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 토론회에 참석하시는 분들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토론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토론을 준비해주신 주최측과 참가자 세 분, 그리고 관전하시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래서 코지토님께 답변해드릴 만한 내용을 미리 적어서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캡콜드님께도 질문을 드리거나, 그 분들이 제 글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표출하신 의문점에 대해 대답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코지토님과 캡콜드님께 각각 답변과 함께 질문을 드리도록 하지요.

 

I.  코지토님께.


1.

 코지토님이 제 글에 대해 남겨주신 의견을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몇 가지 잘못된 이해를 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우선 그것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코지토님은 엄연히 '계급문제'인 이 사안을 '남녀문제'로 제가 치환시켰으며, 그것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그 문제제기를 수용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 사안을 남녀문제로 바라보는 쪽은 다름아닌 '네티즌', 혹은 인터넷 사용자들 중 남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위 '루저녀'의 발언이 한 개인의 몰지각한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굳이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날뛰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공중파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고요? 이후 캡콜드님께 드리는 답변에서도 나오겠지만, 그것은 '대중매체'라는 것을 완전히 잘못 이해할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공중파에서 하는 말은 대중 개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섯시 내고향'이라는 프로에 충북 괴산이 나왔다고 쳐 봅시다. 리포터가 '우리 고향 괴산, 참 좋죠?'라고 말했고요. 전남 담양에 사는 김 모씨가 '시러베 잡놈들, 내 고향은 괴산이 아니라 담양이여!'라고 소리를 꽥 지르며 분노하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방송은 '시청자'라는, 신문은 '독자'라는 어떤 하나의 '집단'을 대상으로 상정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보고 듣고 읽는 이들에게 개인적 메시지를 발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한 개인의 몰지각한 발언이 공중파에 나왔다고 해서, 그게 무슨 사회적 공론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개인이 신상을 털리고 네티즌들의 조롱감이 되어야 할 이유까지는 없는 거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루저녀'의 발언을 한 개인의 발언으로 이해한다면, 더 이상 논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러세요, 하고 넘어갈 일이죠. 가혹하게 신상 터는 애들의 잔인함을 비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여자들 생각하는 게 다 저렇지 않느냐'면서 화를 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남녀 대립 구도가 도입된 거죠. '루저녀'라는 개인에게 해코지를 하고 있지만, 남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대상으로서의 '한국 여자들'일 테니 말입니다. 그 점을 전제로 하여 남성들의 좁은 시야를 지적하는 제가 (올바른) 계급 구도 대신 (올바르지 않고 사태를 호도하는) 남녀 대립 구도를 도입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2.

게다가 코지토님이 생각하시는 '계급'이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여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남성의 하위 계급'입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남자보다 여자가 몇 푼이나마 더 적게 받아요. 남자들은 군대 갔다 올 동안 여자들은 취직한다고요? 결국 승진 싸움에서 여자들은 다 밀려 떨어져 나가고 남자들이 올라갑니다. 여성운동이 왜 생겼겠어요. 이렇게 '계급'으로서의 여성이 착취당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죠. 그 경향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대한민국은 여성 개발에 있어서 대단히 후진국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코지토님을 포함한 남자들은 스스로의 억울함을 항변하기 위해 '계급'이라는 어휘를 동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돈 많은 여자'와 '돈 없는 남자'를 대립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방금 말씀드렸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일부 돈 많은 여자'와 '일부 돈 없는 남자'를 대립시키면 성별에 대해 계급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계급은 그 계급 안에서 보편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어떤 남자들은 유사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탐닉하곤 합니다. 여자에겐 어떤 남자와 섹스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므로, 여자에게는 권력이 있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위에 있는 계급이고, 남자들의 이 분노는 계급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논리.

