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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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nes, the profits equation and the Marxist multiplier (By Michael Roberts)

케인즈, 이윤 방정식,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승수(乘數) (마이클 로버트)

 

* 출처: 마이클 로버트 블로그

http://thenextrecession.wordpress.com/2012/06/13/keynes-the-profits-equation-and-the-marxist-multiplier/

 

Even though the crisis deepens in Europe as the ‘bailout’ of Spain fails to stop the negative reaction of financial markets and Italy shows every sign of slipping into a depression along with the rest of southern Europe, I must return to my current hobby horse, the Keynesian theory of capitalist crisis and the policies to resolve it. Usually I am obsessed with supporting Marx’s rate of profit theory as an explanation for capitalist crisis. But once again, recent comments by the great Keynesian guru, Paul Krugman in his blog (http://krugman.blogs.nytimes.com/) stimulates me into returning to Keynes (see recent previous posts on various aspects of Keynesianism, <Paul Krugman, Steve Keen and mysticism of Keynesian economics>, 21 April 2012 and <Liquidity traps, effective demand and debt deflation>, 27 April 2012).

 

스페인의 '긴급 자금지원'이 금융 시장의 부정적 반응을 중단시키는데 실패하고 이탈리아가 남유럽 나머지 나라들과 더불어 침체로 빠져드는 모든 징후를 보여줌에 따라 유럽에서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나의 현재의 애완마, 즉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케인주의적 이론과 해결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통상 나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이론을 강력히 지지해 왔다. 그러나 또 한 번 대() 케인즈주의 구루인 폴 크루그만이 그의 블로그(http://krugman.blogs.nytimes.com/)에서 케인즈로 돌아가도록 나를 자극한다(케인즈주의의 다양한 면면들에 관해 최근에 써 올린 글들, 특히 <폴 크루그만, 스티브 킨, 그리고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신비주의>, 2012421일 과 <유동성 함정, 유효수요, 그리고 채무 감축>, 2012427일 을 보라).

 

In a recent post (1937, 3 June 2012), Krugman brought up the question of the renewed capitalist slump of 1937-8 during the Great Depression of the 1930s. In the post, Krugman suggested that current government policies in Europe and the US reminded him of the mistake of President Roosevelt in 1937 when he adopted fiscal austerity and pulled back on government spending programmes he had adopted after 1932, which, according to Krugman, pulled America out of the Great Depression (see graph below). According to Krugman, the subsequent austerity caused the slump of 1937-8. Just as then, the answer now should have been more government spending through borrowing and not fiscal austerity. This is the dominant refrain of the Keynesian alternative to official economic policy in the US and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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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최근 써 올린 글(<1937>, 201263)에서, 크루그만은 1930년대의 대불황 동안 1937-8년 사이에 경기침체가 다시 일어난 것을 따지고 들었다. 그 글에서, 크루그만은 유럽과 미국에서의 현재의 정부 정책들은 1937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실수를 상기시킨다고 주장했다. 당시 루즈벨트는 긴축재정을 채택해 1932년 이후 채택했던, 크루그만에 따르면 미국을 대불황에서 구해낸 (아래 그래프를 보라), 정부 지출 프로그램들을 중단시켰다. 크루그만에 따르면, 그 긴축정책은 1937-8년의 침체를 야기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시행되어야 했던 것은 긴축재정이 아니라 차용을 통한 더 많은 정부지출이다. 이것이 미국과 유럽에서의 공식적 경제정책에 대한 케인즈주의적 대안의 지배적 상투어이다.

 

And it’s not just Krugman. There is a new radical think-tank that has just kicked off in the UK. It’s got a great name: Class - the Centre for Labour and Social Studies. Sounds socialist, even Marxist, yes? Unfortunately, at its first meeting, the speakers, especially the economists, were all Keynesian to a man and woman. Take the main paper at the conference: Fiscal austerity - the cure which makes the patient worse, by Professor Malcolm Sawyer. http://classonline.org.uk/pubs/item/fiscal-austerity-the-cure-which-makes-the-patient-worse-full-paper. All the Keynesian arguments are presented against austerity. Apparently, a Marxist analysis and the role of profit has no contribution to make in explaining the Great Recession and the ensuing long depression and, above all, what to do about it.

 

크루그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에서 막 출범한 새로운 급진적 씽크 탱크가 하나 있다. 이름이 아주 멋지다: 클래스 - 노동 및 사회연구 센터. 사회주의적으로,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유감스럽게도, 그것의 첫 번째 회합에서, 화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케인즈주의자였다. 그 대회에서 말콤 소여 교수가 발표한 주요 논문을 보자: <긴축재정 - 환자를 더 악화시키는 치료법>. http://classonline.org.uk/pubs/item/fiscal-austerity-the-cure-which-makes-the-patient-worse-full-paper. 긴축에 반대하는 모든 케인즈주의적 논변들이 제시되어 있다.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이윤의 역할은 대불황과 이어진 장기침체를 설명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데 아무런 기여할 것도 갖고 있지 않다.

