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101번째 테제의 번역입니다. 지인이 인상적인 구절이라고 해서 다른 곳에 올려 놓은 글인데 번역이 좀 이상한 데가 몇 군데 있어서 제가 보다 의역에 가깝게 옮겨 보았습니다. 물론, 내용 자체로 보자면 저 역시 더없이 인상적인 글귀네요.




온실 속의 화초/


 

조숙함과 늦게 성숙함에 대해 말하는 것- 전자의 경우는 죽음에의 소망으로부터 흔히 자유롭지 못한데- 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일찍이 성숙하는 자는 예견 속에 산다. 그의 경험은 선험적인 것이고, 말과 표상을 붙잡는 예견적인 감수성이다. , 사물과 인간이 이후에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견은-마치 그 스스로 포만감에 차서- (이윽고) 외부 세계에서 후퇴하게 되고, (급기야)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쉽게 신경질적인 유희거리의 색채를 부여하게 된다. 만약 조숙한 자가 단순하게 영민한 자 이상이라면 그는 정상인들이 즐겨 도덕적인 명령이라고 치장하는 강제를 스스로 맞이하도록 강제된다. 그는 힘들게 그의 상상력이 차지 하고 있었던 공간을 대상들과의 관계를 위해 내주어야 한다: 그는 고통을 느끼는 것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 나 아닌 타자와의 접촉- 소위 말하는 늦게 성숙하는 자들에게는 내적으로 거의 파탄나지 않는- 은 조숙한 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경험 속에서의 상상력의 과부하에서 잘 보여지는 이러한 나르시스적인 충동이 바로 그(조숙한) 자의 성숙을 지연시킨다. 사후에 비로소 그는 종래의 예견 속에서 과도하게 축소되었던 상황들, 불안들, 열정들을 폭력적으로 경험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그가 가진 나르시시즘과의 갈등 속에서 그를 병적으로 지치게 한다. 그렇게 그는, 그가 전에는 아주 경미한 노력으로도 극복하였던 유치함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것은 이제 자신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미성숙하게 되고 이제 그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다른 자들-그들에게 기대되었던 바대로 단순하고 고지식했던 자들-이 성숙해 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예전에 조숙했던 자들에게 이러한 불균형이 닥치는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조숙한 자는 열정에게 구타당한다; 아주 오랫동안 자기충족의 안전함 속에 안주하고 있었던 그는 예전에 스스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둔 그곳에서 (이제) 대책 없이 비틀거린다. 조숙한 자의 수기가 까닭없이 그 미숙성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조숙자들은 이제 자연적 질서에 불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사회가 노력과 결과의 동일성의 명백한 부정인 그들을 불신하는 것처럼, 짖꿎은 건강은 그들 조숙자를 위협하면서 고소해 한다. 사회의 내적인 경제 속에서 무의식적이지만 가차 없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여했던 부러움 섞인 찬사가 (그들에게 이제) 형벌이 되어 돌아온다. 기만적인 선량함으로 내밀어 졌던 손길들이 이제 취소된다.


 

여전히, 심리적인 운명 속에는 모든 것들이 응보적으로 보상된다는 하나의 심급은 언제나 깨어 있다. 개별적인 법칙은 언제나 등가 교환이라는 고통을 주는 그림(퍼즐)인 것이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본 해당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101. 온실 식물

조숙한 사람과 늦게 성숙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가 오갈 때 전자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소망이 언급되지 않을 경우는 설득력이 없다.

빨리 성숙하는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산다. 그의 경험은 선험적이며, 형상과 사물을 만지는 예감적 감수성은 나중에 보면 사실이었음이 드러난다. 스스로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듯이 보이는 그런 예견력은 외부 세계에서 물러서며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신경질적이며 유희적인 색깔을 부여한다. 조숙한 사람이 노련한 사람을 능가하려면 그를 따라잡으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데 이러한 강박감은 정상적인 사람들 같으면 도덕적 명령으로 치장하는 강박감이다. 자신의 표상으로 점유된 공간을 대상들과의 관계에 부여하려면 많은 고생을 해야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 자체도 배워야 한다.

 

비자아와의 접촉은, 소위 늦게 성숙하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내부 교란을 일으키지 않지만, 조숙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곤혹이다. 경험 속에서 상상력이 차지하는 비중의 지나친 비대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적 경향은 그의 성숙을 지연시킨다. 그는 발생한 상황, 불안, 열정들을 나중에야 비로소 아주 강렬하게 겪으며 그것들은 자신의 나르시시즘과 갈등을 겪으며 소모적인 열병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그것은 유치증에 빠지는데, 이러한 유치증은 예전에는 별 힘 안 들이고 극복한 것이지만 이제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는 성숙하지 못한 것이 되고, 인생의 매 단계마다 응당 보여야 할 모습을 보였던 다른 사람들은 -약간 고리타분한 것이긴 하지만-성숙한 것이 된다.

 

그는 열정에 의해 타격을 당한다. 안전한 자급자족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빈둥댔던지 그는 자신의 공중 다리를 멋지게 만들던 곳에서 무기력하게 비틀거리게 된다. 조숙한 사람들은 자연적 질서에게는 골치덩어리인데, 그들이 위험에 처하자 짖궂은 건강이 그들을 희롱하며, 사회는 성공과 노력의 일치에 대한 명백한 부정인 그들을 불신한다. 그들은 내면세계의 경제성을 갖고 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에게 항상 선사하고 싶은 징벌이 무의식적으로, 가차없이 수행된다. 그들에게 기만적 호의로 제공된 것은 취소된다. 심리적 운명 속에서도 모든 것에 대한 대가가 치러졌는지를 감시하는 기관이 작동한다. 개인적 법칙은 등가 교환의 퍼즐 맞추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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