 

여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 모든 여자들을 잠재적으로 섹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시각 자체입니다. 남자들에게 묻고 싶네요. 님들이 무슨 아방궁에 사는 동탁입니까? 그렇게 씨를 퍼뜨리고 싶거든 자위를 해서 정자은행에 요플레를 기증하세요.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섹스를 허락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전제하는 그 발상 자체가 제게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한, 당연히 키나 학벌, 이른바 '스펙'으로 평가받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사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불특정 다수 중 누군가가 나 자신을 알아봐줄 수는 없어요. 누군가와 진정한 교류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그를 그 사람 자체로 바라봐야 합니다. 상호적이죠.

 

반면 '씨를 뿌릴 대상'으로만 여성을 바라본다면, 당연히 그 사람 또한 같은 기준에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제대로 평가를 받고 싶다면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줄 수 있는 사람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야죠. 지나가는 여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Q: '저는 당신을 교미의 대상으로 봅니다. 저는 당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나요?'

A: (위아래로 키를 훑어본 후) '꺼져 이 루저새끼야.'

 

남녀의 문제를 섹스의 문제로밖에 보지 않는 것부터가 문제라는 것을 제발 좀 알아주셨으면 싶습니다.


3.

제 논지는 여성주의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 말하자면 홀리한 건데,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황금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스펙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거든 너희도 스펙으로 평가하지 마라. 남자들이 여자들을 오직 섹스의 대상으로 보고, 따라서 허벅지가 꿀인지 찰인지 따지면서 학학거리고 있을 뿐이라면, 여자들 또한 냉정하게 스펙에 따라 돈 없는 놈들 걸러내고 키 작은 놈들 걸러내고 할 수밖에요. 여러분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싶다면, 우선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하는 법을 먼저 배우시라는 것이 저의 취지였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II. 캡콜드님께.

 

캡콜드님이 트랙백으로 보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내용을 정리해서 별도의 포스트를 쓸까 했지만 기왕 이런 기회가 왔으므로 그냥 말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정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에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인터넷 공간에서는 '정론'을 쓴다는 핑게를 대며 비겁한 언사를 일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 싣습니다.

 

앞서 여섯시 내고향 얘기를 하면서 잠시 말이 나왔는데, 캡콜드님은 '정론'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매체 수용자의 구성'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신문, 방송 등 '정론'의 담지체가 될 수 있는 매체 형식은 언제나 '독자층', '대중'이라는 어떤 하나의 집단을 대상으로 상정하지요.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미디어를 만드는 이들이 개별적인 사람이 아닌 하나의 집단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면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은 다수의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때는 인터넷에 '정론'을 쓰기 위해 노력해봤는데, 아무리 제가 뻣뻣한 말투를 써도 독자들은 그것을 자신과의 1:1 대화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더군요. 아마 리플을 통한 직접적 피드백이 가능한 탓도 있겠고, 많은 사람들이 나눠 보는 TV와 달리 모니터는 원칙적으로 한 사람이 한 번에 하나씩 쓰니까 그런 인식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그래요. 인터넷에서 글을 읽으면 사람들은 활자매체에서 읽을 때보다 훨씬 '개인적'으로 반응합니다.

 

이 차이를 염두에 두었을 때, '남자 네티즌'들이 패악질을 부리고 여자들이 할 말도 못 하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정론'을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오히려 저는 난동에 참여하는 남자 네티즌들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여, 쪽팔린 줄 알고 살자, 라고 말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어떤 '정론'을 다루는 매체에 글을 기고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써서는 안 되겠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온라인에서 토론을 하고 있고, 심지어 저와 캡콜드님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맞대본 적이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구어체로 (그것도 시간 간격을 상당히 둔 채)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대단히 사밀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매체입니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어떤 선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독자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낫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운 좋게도 젊은 나이에 몇몇 지면에 글을 쓸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론'이라는 것은 바로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죠. 하지만 이 사태는 시끄럽긴 해도 본질적으로 시시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제가 누리고 있는 소중한 기회를 함부로 낭비할 생각이 없습니다. 게다가 남자 네티즌들에게 직접 '그러지 맙시다'라고 말하는 게 훨씬 빨라요.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포스트를 썼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