 

And only last month, John Weeks, a longstanding Marxist economist at SOAS and author of several seminal books on Marxist economic theory, put a piece out praising the ‘Argentine’ alternative to neoliberal policies (http://www.compassonline.org.uk/news/item.asp?n=15307). Apparently, the current ‘social democratic’ President Kirchner has instituted a central bank run under ‘democratic control’. I’m sure central banks should not be ‘independent’. When their independence was established during the neoliberal period by other social democrats like the UK’s Gordon Brown, it meant independence from government so as to operate in the interests of the banks and finance capital. But is a politically-controlled central bank that can offer lower interest rates and perhaps easier money for businesses really the only policy in this global depression? It’s pure Keynesianism to imply it or am I being unfair on Professor Weeks?

 

그리고 불과 한 달 전에는 오래도록 명망을 떨친 소사(SOSA)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에 관한 몇 권의 중요한 책들의 저자인 존 윅스가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아르젠티나의 대안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 (http://www.compassonline.org.uk/news/item.asp?n=15307). 명백히, ‘사회민주주의적인현 대통령 키치너는 민주주의적 통제를 받는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나는 중앙은행들은 독립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같은,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중앙은행들의 독립성이 확립되었을 때, 그것은 은행들과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기 위한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더 낮은 이자율, 그리고 아마도 더 쉽게 빌릴 수 있는 사업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통제되는 중앙은행이 정말 이 전지구적 침체기에 가용한 유일한 정책일까? 순수 케인즈주의는 그것을 함축한다 - 또는 나는 윅스 교수에게 공정치 못한 것일까?

 

* 소사(SOSA) - 런던 종합대학교의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 스쿨(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Well, I’m going further. I think it is a serious deficiency for those fighting for labour against capital and needing to find the right policies to rely on Keynesian theory and policy. Why do I say that? Well, let me start with the kernel of Keynes’ contribution to economics: his emphasis on the macro economy, the original focus of the classical economists of early industrial capitalism (Smith, Ricardo, Malthus), rather than the micro economics of the behaviour of individual economic ‘agents’ (firms and consumers) beloved of the neo-classical school that dominates now.

 

글쎄, 더 얘기해 보자. 나는 자본에 맞서 노동을 위해 싸우고 올바른 정책들을 찾아내야 할 이들이 케인즈주의 이론과 정책에 의지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 케인즈가 경제학에 기여한 바의 핵심에서 시작해보자: 현재 주류인 신고전 학파가 애호하는 개개 경제 행위자들’(기업들과 소비자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미시경제학과는 달리 그는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기 고전 경제학자들 (스미스, 리카르도, 맬더스)의 본래의 초점이었던 거시경제를 강조했다.

 

Keynes wanted us to focus on the macro economy through his key national accounting ‘identities’. National income = national expenditure that’s easy. National income can then be broken down to Profit + Wages; and National expenditure can be broken down to Investment + Consumption. So Profit + Wages = Investment + Consumption. Now if we assume that wages are all spent on consumption and not saved, then Profits =Investment. So far, so good.

 

케인즈는 우리가 그의 주요 국가 회계 항등식들을 통해 거시경제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국민소득 = 국민지출 -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국민소득은 이윤+임금들로 분석될 수 있다; 그리고 국민지출은 투자+소비로 분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윤+임금들 = 투자+소비. 이제 우리가 임금들이 모두 소비에 지출되고 저축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이윤들 = 투자. 지금까지는 아주 좋다.

 

But here is the rub. This identity does not tell us the causal direction that can help us develop a theory. For Keynes, the causal direction is simply that investment creates profit. But what causes investment? Well, the subjective decisions of individual entrepreneurs. What influences their decisions? Well, ‘animal spirits’, or varying expectations of a return on investment etc. Already we are back into the subjective approach of the neoclassical school.

 

그러나 이 항등식에는 장애가 있다. 이 항등식은 이론을 전개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인과방향을 우리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 케인즈에게, 인과방뱡은 단순히 투자가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투자를 야기하는가? 아마도, 개개 기업가들의 주관적 결정들. 무엇이 그들의 결정들에 영향을 끼칠까? 아마도, ‘동물적 본능’, 아니면 투자 수익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기대들 기타 등등. 이미 우리는 신고전 학파의 주관적 접근법으로 돌아가 있다.

