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새벽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단 말인가? 짜증이 났으나 할 수 없었다.
나는 바지를 서둘러 입고 미닫이 문을 열었다. 싸늘한 냉기가 한꺼번에 가슴으로 몰려왔다.
"아, 미안 미안."
형사가 입술에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방 안을 흘낏 살펴봤다. 뭐가 보일 턱이 없었다.
"본서 서장님께서 0형을 오늘 좀 뵙자고 하네요. 지금 나와 함께 가야합니다. 서장님은 아마 벌써
나오셔서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서장님이..? 무슨 일이죠?"
"나야 모르죠. 하실 말씀이 있을 거에요. 우리 서장님이 0형을 꼭 좀 보고 싶어 하시네요. 뭐 별다른 건 아니고."
"지금 당장 가야 합니까?"
"지시사항이니 어쩔 수 없어요. 어떻게 된 건지 우리 성동서 관할에 딱 0형 한사람 뿐이요. 잠시 협조해주시죠."
"갑시다.그럼."
 나는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내려서서 구두를 신었다. 사실 본서 서장이라면 내가 보기에 아주 높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 한사람 만나려고 새벽 같이 출근해서 나를 기다린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형사가 내 몰골을 잠시 살펴보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이구, 이발을 언제 했어요?" 
"언제인지 나도 기억에 안나요."

 일부러 장발을 시도한 건 아니지만 이발소 들른 기억이 까마득하다 보니 머리가 귀를 덮었다. 게다가 자주 감
지도 않아 쑤세미처럼 잔뜩 헝클어져 있다. 내 생각에도 이런 몰골로 지체 높은 본서 서장님을 만난다는 건
도리가 아니다. 형사와 나는 일단 골목 밖으로 나와서 한참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 금호동 로타리로 나왔다,
거기서 택시를 잡아타고 행당동 쪽으로 갔다. 그런데 형사는 나를 경찰서 쪽으로 당장 데려가지 않고  행당
동 어느 으슥한 뒷골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요."
그가 내게 일르고 공중전화 박스로 가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뒤 돌아와서 말했다.
"0형, 오늘 머리 세탁 좀 해야겠는데. 내가 아주 잘 하는 아가씨더러 지금 가게로 좀 나와달라고 했으니
그쪽으로 갑시다."
 형사도 내가 이런 몰골로 서장님을 만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거기서 몇걸음 걸어가자, 미용실
간판이 보이고 그곳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23~4 세 그 또래 아가씨가 가위와 머리빚 등을 정리하고
있다가 가게에 들어서는 우리를 흘긋 쳐다봤다. 새벽의 고객에게 그녀는 한마디 인사도 하지 않았다. 
 "거기 앉아요."
 나는 미용사 지시대로 의자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싯누런 얼굴에 멋대로
헝클어진 긴 머리털, 오래동안 병상에서 신음하다 이제 막 세상구경 나온, 영낙없는 환자였다. 미용사는
나와 눈길을 마주치길 피하고 부지런히 가위질만 계속했다. 형사는 긴 소파 한쪽에 앉아 벌써 환하게 밝
아진 바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드디어 머리세탁이 다 끝났다. 미용사는 솜씨가 빠르고 능란해서 눈 깜짝할 시간에 내 머리를 그럴듯하
게 만들어 놓았다. 그 사이에 그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 전과는 완연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나는 거울에 나타난 그 잘 생긴  얼굴이 진짜 내 얼굴인지 확인하려고 의
자에서 벌덕 일어나 거울 가까이 얼굴을 마주대고 한동안 그 변해버린 내 모습을 요모조모 드려다봤다.
'흠, 머리 손질만 해도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이네. 진즉 좀 이렇게 할걸. 암튼 나는 얼굴 가지고 부모님
원망은 전혀 할 처지가 아니지.'
 물론 이걸 말로 한 게 아니고 혼자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울 보기를 마치고
돌아설 때 미용사 아가씨가 흘긋 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아마 내가 그 경황 중에도 거울을 오래 드려
다보는 게 우스워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웃는 걸 처음 봤다. 그 웃음이 밉지 않았다. 그녀와 처음 눈길
을 마주친 나는 순간 움찔했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은근한 매력이 그 웃음에는 있었다. 아니, 그녀 
얼굴이 순간 내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어떤 여인의 얼굴과 겹쳐졌다.

