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에게 왜 담당형사가 배치되었나?
 사회활동은 커녕 날마다 개피담배 구하느라고 논골 골목을 두더쥐처럼 헤매고 다니는 가난뱅이에게 도대체 담당형사가
뭐란 말인가? 자못 의문을 품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0월 유신이 발표되고 세상은 찬물을 끼얹은듯 고요했다. 신문은 발간되었으나 어느 구석에서도 아직 저항이나 항거의
기미 같은 건 눈에 띠지 않았다. 그때  동료작가에게서 다음날 열시경 명동의 YWCA 강당으로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은밀히 나오라는 것이다. 모임의 취지가 뭔지 대충 짐작은 했다. YWCA라면 명동 성당 바로 앞에
있다. 나는 전에 성당 앞 작은 빌딩에 있는 음악감상실 <크로이첼>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이 부근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지정된 시간에 그곳으로 나갔다. 강당에 들어서는데 평론가 B씨와 입구에서 마주쳤다. B씨는 사실상 그 모임의
주도자이고 나중에 성명서도 직접 낭독했다. 강당에는 60명 정도의 시인,작가, 평론가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강당
에 불도 밝히지 않고 마이크 시설도 이용하지 못한채 황급하게 서둘러 회의를 진행했다. 국기배례만 끝나고 육성으로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 내용은 박정희의 유신선포의 부당성 지적과 폐기 주장이었다. 작가 시인들도 앞으로 유신의 폐
기를 위해 싸운다는 간단한 결의도 했다.
 이 조촐한 모임이 아마 유신선포에 정면으로 대응한 최초의 집단행동이었다고 기억한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분
위기는 자못 심각하고 침울했다. 그런데 식이 아직 채 끝나기 전에 사단이 벌어졌다. 경찰기동대가 거기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은 정보입수가 빨랐다. 바깥에서 문을 걷어차고 하얀 헬맷을 쓴 기동대원들이 강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젊은 문인이나 나이 든 문인이나 모두 혼비백산하여 기동대원들을 피해 반대쪽 다른 출입구를 통해 강당 밖으로 몸
을 피했다. 뒤에 들은 얘긴데 어떤 젊은 동료는 쫓아오는 헬맷을 피해 담장을 뛰어넘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대다수의 문인들은 비교적 민활한 동작으로 그 자리에서 몸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불과 몇 분 뒤에 강당 안에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7명 정도였다.
 나는 본래 행동이 굼뜨고 느란데다 이런 순간에는 겁보다 호기심이 더 발동해서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처리하는
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버티었다. 불법? 집회를 하다 붙잡힌 7명은 결국 거기서 가까
운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7명 가운데는 요즘 깡통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김지하가 있고 원탁
 회의 멤버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는 평론가 B씨, 그리고 작가 H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부서에서 처음에는 잠시 유치장에 들어가 있다가 한두 시간 뒤에 서장실로 자리를 옮겼던 걸로 기억된다.
그곳 서장도 역시 우리에게 특별예우를 베풀었다. 김지하는 당시 이미 유명인이어서 서장이 김시인에게
싸인을 받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바깥에서 프랑스 국영 TV 카메라가 와서 김 시인에게 인터뷰 요청을 한
다고 서장이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7명 전원이 갇혀있는 장소에서 움직
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찰에서는 별다른 곤경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서장실에 각자 편히 앉아서 자유롭
게 대화를 나누고 점심은 그곳에서 제공된 설렁탕으로 떼웠다.
 상대가 모두 문인들이고 유신선포 후 첫번째 사례이기 때문에 아마 당국은 처리방침이 서있지 않아서 좀
골치를 썩였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아주 늦은 시간에, 열한시 경이었을까, 우리는 그 지루한 구금시간을 끝
내고 석방되었다. 자술서 한장 쓰지도 않았고 훈계 따위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난 뒤 조간신문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신문 1면 정치면 첫 머리에 내 이름이 다른
6명 이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나와있는 것이다.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문인집단의 대표격으로
전날 중부서에 연행된 7명 이름이 보도된 것이다. 흔히들 큰 활자 보도를 대문짝에 비유한다. 이 경우가
그런 비유에 적절했다.
하하...나는 신기해서 그 큰 활자로 나온 내 이름을 보고 또 봤다. 정치계의 거물이 아닌 이상 그런 기회가
일생에 한번 오기도 힘들다. 그 이후로 연재관계로 몇군데 신문 1면에 사진과 이름이 보도된 적은 있으나
정치면 첫머리에, 더구나 시국사건 명목으로 크게 보도된 것과는 성격이 사뭇 다른 것이다. 이 정치면 보
도는 과연 그 반향이 컸다.
 오래 잊고 살던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왔고 평소 왕래조차 하지 않던 아주
먼 친척 아저씨도 전화를 걸어왔다. 그들은 대체로 내 신변을 걱정하기 보다는, 그렇게 큰 활자로 일면
에 보도될만큼 크게? 활약한 친구가 장하고 대견하다는 격려의 말들을 들려줬다. 그런 말을 듣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그냥 하룻밤 자고나니 내가 투사가 되었다고 이실
직고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기대를 실망시킬 수 없는 것이다.