 

Anyway, the idea that profits depend on investment is back to front. For Marxists, it is the other way round: investment depends on profit. And profit depends on the exploitation of labour power and its appropriation by capital. Thus we have an objective causal analysis based on a specific form of class society, not based on some mystical psychoanalysis of individual human behaviour. The Keynesian causal direction leads to a cockeyed understanding of the laws of motion of capitalism.

 

어쨌든, 이윤이 투자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앞뒤가 바뀌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반대가 맞다: 투자가 이윤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윤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와 전유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개 인간 행위에 대한 어떤 신비스러운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계급사회에 토대한 객관적 인과적 분석을 갖고 있다. 케인즈주의적 인과방향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들에 대한 비뚤어진 이해를 낳는다.

 

This brings me to the profit equation developed by Michel Kalecki, a Polish economist and synthesiser of Marx and Keynes. His equation is simply that Profits = Investment; or more importantly, profits depend on investment. As a recent paper (James Montier, What goes up must come down!, March 2012) supporting Kalecki put it succintly: “This is, of course, an identity a truism by construction. However it can be interpreted with some causality imposed. After all, profits are a residual: they are reminder after the factors of production have been paid.” Really? That’s neoclassical theory. Montier goes on: “Investment drives profits because when a firm or a household decides to invest in some real asset they are effectively buying a good from another firm, creating profits for that entity.” So it seems that profits come from buying things (consumption) and not from surplus value created in the labour process, as Marx argued.

 

이것은 폴란드 경제학자이자 마르크스와 케인즈의 종합자인 미쎌 칼레키가 개발했던 이윤방정식을 상기시킨다. 그의 방정식은 단순히 이윤들 = 투자라는 것이다; 또는 중요한 함축을 더 분명히 해서 말하면, 이윤은 투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칼레키를 지지하는 한 최근 논문(제임스 몽티에, <올라간 것은 내려와야 한다!>, 20123)이 간명하게 주장하는 대로: “이것은, 물론, 하나의 항등식 - 구조상의 자명한 이치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인과성을 부과해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윤은 하나의 잔여이다: 그것들은 생산요소들이 지불되고 난 후의 잔여이다.” 정말 그럴까? 그것은 신고전적 이론이다. 몽티에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투자는 이윤을 추동하는데, 한 기업이나 한 가구가 어떤 실질 자산에 투자하기를 결정할 때 그것들은 결국 또 다른 기업으로부터 재화를, 그 재화에 대해 이윤을 창출하면서, 구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윤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노동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에서가 아니라 재화를 구매하는 것 (소비)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This argument is spelt out even more explicitly in a 2008 paper, Where profits come from, by David Levy, Martin Farnham and Samira Ryan at the Jerome Levy Forecasting Center. The authors state that the profits equation identifies the “sources of profits = investment, non-business saving (households), dividends and profit taxes.” How taxes on profits can be a ‘source’ of profit is beyond me. Or how dividends can be a ‘source’ of profit rather than a part of profit is also weird. Take these out and assume workers don’t save and we are back to the ‘source’ of profit as investment. But following the Kalecki equation further: Profits = Investment (non-capitalist) Savings. Savings can be divided into three parts: savings by households, saving by governments and foreign capitalist savings. If households save more (as they tend to do in a slump) and foreign savings rises (in other words the national economy’s deficit with the rest of the world rises), then investment will be lower and so will profits. However, there is a saviour: government savings, or to be more exact; government dissaving. If government runs up a big budget deficit, in other words, dissaves, it can boost investment and thus profits.

 

이 논변은 제롬 레비 예측 센터의 데이비드 레비, 마틴 판헴, 그리고 사미라 리안이 쓴 2008년 논문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서는 더 명시적으로 펼쳐있다. 저자들은 그 이윤방정식이 이윤의 원천 = 투자, 비사업 저축 (가구들), 배당금, 그리고 수익[이윤]임을 확인한다고 진술한다. 어떻게 수익[이윤]세가 이윤의 한 원천일 수 있는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어떻게 배당금이 이윤의 일부이기보다는 이윤의 한 원천일 수 있는 지 또한 괴상하다. 이것들을 제외하고 노동자들이 저축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이윤의 원천이 투자라는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칼레키 방정식을 더 따라가 보면, 이윤 = 투자 - (비자본주의적) 저축이다. 저축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구 저축, 정부 저축, 그리고 외국인들과 자본가들의 저축. 가구들이 (침체기에 으레 그렇듯이) 더 저축을 하고 외국인 저축이 상승한다면 (달리 말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국민경제의 적자가 상승한다면), 투자는 더 저하될 것이고 따라서 이윤도 저하될 것이다. 그렇지만, 구원투수가 있다: 정부 저축,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의 수입초과 지출. 정부가 대규모 적자예산을 단행하면, 달리 말해, 수입초과 지출을 하면, 그것은 투자를, 따라서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다.

