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교체보다 '친노 척결'이 우선이라고 믿는 분들은 이 글을 패스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대선이 다음달 19일이니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이제 꼬박 한 달하고도 이틀이 남았다. 두 후보가 후보 등록 전에 단일화하기로 국민 앞에 약속을 하였으니 현재 대선 정국을 규정하고 있는 단일화 논의의 시한은 이제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 얼마 남지 않은 절박한 시한을 뒤로 하고, 안철수는 대화의 문을 닫아 버렸다. 

  2. 안철수가 주장하고 있는 정치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어떤 식으로든 지금보다 나은 상태로 정치 상태가 가까운 미래에 재구성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문제는 그 새 정치의 담론에 담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 자체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이 현실 정치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다른 정치 집단들에게 먼저 제대로 이해되고 전달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 명제는 지난 총선을 통해 드러난 민주당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안철수의 정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민주당 내 (지배) 계파가 자신의 (배타적) 이익에 집착한 나머지 선거를 망쳐 버렸다' - 언론을 통해 드러난 현 민주당의 문제점에 대한 안철수의 정치 의식은 이 정도로 정리가 되는 듯한데, 안철수는 여기에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그는 비록 무소속으로 당선이 되었지만 선거 승리후 민주당에 입당하고 그 이후에도 절묘하게 무당파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박원순 시장과도 다르다. '정치 과정의 개혁은 선거가 끝난 후가 아니라 바로 선거 국면 중에 시작되고 진척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안철수의 문제 의식에도 동의한다. 문제는 추상적인 개혁 과제를 제시하고서 안철수가 취한 모호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안철수는 아젠다는 던져 주되, 그 아젠다를 받아서 실현하는 것은 민주당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이건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문제지를 나누어 주고 문제를 풀어보라는 것도 아니고, '내 머리 속에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맞춰서 알아서 답변을 내놓으라'는 꼴이다. 

 3. 도대체 안철수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안철수는 이른바 '친노-비노-반노'의 프레임 안에서, 민주당 내부의 '친노 패권 주의' 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일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요즘 언론에 나오는 것처럼 두 '친노'의 상징적인 우두머리- 충청 '친노' 이해찬과 호남 '친노' 박지원 - 의 인적 청산을 요구하는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즉 안철수가 민주당 내부의 정당 개혁이 절실하다고 보았고, 정당 개혁의 핵심이 '친노 정치인의 척결' 에 있다고 보았다면 안철수는 적어도 4.11 총선 직후에는 움직였어야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든지 아니면 지금처럼 무소속으로 나와서, 적어도 '반새누리'라는 기본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당의 정치, 정당 개혁의 청사진이 뭔지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대중의 검증을 받았어야 했다. 그리고 안철수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 즉 대선이 코앞에 다가와서, 스스로 설정한 단일화 종료 시한을 일주일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 은 안철수에게 민주당 내부 개혁에 대한 확고한 문제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안철수의 작금의 협상 보이콧이 정치적인 대의 명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대의 명분이 실행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시간을 대중과 다른 정치 집단에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정치적인 대의 명분이 충족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는 전제조건이 결여 되었기 때문에 결국 안철수의 이번 행위는 순전한 정치 공학상의 전략적 행위로 밖에 보일 수 없다. 대륙법계의 기본 원리 중에 bona fide 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신의 성실의 원칙' 이라고 번역되는 이 원칙은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을 하기 위한 교섭의 단계, 그리고 계약 성립과 그 이후의 국면에서도 각 당사자들에게 상호적인 신뢰의 원칙에 기초하여 지켜야할 일정한 행위의 룰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진공 청소기 제조 업자이고 내 회사가 제작한 진공 청소기 팩이 다른 회사의 팩으로 대체 불가능한 물품이라고 가정하자. 만약 내가 새 모델의 생산 라인을 가동해서 구 모델은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구 모델의 구매자를 위해서 구 모델의 진공 청소기 팩을 계속해서 생산할 의무가 있다. 여기서 그 팩을 얼마나 오래 생산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기준을 미리 확정해 두기가 어렵다. 
 요지는 보나 피더라는 행위의 룰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 각자의 입장마다 서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안철수의 입장에서는 물론 자신은 정당 수준이 아닌 느슨한 인적 결합체일 뿐이고 그것이 대규모 정당 조직을 갖추고 있는 문재인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열위'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안철수는 스스로 이 단일화 협상을 '개인 혹은 점조직과 거대 정당간의 싸움'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이 단일화 협의 과정에 있어서 당사자간에 묵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보나 피더 원칙' 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문 캠프의 '익명의 고위 관계자'가 안철수 양보론(정확히 말하면 안철수 양보론이라는 희망사항)을 흘렸다는 점, 문 캠프에서 내주 내에 있을 여론 조사에 대비해 당원들에게 휴대전화를 '착신 상태'로 돌려 둘것을 문자 메시지로 유포하였다는 점, 그리고 훨씬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긴 하지만 박지원이 호남 지역내 여론 조작을 위해 조직 동원을 지시하였다는 점.. 이런 사례들은 물론 안철수 입장에서, 그리고 제 3자 입장에서 봐도 그리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아니다. 그 중 개인적으로는 안철수 양보론이야 말로 안철수가 현재 요구하는(더 정확히 말해서, 한다고 여겨지는) '민주당내 친노 지도부의 인적 청산'의 결정적 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단일화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정도로 결정적인 '보나 피더 원칙'의 파기인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사례들은 어떠한가? 이유야 어떻든, 협상 당사자인 문재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고 (오해를 살 만한 소지가 다분하게) '대부분 비노로 분류되는' 민주당 의원 30여명에게 전화를 돌리고, (인과 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전직 민주당 의원들로 하여금 자당의 대선 후보가 아닌 협상 파트너인 자신을 지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후단협 시즌 2 비슷한 제스쳐로 취해진 그 사람들의 변, 즉 '안은 어차피 파트너가 될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지지해도 되도 된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단일화를 전제로 민주당과 안과의 관계가 미래에는 협력적 파트너쉽으로 변모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 시점에서 문과 안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라이벌쉽일 수 밖에 없다- , 상대 진영의 의원을 빼가는 행위...이런 것들도 문재인 입장에서는 비슷한 비중을 지닌 보나 피더 원칙의 위반이 아니겠는가? 

 5. 단일화 국면에서는 오로지 단일화에만 집중을 해야한다. 가치 통합, 정책 통합은 병행해서 논의되어야 하지만, 세력 통합까지 염두에 두기엔 현 대선 시계는 두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단일화 협상에서 상호간에 원만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보나 피더 원칙이 마련될 수 없다면, - 즉 용인될 수 없는 반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해질 수 없다면- 자신은 자신이 설정한 보나 피더 원칙을 지키되, 스스로는 상대방이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보나 피더 원칙을 지킬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각자 그래야 둘이 함께 살 수 있다. 만약 이마져도 할 수 없다면, - 즉 안철수 측에서 문재인 캠프의 여론 조사 조작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버릴 수 없다면- 대통령과 책임 총리의 책임 범위만 결정해 두고 둘이 주사위를 던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즉 결과를 인간의 모종의 의지가 개입된 행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연적인 공정성에 맡겨 보는 것이다. - '새누리당의 어떠한 정치적 확장에도 반대를 표시하는' 정치 세력들 간에 현 시점에서 정책적 차이와 역량의 차이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 시점에서, 이것보다 철저한 공정성을 보장하는 합리적인 대표 선수 선출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안철수가 이 역설에 대해서 한 번쯤 곰곰히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6. 이 글이 하루빨리 안철수의 '생각' 에 관한 공연한 걱정으로 밝혀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