 누가 만든 말도 아니고 긴 문장도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성은 행동하는 삶 속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 그래서 언어가 거짓인 적이 없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러 한국의 정치 언어가 비로소 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몸의 반쪽을 잃은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뜻을 보인 표현 가운데 가장 생득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이 가장 깊이 녹아 있는 언어이자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다. 그리고 다른 이의 가슴속으로 이동하게 하는 매개로서의 언어다." (서해성)


▲ 서해성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 '용서하는 정치'

"1997년 대선 때 '대통령이 되면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을 용서하겠다'고 공약한 대목에 대해 이 평전에서도 비판적 검토를 해 놓은 대목이 있다. 김택근이 책에서 던진 질문을 나도 당시에 던졌다. 광주의 유가족들이 당사에 찾아와 한참을 같이 울며 이야기했을 때 나 역시 '그게 대통령께서 용서할 수 있는 문제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광주 시민의 한은 민주주의로서 풀리는 것이지 보복으로서 풀리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박선숙)

● DJ와 YS의 화해?

"김대중 대통령과 여러 번 구술 작업을 하며 가장 놀라웠던 것 하나는 납치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기 때문인지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고 있더라.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물었을 때 순간에 굳은 표정과 닫힌 입술이었다. 1991년 김영삼 대통령이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그의 뇌리에서 김영삼이란 존재는 사라진 듯했다." (김택근)

"솔직히 DJ와 YS의 관계는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말이 되든 안 되든 하고 싶은 거 다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지 못했다. 평전에도 나오지만 DJ-YS의 관계는 화해할 관계가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용서한 관계다. 물론 이와 별개로, 하나회를 정리하고 금융 실명제를 실시한 부분에 있어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선숙)


ⓒ프레시안(최형락)

● 김대중 그리고 박정희

"이 책에 많은 부분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장기 집권을 위해 그를 어떻게 '빨갱이'로 몰아갔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빨갱이'라는 굴레를 각오하면서도 박정희식 군사 독재, 정치·경제적 독재에 정면으로 반대했고 정반대의 안을 제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김대중 대통령이 대변인으로 있었던 장면 내각에 존재했던 청사진을 그대로 베낀 것이고, 7·4 공동 선언은 후보 시절 김대중 대통령이 내세웠던 남북 대화라는 목표를 베낀 것이며 그마저도 한 번에 그친 쇼였다. 한편, 1970년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식 개발 독재에 대한 안티테제로 내세운 경제 민주화를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데, 박근혜 씨는 이에 대한 어떤 반성도 없이 경제 민주화를 말하는 사기를 벌이고 있다. 알맹이 없는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 (박선숙)


● 2012년에 김대중을 읽는 이유

ⓒ프레시안(최형락)
"지금 진보니 보수니 할 것 없이 모두 김대중을 말하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제발 김대중을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게 된 책이다. 그를 알기 위한 용도로 읽혔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말년에 한국의 외교를 특히 걱정했다. 한국은 대륙에 붙은 혹처럼 작은 나라라며 외교가 명줄이라고 했다. 임기 동안 외교에 심혈을 기울여 평화의 그물망을 완성했는데, 그 이후로 외교가 후퇴를 거듭해 왔다. 독도 문제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벌집 쑤시듯 하고 있지 않나. 또 대미 외교 치중하느라 중국과의 관계가 흐트러져서 서해가 우리 바다인지 남의 바다인지 모르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통탄했을 것 같다.

김대중을 안다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거다. 그가 추구한 평화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평화로 가는 답이 나온다. 과거를 통해 민족의 미래를 열기 위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 (김택근)

● '찬사' 아닌 '복원'을 위하여!

"그를 존경하기도 했지만 치열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느낀 것은, 그런 비판의 정당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사람이 그런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나'란 질문을 던지고 나서 한 비판이었나 하는 반성이었다. 만일 스스로에게 그걸 물었더라면 다른 비판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현대사에서 김대중이란 이름만큼 구겨지고 짓밟힌 이름도 없다는 생각 든다. 그는 그걸 딛고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간 소중한 위인이다. 평전도 오늘 이 자리도 한 인물에 대한 찬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인생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찬사 받지 못한 부분을 복원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이런 부분이 정당하게 복원된다면 더욱 비판해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일단 복원이 먼저다. <새벽>은 김대중이란 역사의 실체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김민웅)


▲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831123705
profile

仲尼再生 " 夜 의  走筆  " 취임사

 

저를 아크로 주필로 추천하시는 회원여러분의 글을 읽고, 오늘 본인은 본인의 향후 거취를 놓고 깊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끝없이 되뇌며, 다수 회원의 요청대로 아크로 "밤의 주필" 직을 기꺼이 수락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내 일신의 안녕 만을 위한다면 봉급 한 푼 못 받는 이 명예직을 수락할 수 없었겠지만, 이미 공인 아닌 공인이 된 몸으로서 이 위기의 시대에 역사가 제 어깨에 지운 이 짐을 떠맡기로, 본인은 이 아름다운 밤 위대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