 

Indeed, currently, in the US, using the Kalecki profits equation, it would appear that profits depend on government dissaving or net borrowing. Without it, profits would fall. So the last thing that capitalism should do is cut government spending. The Keynes-Kalecki profits equations tells us that capitalism can be saved by more government spending, not less. And yet official policy is the opposite (see graph below of US government spending excluding social transfers). So, just as in 1937, the official policies of austerity are going to create a new slump.

 

실제로, 현재, 미국에서, 칼레키 이윤 방정식을 사용하면, 이윤은 정부 수입초과지출이나 순차용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 없이는, 이윤은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최후까지 삼가야 하는 것은 정부지출 삭감이다. 케인즈-칼레키 이윤 방정식은 우리에게 자본주의가 더 적은 정부지출이 아니라 더 많은 정부지출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고 얘기해 준다. 그렇지만 공식적 정책은 정반대이다(사회보장 급부를 제외한 미국 정부지출을 나타내는 아래 그래프를 보라). 따라서, 1937년에 그랬던 것처럼, 공식 긴축정책은 새로운 침체를 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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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at if we turn the causal direction the other way: the Marxist way. Now investment in an economy depends on profits. If profits are fixed in the equation and cannot be increased, then investment cannot be increased. So capitalist investment (i.e investment for a profit) will now depend on reducing the siphoning off of profits into capitalist consumption and/or on restricting non-capitalist investment, namely government investment. So capitalism needs more government saving, not more dissaving. Indeed, it is the opposite of the Keynesian policy conclusion. Government borrowing will not boost profits, but the opposite and profits are what matters under capitalism. So government is a negative for capitalist investment.

 

그러나 우리가 인과방향을 다른 방향, 즉 마르크스주의적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 경우 경제에서 투자는 이윤에 의존한다. 방정식에서 이윤이 고정되어 있고 증대될 수 없다면, 투자는 증대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투자 (즉 이윤을 위한 투자)는 이제 자본가의 소비로의 이윤 유용을 감소시키거나/감소시키는 것과 비자본주의적 투자, 즉 정부투자를 제한하는데 의존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더 많은 정부 수입초과지출이 아니라 더 많은 정부저축을 필요로 한다. 정말이지, 그것은 케인즈주의적 정책결론의 정반대이다. 정부차용은 이윤을 끌어올리지 않고 오히려 떨어뜨릴 것이다 - 그리고 이윤은 자본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정부는 자본주의적 투자의 반대편이다.

 

Government spending will not boost the capitalist economy because it eats into profitability by depriving the capitalist sector of some of its potential profit. Kalecki sort of realised this in his famous paper, Political aspects of full employment, 1943, when he said: “public investment should be confined to objects that don’t compete with the equipment of private business. Otherwise, the profitability of private investment might be impaired and the effect of public investment upon employment offset by the negative effect of the decline in private investment”.

 

정부지출은 자본주의 부문의 잠재적 이윤 일부를 박탈해 수익성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를 끌어 올리지 못할 것이다. 칼레키는 그의 유명한 논문인 <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들>, 1943년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 점을 깨달았다: “공적 투자는 사적 사업 설비와 경쟁하지 않는 대상들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적 투자의 수익성이 손상을 입을 것이고 공적 투자의 고용효과는 사적 투자 하락의 부정적 효과에 의해 상쇄될 것이다.”

 

In an, as yet, unpublished paper (due to be presented at this year’s UK Marxism Conference), Guglielmo Carchedi presents the difference I have described here as between the Keynesian multiplier (i.e. consumption to investment to profits) and the Marxist multiplier (i.e. profits to investment to consumption): “In the Keynesian multiplier, state induced investments have a positive effect on production and thus on income, spending, and saving..Profitability plays a subordinate role and the effects on the economy are always apparently positive. In the Marxist multiplier, profitability is central. The question is whether n rounds of subsequent investments generate a rate of profit higher than, lower than, or equal to the original average rate of profit”.

 