 내게 형사가 배치된 것은 내가 중부서에 다녀온지 며칠 뒤 일이다.

  선그라스와 내가 탄 검정색 승용차는 반 시간도 채 안 되어 남산의 중정 본부에 도착했다. 그 명칭이
어찌나 악명이 높아 뒤에 안전기획부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중정의 위세는 진짜 중정,
그러니까 중앙정부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곳의 정문은 그 위세에 걸맞게 무슨 빠스티유 감옥 정문처럼
큰 철대문이 있고 그 위에 콘크리트 아치가 있어서 바깥에서는 그 내부를 엿보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중정 마당에는 큰 돌에 이와같은 멋드러진 말이 새겨져 있다. 나는 승용차가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
갈때 그 명문을 맨처음 봤다. 음지는 여기 지하실이 많다고 하니 그렇다 치고 양지(陽地)는 대체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일까? 그 명문을 보는 순간 이런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반대로
-우리는 양지에서 일하고 음지(陰地)를 지향한다- 가 맞는 말 아닐까? 양지는 그 뜻도 애매하고 실체
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음지는 그 실증을 수도 없이 제시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시종
표독스런 얼굴로 반말지껄이를 하던 선그라스는 중앙에 있는 큰 건물의 한 방으로 나를 데려가 그 방
에 나를 집어넣고 아무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세평쯤 되는 방인데 필기를 할 수 있는 긴 책상
과 의자 몇개가 있을 뿐, 다른 시설 따위는 없었다. 잠시 후에 낯이 익은 평론가 K 씨가 그 방으로 들
어왔다. 그는 나보다 몇년 선배로 대학의 교수로 봉직중이며 몇군데 잡지에도 관여했던, 아주 점잖
은 인물이었다. 내가 눈인사를 했지만 K씨는 너무 경황이 없는 탓인지 인사를 받는둥마는둥 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데서 같은 문인을 만나는 게 무척 괴로왔던 모양이었다. 나도 그 기
분은 알겠지만 나는 특별히 난처하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 방은 K씨와 나, 두 사람이 하루 종일
머무는 방이 되었다. 
 
사십대 남자 한사람이 우리 방으로 들어와 백지 몇장씩과 필기구를 나누어 주면서 말했다.
"여기에 이번 일에 가담하게된 전후 배경과 앞으로 어떻게 반성하고 국가정책에 협력할 것인지
거짓 없이 쓰라고. 잘 했으면 잘 했다 써도 상관없어. 단 거짓으로 쓰는 건 용납 안된다는 걸
알라고."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반말지껄이로 이렇게 말하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K씨와 나는 되도록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백지를 앞에 놓고 반성문을 쓰기 위해 교무실로 불려온 말썽장이 학
생처럼 암담한 심정으로 한동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방이 여기에 대체 몇개나 될까? 6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끌려와서 지금 반성문을
요구받고 있을까? 그렇다면 중정 건물 하나가 지금 집단 창작촌으로 탈바꿈해버린 셈이다.
거짓말이건 참말이건 대여섯장의 백지를 메꿔내려면 어짜피 창작은 불가피하다.

  명색이 창작이 본업인 나도 백지를 앞에 놓고 무슨 얘길 써야할지 너무 막막해서 반시간 이상
이나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허비했다. 옆자리의 K씨도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