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추억>이란 영화가 나왔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미 제작되어 국회에서 시사회도 가진 모양이다.
제작자 이름을 보니 내가 아는 사람으로 출판사를 운영하고 전에 야권에서 의원으로 출마도 했던 인물
이다. 오래 지났지만 그가 용인에서 출마했을 때 선거 팜플렛에 덕담도 몇자 적어준 일도 있다.
 
 내가 이 영화에 조금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근래 대선관계로 유신논쟁이 한창일 때
어느날 문득 나도 그런 제목을 머리에 떠올린 것이다. 다소 선정적이며 몇해 전 흥행대박을 친 영화
제목 흉내낸 것 같아 신선감은 없지만 내 머리에 고여있는 그 시절의 몇가지 기억들과는 딱 맞아떨
어지는 제목이었다. 이 제목으로 무슨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럴만한 자격도 이
력도 없다. 다만 제목만 머리속에 빙빙 돌았다. 그런데 바로 같은 제목의 영화가 벌써 제작완료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호기심으로 출판사에 연락을 해봤더니 여직원이 받는데 자기는 영화 쪽은 거의 모른다면서 다만
내용은 다큐 성격이 강한 것 같고 시사회를 마쳤으니 금명간 극장상영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사실
을 알려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큐라면 대강 영화 성격이 짐작이 가는데 그것은 내 머리 속의
기억들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내 얘기는 지극히 사적(私的)인 것이다. 글을 쓰기 전 한참 망설였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이
런 얘기를 다시 쓰게 되지 않을 것 같다. 투사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공적인 의미는 없으나
40년 전 일이라 요즘 세대들에게는 분위기 전달의 읽을 거리는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타
이틀로 글을 씀으로서 유신상속녀라는 모 여성에게 해악을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만한
뼈대가 있는 내용도 아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도리어 젊은시절 나의 치졸한 연애담이 중심
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그냥 편한 자세로, 마치 작은 사랑방에 이웃들을 모아놓고 지난 추억담을 두서없이 들려주는
방식으로 얘기를 해볼 생각이다. 서론이 너무 길어진 점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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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 겨울, 새벽녘에 누군가가 내가 잠자는 방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문이라야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인데 마당에 별채로 방 한칸을 만든 가건물이라 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었다. 나는 냉돌
에 겨우 모포 한장을 뒤집어쓰고 추위에  떨면서 겨우 선잠을 자다가 노크 소리에 놀라 퍼득 눈
을 떴다. 누가 이 신새벽에 나를 찾지? 혹시 하숙집 뚱보 아줌마가 보다 못해 모포 한장 건네줄
려고 나를 깨우는 것인가?
  "누구...누구시죠?"
" 아, 저 김입니다. 잠시 얘기할 게 있어서"
 약간 느린 말투의 남자 목소리였다.
'김이라고..?'   김이 세상에 한둘인가? 흐릿한 머리로 한참 생각한 끝에 그가 누군지 알아냈다.

 그는 나를 담당한 성동서의 형사였다. 이주쯤 전에 그는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가끔 내게 놀러
오게 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이른바 부임인사를 한 셈이다. 그 뒤로 며칠 걸러 한번씩 찾아와
서 몇차례 만났다. 동네 허름한 지하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신변잡담으로 서로
낯을 익히기도 했다. 그는 나보다 몇해 년상인데 인상이 그자디 사납지 않고 가끔 소리내지 않
고 씨익 웃는 걸 보면 마음씨도 그다지 사나운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러나 서로 겉도는 얘
기로 일관했기 때문에 더 깊은 속내는 알 길이 없었다.
 
 당시 나는 금호동 로타리에서 행당동 방향으로 고개 하나 넘어가면 나타나는 "논골"이라는
마을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말이 하숙이지, 사실은 헐값으로 어거지 떼를 쓰고 그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였다. 논골은 빈민촌이라 대부분 가옥들이 날림 가건물로 지어
져 헐값으로 방을 빌릴 수도 있었다. 나는 가족이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으나 
그곳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방, 즉 나 혼자만의 방을 갖는게 불가능해서 하는 수 없이 혼자
논골로 넘어와서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내 방에는 주인집에서 빌린 호마이카 밥상이 방 웃목에 놓여있고 책 몇권이 여기저기 딩굴
고 있고 몇가지 허드레 옷들이 벽에 걸려있다. 그것 뿐이었다. 서가도 제대로 된 책상도 없
고 겨울인데 이부자리도 없다. 내 동료 작가 한사람은 이 방에 와서 겨울인데 내가 모포 한
장으로 버티는 걸 보고 혀를 내두르고 돌아갔다. 글을 써서 지면에 이름을 낸지 이제 겨우
사오년, 그나마 다작도 아니고 어쩌다 드문드문 단편 한 두어편 발표하는 신참 작가의 어
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 고백하건데 나는 과작으로 한시절 악명을 떨치던 사람이다. 
그러니 주머니가 늘 비어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처지에 내게 담당 형사가 생겼다. 나도 한때 담당형사를 거느렸던 사람이라오. 어떤
때 혼자 이 생각을 하며 우쭐할 때도 있다. 비록 그 기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담당형사를 거느린 건 사실이다.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