, 아직 출간되지 않은, 올해 영국 마르크스주의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 논문에서, 구글리엘모 카세디는 내가 여기서 케인즈주의적 승수 (즉 소비에서 투자를 거쳐 이윤으로)와 마르크스주의적 승수 (즉 이윤에서 투자를 거쳐 소비로) 사이에 있는 차이로 기술한 것을 진술한다: “케인즈주의적 승수에서, 국가에 의해 유도된 투자는 생산에, 그리고 따라서 소득, 지출, 그리고 저축에 긍정적 효과를 끼친다... 수익성은 종속적 역할을 하며 경제에 끼치는 효과는 언제나 명백히 긍정적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승수에서, 수익성은 중심적이다... 문제는 투자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원래의 평균이윤율보다 높은 이윤율, 원래의 평균이윤율보다 낮은 이윤율, 또는 원래의 평균이윤율과 같은 이윤율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The Marxist economists Gerard Dumenil and Dominique Levy have made desperate attempts to reconcile the Keynesian/Kalecki analysis with a Marxist analysis with Bridging the gap: between Kalecki’s words and the modelling of monetary macroeconomy (http://www.jourdan.ens.fr/levy/dle2012g.pdf ) and Keynesian and Marxian macroeconomics: towards a synthesis (http://www.jourdan.ens.fr/levy/dle2011g.pdf). After much detailed and often incomprehensible analysis, they conclude “Despite such promising inroads, however, the models presented by Kalecki do not actually lay the foundations of what could be seen as a “common ground” within heterodox economics”. Oh dear!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인 제라르 듀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는 <칼레키의 말과 화폐거시경제 모델링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기> (http://www.jourdan.ens.fr/levy/dle2012g.pdf ) <케인즈적 거시경제학과 마르크스적 거시경제학: 종합을 향하여> (http://www.jourdan.ens.fr/levy/dle2011g.pdf) 로 케인즈주의적/칼레키적 분석을 마르크스적 분석과 화해시키려는 필사적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대단히 상세하고 종종 불가해한 분석을 한 끝에, 그들은 전도양양해 보이지만 칼레키가 제공한 모델들은 실제로는 비정통 경제학 내부에 공통 입장이라 할 만한 것의 기반을 놓지 못 한다고 결론 내린다. 저런!

 

Indeed, those economists most devoted to supporting capitalism are acutely aware of this issue of profitability. John Cochrane, the leading economist of the Chicago School and strong backer of austerity, responded to the idea of more government spending in his blog (http://johnhcochrane.blogspot.co.uk/) with: “I note most of our government’s “investment” projects consist of high speed rail, alternative energy boondoggles, photovolatics that need protection from Chinese imports and so on. Say what you will about side benefits, but none of these projects has a remote chance of returning a positive return to the US TreasuryIf the Treasury gets a cent back on these it will be a miracleshovel-ready projects are hard to find, even if you do not want a positive rate of return to the Treasury but simply want to get money out the door. So what does (the Keynesian) have in mind as concrete positive return investments?”

 

사실, 자본주의를 헌신적으로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은 이 수익성 쟁점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다. 시카고 학파의 주도적 경제학자이자 열렬한 긴축 옹호자인 존 코흐레인은 그의 블로그 (http://johnhcochrane.blogspot.co.uk/)에서 더 많은 정부지출이라는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나는 우리 정부의 투자기획들 대다수가 중국 수입품들로부터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속철도, 대체에너지 따위들, 태양광 발전, 기타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어떤 부수적 이익에 관해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 기획들 중 어느 하나라도 미국의 재정수익을 증대시킬 가능성은 희박하다... 1센트라도 재정수익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재정수익이 생기기를 바라지 않고 그저 돈을 푸는 것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기획들은 드물다. 그렇다면 케인즈주의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구체적인 수익 증대 투자들로 보고 있는 것인가?”

 

Once again, don’t get me wrong. This does not mean austerity is the right policy. The recent suggestion by the IMF director general Christine Lagarde (salary $470k per year and no tax) that austerity has worked by citing the likes of Latvia and Estonia is so much bunkum, as the Keynesians have shown.

 

이 번에도 나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긴축이 올바른 정책이라는 것이 아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등을 예로 든, 긴축이 유효했다는 (소득세 없이 47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최근 주장은, 케인즈주의자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순전히 헛소리다.

 

The graph below shows that government spending cuts etc have not returned Estonia’s GDP back to pre-crisis levels. Greece has carried out a larger fiscal consolidation than plucky little Latvia and is still in deep depression. These very small capitalist states in Eastern Europe have done a little better because they received huge fiscal transfers, way more than Greece (see the comments of the IMF’s chief economist and semi-Keynesian, Olivier Planchard, http://blog-imfdirect.imf.org/2012/06/11/lessons-from-latvia/). Around 20% of Estonia’s budget is made of EU funding. No banks were bailed out because they are owned by Sweden and other Nordic banks and their exports are heavily oriented towards Scandinavia, which has generally fared much better in the long depression. And government debt was never high in the first place.

