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독립적인 (혹은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이 있고, 현재의 역량이 한정되어 있어 한꺼번에 모두 해결할 수 없을 때, 필연적으로 우선순위 논쟁이 벌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바로 개인의 가치관이거나,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되겠죠. 가장 대표적인게 성장이냐 분배냐이겠고, 공정한 룰이냐 복지냐도 그런 성격의 논쟁일 것입니다. 어쩌면 호남의 격차 해소가 먼저냐 진보정책 구현이 먼저냐라는 범야권의 오랜 화두도 결국 그런거고, 요즘 아크로의 화두인 정권교체냐 친노척결이냐도 비슷한걸겁니다. 

그런데 우선순위 논쟁을 지켜보다보면 이따금 웃지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래요.

"쌀 사는게 먼저냐, 소주를 사는게 먼저냐"고 물으면 당연히 상식적인 대답은 쌀 사는게 먼저라는 대답이겠죠. 그런데 그것을 비틀어서 "평생 먹을 쌀을 먼저 사놓고, 그 다음에 소주를 사야 한다" 는 식으로 주장하고 그것이 마치 합리적인 의견인 것처럼 헷갈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죠. 쌀독이 비었는데 소주가 먼저라는 주장도 황당하겠지만, 평생 먹을 쌀부터 장만해놓고 생각해보자는 주장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인겁니다. 은근슬쩍 '우선순위 논쟁'을 단계 논쟁'으로 치환해서 반론자들을 원천봉쇄하는 오류입니다. 우선순위라는 것의 대부분은 동시에 진행해야만 하는게 일반적이고, 또한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알고 보면 분리가 불가능하도록 얽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죠. 영어부터 통달해놓고 원서를 읽겠다는 사람은 아마도 평생 원서 읽을 일이 없을겁니다. 

이처럼 "우선 성장시켜서 파이부터 키워 놓고 분배는 나중에" 라는 말은 분배 안하겠다와 동의어입니다. 그 주장 박정희 때부터 노상 떠들던 말이라는거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은 다 알죠. 30년이 지나 그 딸래미가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요. 만약 어떤 사장님이 "우리 회사가 이번에 대박나면 직원들도 챙기겠다"고 하시거든 왠만하면 한 귀로 흘리세요. 대박이 어느새 사옥으로 바뀌고, 사옥이 상장이 되고, 상장이 계열사가 되고, 계열사 한 개에서 열 개가 되고, 굴지의 재벌이 될때까지 멈추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재벌이 되면 노조탄압하고 구조조정하겠죠. 이 코스에서 벗어나는 대인배 사장님은 1%도 채 안될겁니다^^

'공정질서 확립이 먼저고 복지는 나중이다'라는 김대호류의 주장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에요. 아마도 그 분들이 "이 정도면 복지를 해도 된다"고 말씀할 정도로 공정한 질서가 확립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전가의 보도같은 '정권교체가 우선이고 친노비판은 나중에 해도 된다'는 주장 역시, 사실은 영원히 친노들을 비판하면 안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거죠.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분들은 극히 드물지만 일부 강경 닝구분들의 "호남 격차 해소가 먼저, 진보 정책은 나중에" 라는 주장에도 살짝 그런 혐의가 있어요. 우선 순위를 따지자면 당연히 지역간 격차와 차별 해소가 먼저입니다. 그러나 자칫 그런 주장이 단계론의 함정에 빠지면, 설득력을 잃어버릴 수 있죠. 진보쪽에서 "진보 세상이 오면 호남차별이나 지역격차는 저절로 해소될텐데 왜 난리임?' 하는 식의 역단계론이 허망한 것과 마찬가지이겠죠 (그것이 바로 진보정당들이 정치적으로 망한 이유이죠). 양쪽 다 오류입니다. 그런데 그런 강경파 닝구분들은 매우 미미한 소수인데 반해, 합리성을 잃어버린 단계론자들은 너무나도 많은게 문제이겠죠.

어쩌면 상대방의 가치관을 확인하는데 불과할 뿐인 우선순위논쟁에 치중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거부터 먼저하는게 우선이고, 어느 하나를 취해서 다른 하나를 부정하기보다는 동시에 하는게 보다 현명한거겠죠.

결론 : 만약 누군가 우선순위논쟁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의도를 살펴보고 째려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해하실까봐 첨언하자면, 저는 문재인이 단일후보가 되면 기권입니다. 정권교체와 친노제압의 가중치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친노들이 너무 나갔기 때문이죠. 야권 지지자로써 박원순에게 투표한 것으로 저의 의무는 다했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