 "갑시다!"
형사가 벌덕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갔다. 나도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를 따라 나갔다.
"이발료 지불을 안한 것 같은데요...?"
"0형이 신경쓸 것 없어요."
오, 경찰이니까 그 정도는 봐주는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여유가 있다면 다시
돌아가서 이발료를 지불했을 것이다.

 형사의 말이 맞았다. 서장님은 이른 새벽부터 서장실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실은 무척
넓고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내부 치장도 그럴싸했다. 큰 라운드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테이블 주위
에 안락의자들이 몇개 놓여 있었다. 나는 서장님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50대 쯤 되었
을까. 그는 잘 생겼고 직위에 걸맞는, 아니 그보다도 한결 뛰어난 품격을 갗춘 인물이었다. 그는 나를
가난뱅이 신출나기 작가가 아닌, 한사람의 인격체로 융숭하게 대우했다. 가식이 아니라 그 말씨에
그 눈빛에 그렇게 애쓰는 기색이 뚜렷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나왔고 쟁반에 담긴 약간의 과자도 나왔다. 서장이 점잖게 내게 말했다.
"이렇게 불쑥 나오시게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조금 있다가 아마 저쪽에서 선생을 모시러 또 누가
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아직 식전이시지요?"
"네. 자다가 불려나와서..."
"아이구. 죄송합니다. 그럼 시간이 딸리더라도 식사를 불러올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침을 늦게 먹는 습관이라."
"그렇군요. 작품활동은 활발하게 하시고 계십니까?"
"잘 써볼려고 노력은 하지만 쉽지 않군요. 워낙 재주가 딸려서요."
"아이구, 우리 직원이 그러는데 굉장히 촉망받는 분이라던데요. 우리 관내에 그런 분이 계신다니 
저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서장은 내게 따로 할 얘기가 있어 나를 부른 건 아니었다. 그는 저쪽의 지시를  차질없이 이행
하기 위해 새벽출근을 했던 것이다. 서장실은 중간기착점에 지나지 않았다. 커피를 거의 마시고 났
을 때 서장실 문이 벌컥 열리고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 오십대 초반?의 남자가 구두
발 소리를 저벅저벅 내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검정색 양복을 입었고 검정색 선그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서장이 마치 상사를 맞이하듯 벌덕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 점잖게
신사도를 유지하던 서장님이 그 앞에서 어쩔줄 모르고 쩔쩔맸다. 선그라스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내 앞으로 오더니 다짜고짜 밖으로 나가자고 손가락으로 밖을 지시했다. 내가 그를 따라 서장실
을 나올 때 서장님은 나에게도 깍듯하게 잘 가시라고 인사했다. 그는 끝까지 신사도를 지켰다.

 경찰서 앞마당에는 승용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선그라스가 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손수건 있어?"
"있습니다."
"그럼 주머니 있는 것 죄다 꺼내서 손수건에 싸서 나를 줘."
 그의 반말도 그렇지만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라는 지시는 정말 황당했다. 조금 전까지 서장실
에서 융숭한 예우를 받던 내가 순식간에 잡범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요즘 공항에서 밖에 나갈 때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 검색대에 올려놓는 절차를 거친다. 그때마다
당시 그 일이 연상되곤 한다.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 남에게 보이는 건 자기 내부 창자를 꺼내보
이는 것처럼 수치감과 모욕감을 준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값, 라이타, 동전 몇개, 휴지조각,
볼펜 두자루와 메모용 수첩 등을 꺼내 손수건으로 싸서 선그라스에게 건넸다. 그런 뒤 선그라스와
나는 승용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차는 '저쪽'을 향해 출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