 

아래 그래프는 정부지출 삭감 등등이 에스토니아의 GDP를 위기 전 수준으로까지 되돌리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는 원기왕성한 소국 라트비아 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재정강화를 실행했지만 여전히 깊은 불황에 빠져 있다. 이 아주 작은 동유럽 자본주의 나라들은 [그리스보다] 조금 더 나았는데, 그리스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의, 막대한 재정 융통금을 지원받았기 때문이다(IMF의 수석 경제 전문가이자 반() 케인즈주의자인 올리비에 플랑카르의 논평을 보라, http://blog-imfdirect.imf.org/2012/06/11/lessons-from-latvia/). 에스토니아 예산의 약 20%EU의 자금지원으로 충당되었다. 긴급 자금 지원을 받은 은행들은 없었는데, 스웨덴 및 다른 북유럽 은행들이 그것들의 소유자였고 그 나라들 상품들의 주요 수입국이 장기 침체 동안에도 대체로 별 탈 없었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 정부채무의 수위 자체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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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really helped these economies turn around, such as they have done, was not fiscal austerity, but the destruction of labour rights to allow employers to boost profits and emigration. A sizeable proportion of the Baltic people have left their homelands to find work in the rest of Europe. Skilled workers have disappeared. Latvia has undergone a demographic collapse. Young Latvians have fled the country. In 1991 the population was 2.7 million. The most recent census shows the population had dropped to 2 million, but is probably lower because of continuing emigration. The ‘solution’ of emigration is not new the Irish did this for centuries and in this current crisis, emigration is again part of Ireland’s ‘solution’, not fiscal austerity and obeying the dictates of the Troika as the Euro leaders and the IMF like to suggest.

 

이 나라들의 경제가 그와 같이 호전되는데 정말로 일조했던 것은 재정긴축이 아니라 고용주들이 이윤과 이주를 끌어 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노동 권리들의 파괴였다. 발틱 지역 나라들 국민 상당수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숙련 노동자들은 사라졌다. 라트비아는 인구붕괴라 할 만한 것을 겪었다. 청년들이 나라를 떠났다. 1991년 라트비아 인구는 270만이었다. 가장 최근의 인구조사는 인구가 200만으로 줄었음을 보여주는데, 계속되는 이주 때문에 실제로는 더 아래일 것이다. 이주라는 해결책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 아일랜드인들은 이것을 수 세기 동안 했었으며 현재의 위기 동안에도, 유로 주도국들과 트로이카의 제안에 따른 재정긴축이 아니라 이주가 아일랜드의 해결책의 일부이다.

 

* 트로이카 -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

 

But that also does not mean that more government spending a la Keynes is going to boost investment and take us out of the long depression either.

 

그러나 그것은 또한 케인즈 식의 더 많은 정부지출이 투자를 끌어올려 장기침체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The trouble with Keynes is that he is so inconsistent in his ideas that it becomes even more difficult to follow just what his theory and views are than it does with Marx! Keynesian followers argue about what he really said even more than Marxists do about Marx. Some followers reckon he was a radical opposed to capitalism (see Geoff Tily’s book, Keynes Betrayed), Others consider that he was actually conservative. Krugman, like Keynes, swings from one view of Keynes to another.

 

케인즈의 문제점은 그의 이론과 견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조차 마르크스의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려울 정도로 그의 생각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케인즈주의 추종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에 관해 논란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더 그가 정말 말했던 것에 관해 논란을 벌인다. 일부 추종자들은 그가 급진적인 자본주의 반대자였다고 생각한다(죠프 틸리의 책, <배반당한 케인즈>를 보라). 다른 이들은 그가 실상 보수적이었다고 믿는다. 크루그만은, 케인즈처럼, 케인즈의 이 견해 저 견해 사이를 오간다.

 

Keynes was a dynamic personality and a great writer on current events (as was Marx) but his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makes Marx’s Capital seem like a model of simplicity. I know that Keynes answered his arch rival, the Austrian economist Hayek, who complained that he kept changing his views (see the excellent book by Nicholas Wapshott, Keynes/Hayek), by saying that ‘if the facts change, I change my ideas, don’t you?’ But it does not help if somebody changes ideas like changing shirts.

 

케인즈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역동적인 인물이었으며 당대의 사건들에 대한 훌륭한 저술가였지만 그의 <고용, 이자, 화폐에 대한 일반이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단순성의 전범인 듯 보이게 한다. 나는 케인즈가 그의 주요 논적이며 그가 계속 견해를 바꾸고 있다고 불평한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 하이에크에게 (니콜라스 왑쇼트의 뛰어난 책인 <케인즈/하이에크>를 보라) “사실이 변하면 내 생각도 변한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라는 말로 답변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누군가가 셔츠를 바꾸어 입듯이 계속 생각을 바꾼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By that, I mean sometimes Keynes seems to saying that the answer to depression is easy money and low interest rates; at other times, he argues that is not enough and you need government spending and budget deficits; and then later he argues that budget deficits are bad. Sometimes he advocates the ‘socialisation of investment’ implying replacing capitalist investment, but at other times, he wants private capital protected.

 

이 말로, 나는 때때로 케인즈가 불황의 해결책은 쉽게 빌릴 수 있는 화폐와 낮은 이자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정부지출과 적자예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적자예산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때때로 그는 자본주의적 투자의 대체를 함축하면서 투자의 사회화를 옹호하지만 다른 경우들에서는 사적 자본이 보호받기를 원한다.

 

Indeed, towards the end of his life in the postwar period he seemed to suggest that his radical policies of easy money and government deficit were not necessarily right. “I find myself moved, not for the first time, to remind contemporary economists that the (neo) classical teaching embodied some permanent truths of great significance, which we are liable today to overlook because we associate them with other doctrines which we cannot now accept without much qualification. There are in these matters deep undercurrents at work, natural forces, one can call them, or even the invisible hand, which are operating towards equilibrium. If it were not so, we could not have got on even so well as we have for many decades past.” (Keynes, 1946: 185)

 

사실, 전후 시기 그의 생의 말기 무렵 그는 쉽게 빌릴 수 있는 화폐와 정부 적자라는 그의 급진적 정책안이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님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러는 것은 아닌데, () 고전 학설이 커다란 의의를 갖는 몇 개의 영원한 진리들을 구현한다는 점을 동시대 경제학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나서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진리들을 간과하기 쉬운데, 그것들을 크게 한정하지 않고는 승인할 수 없는 다른 교설들과 엮어 놓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사태에는 균형을 향해 움직이는 심층의 저류가, 말하자면 일종의 자연적 힘들 또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이럭저럭 잘 굴러오지 못했을 것이다.”(케인즈, 1946: 185)

 

He goes on: “I must not be misunderstood (lets try not to! MR). I do not suppose that the (neo) classical medicine will work by itself or that we can depend on it. We need quicker and less painful aids. . . . But in the long run, these expedients will work better and we shall need them less, if the classical medicine is also at work. And if we reject the medicine from our systems altogether, we may just drift on from expedient to expedient and never get really fit again.” (Ibid.: 186)

 

그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를 오해하지 마시라 (오해하지 않도록 해보자! - 필자). 나는 () 고전적 처방이 혼자 힘만으로 작동할 것이라거나 우리가 그것에 의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신속하고 덜 고통스러운 보조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 방편들은 고전적 처방 또한 작동해야 더 잘 작동할 것이고 덜 필요로 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체계에서 그 처방을 전적으로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런 저런 방편들 사이를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며 결코 다시는 호황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상동: 186)

 

Thus Keynes seems to be arguing that his view of depression and his solutions of easy money and government spending should be seen as just temporary, because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is fine and will tend to a beneficial equilibrium as neoclassical economics argues. Apparently, “in the long run”, we are not dead, after all. The usual response of people who are accused of not really knowing where they stand is to say that consistency is the province of clerks. Well sometimes, clerks have a point.

 

따라서 케인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교하고 신고전 경제학이 주장하는 대로 이익을 주는 균형을 향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불황에 대한 그의 견해와 쉽게 빌릴 수 있는 화폐와 정부지출이라는 그의 불황 해결책이 임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명백히,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결국 죽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 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비난당하는 사람들의 통상적 반응은 일관성은 사무원들의 소관사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글쎄, 때때로 사무원들에게도 일리가 있다.

 

Take his views on profit. In the General Theory, you find him raising the idea of profitability pretty early. He calls profitability ‘the marginal efficiency of capital’, using neoclassical terminology from the concept of ‘factors of production’. So profit is the return on the factor of capital, just as wages are the return on the factor of labour. Keynes interestingly tells us that cycles of boom and slump are ‘occasioned’ by changes in the marginal efficiency of capital. Indeed “the predominant explanation of crisis is not primarily a rise in the rate of interest, but a sudden collapse in the marginal efficiency of capital”.

 

이윤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자. <일반 이론>에서, 우리는 그가 아주 앞에서부터 수익성 관념을 제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수익성을, ‘생산요소개념을 지칭하는 신고전적 용어법을 사용해, ‘자본의 한계효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윤은, 임금이 노동 요소에 기인한 이득인 것처럼, 자본 요소에 기인한 이득이다. 케인즈는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호경기와 불경기의 순환은 자본의 한계효율 상의 변화들에 의해 야기된다고 얘기한다. 실로 위기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항은 일차적으로 이자율의 상승이 아니라 자본의 한계효율의 갑작스러운 폭락이다”.

 

This sounds promising, but don’t get your hopes up! What causes a crisis is when entrepreneurs are over-optimistic about potential profit relative to the going rate of interest. So the problem is not the rate of profit as such, but unpredictable expectations that it will be high enough to justify the going rate of interest. When it is not, then a crisis can ensue. The crisis is a product of wrong judgements, not the actual rate of profit relative to the needed reproduction of capital, as Marx would argue. The marginal efficiency of capital properly expresses the return on that factor of production as it tends to an equilibrium. So there is nothing wrong with the production process under capitalism. The problem is in the financial sector where the rate of interest gets out of line.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기대를 높이지는 마시라! 위기는 기업가들이 현행 이자율에 비할 때의 잠재적 이윤율에 관해 과도하게 낙관적이 될 때 야기된다. 따라서 문제는 이윤율 자체가 아니라 이윤율이 현행 이자율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이다. 충분히 높지 않을 때, 그 결과로 위기가 일어날 수 있다. 위기는 마르크스가 주장하곤 한 것처럼 필요로 되는 자본 재생산에 비할 때의 실제 이윤율의 산물이 아니라 그릇된 판단들의 산물이다. 자본의 한계효율은 [자본이] 균형에 이르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그 생산요소에 기인한 이득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도 없다. 문제는 이자율이 적정선을 벗어나는 금융부문에 있다.

 

So very quickly Keynes drops his analysis of profit and moves on to more short-term fluctuations in the financial sector the monetary sector to him (for Marx, the whole economy is monetary). And here the subjective triumphs over the objective and profits as an objective economic category soon disappears from view, so that modern followers of Keynes concentrate almost entirely on his macro identities for an explanation of the laws of motion of capitalism, as we have seen.

 

그렇게 아주 재빨리 케인즈는 그의 이윤 분석을 중지하고 금융부문 - 그에게는 화폐부문 (마르크스에게는, 전체 경제가 화폐적이다) - 에서의 더 단기적인 변동들로 이동한다. 그리고 여기서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하나의 객관적 경제적 범주로서의 이윤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때문에,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동시대의 케인즈 추종자들은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설명을 위해 거의 전적으로 그의 거시적 항등식들에 집중한다.

 

So what is the correct policy response to the long depression? A Marxist analysis, in my opinion, recognises that the underlying cause of the crisis in the first place is to be found in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to generate enough profit. Then, until capitalism can destroy enough old or ‘dead’ capital (employees, old technology and unprofitable weaker capitalist enterprises) to restore profitability and start the whole thing again, it will languish. In this long depression, I reckon this will require another big slump.

 

그렇다면 장기불황에 대한 올바른 정책 응답은 무엇인가? 내 의견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애초 위기의 근저 원인이 자본주의 생산이 충분한 이윤을 발생시키는데 실패한 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수익성을 회복하고 전체 순환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낡은 또는 죽은자본을 파괴하기 전까지 자본주의는 쇠약해질 것이다. 현재의 장기불황에서는 이 파괴는 또 한 번의 큰 불경기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Keynesian-style government spending programmes can alleviate some of the pain for labour and government investment can help create new jobs. But this will not boost profitability, but instead will be at its expense. And as long as capitalism is the dominant form of social production, that will mean government spending will delay the capitalist recovery, not speed it up. The slump of 1937-8 was not the result of the withdrawal of government spending, but because those programmes were not working in restoring profitability. If we want to end the long depression and avoid another big slump, bigger than that of 1937-8, we need to end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and replace it with democratically controlled, planned social production.

 

케인즈주의 스타일의 정부지출 프로그램들은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 일부를 경감시킬 수 있으며 정부투자는 새 일자리들이 생기는데 일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수익성을 끌어올리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끌어내리는 것을 대가로 치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의 지배적 형태인 한에서, 그것은 정부지출이 자본주의의 회복을 촉진하기보다는 지체시킬 것임을 의미한다. 1937-8년의 불경기는 정부지출이 삭감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프로그램들이 수익성을 회복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가 장기침체를 끝내고 1937-8년의 불경기보다 더 큰, 또 한 번의 큰 불경기를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종식시키고 그것을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계획적인 사회적 생산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PS Guys, I suddenly thought that I ought to justify my closing remark that US profitability was not restored to the level of 1929 by 1937 and another slump was necessary to try and do so. I checked my data on the US rate of profit and indexed the level at 1929 to 100. This is what I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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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미국의 수익성이 1937년에도 1929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으며 회복을 시도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불경기가 필연적이었다는 끝맺는 말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들었다. 나는 나의 데이터를 미국 이윤율과 대조했고 1929년의 이윤율 수준을 100으로 지수화 했다. 그 결과 내가 발견한 것은 위와 같다.

 

As you can see, the US rate of profit was still 20% below its 1929 rate in 1937. Indeed, it did not return to its pre-depression level until the war began.

 

보다시피, 미국 이윤율은 1937년에도 1929년에 비해 아직 20% 낮다. 실로, 그것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불황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