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황석영을 비롯한 저명한 문화예술인들이 야권단일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더군요.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들으니 단순히 단일화를 촉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단일화를 추진하는 협상테이블을 만드는 과정에도 직접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더군요.

그 뉴스를 들으면서 지나간 몇번의 대선 정국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려풋한 기억이지만 1987년 선거전 초반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그래도 DJ와 YS중 하나는 후보를 사퇴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떻게 이룬 직선제 선거인데 설마 지들끼리 다투다 망하기야 하겠어' 라는 생각을 한 거죠.
물론 YS 지지자들은 DJ가, DJ 지지자들은 YS가 사퇴할 거라고 서로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지만 말이죠.^^

그러다가 분위기가 이거 끝까지 4자 대결로 갈 것 같으니까 재야단체와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단일화추진단체가 만들어졌죠.
대표는 문성근씨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였고, 당시 날고 긴다는 재야단체 명망가들이 다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단체에 속한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친DJ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은 단일화를 핑계로 YS를 주저앉히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만날 때마다 친YS성향의 이재오, 이부영 같은 사람들하고 친DJ진영 사람들 사이의 말싸움만 반복하다가
아무런 성과도 못내고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죠.

결국 선거는 선거대로 노태우에게 완패하고 그 과정에 민주진영조차 YS파와 DJ파로 갈리면서
서로 으르렁대는 후유증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2012년의 단일화 촉구모임을 보면서 약간 걱정이 드는 게 그런 겁니다.

원탁회의인지 원로회의인지에서 최근 몇번의 선거에서 야권단일화를 중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문화예술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 같은데
이게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대통령 선거이기 때문에
제3자들이 왈가왈부하며 나선다 해서 단일화가 명쾌하게 이루어질 것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어제 나선 문화예술인들도 분명히 친문재인파와 친안철수파로 나뉘어서
단일화 촉구과정에 알게 모르게 그런 성향들을 드러낼텐데 
괜히 좋은 일 하자고 모였다가 나중에 서로 얼굴도 안보고 사는 사이로 갈라서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1987년처럼 이번에도 단일화없이 그냥 끝까지 3자 대결로 갈 것이라는 어떤 강한 위험신호(?)가 감지되었기에
이 양반들이 급하게 자기 이름 내걸고 나선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도 들고 말이죠.

암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 게 당연지사라 단일화를 하더라도
양측이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이처럼 개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쓸데없는 논란만 키우면서 일을 더 힘들게 만들지 않을까란 생각도 드는군요.

그리고 설령 단일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그 효과가 과연 2002년 선거만큼 폭발적일지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2002년의 경우 단일화에 적극적인 사람은 2등 후보였던 정몽준이었죠.
단일화가 추진된다면 여론지지율에서 노무현보다 7-8%는 앞서는 자신이 후보가 될 확률이 높았고,
노무현을 주저앉히고 민주당 세력을 배후에 둔다면 쉽게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테니까요.

반면 민주당과 노무현은 그 반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선뜻 단일화에 나서기 힘든 상황이었구요.  
그렇기 때문에 이회창과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도 야권단일화는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었었죠.

몇년전 어느 여론조사 전문가의 블로그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3등 노무현 후보가 자기에게 가장 불리할 수도 있는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 방식을 수용하여
정몽준과 후보단일화를 합의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지율이 급격히 반등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대략 정몽준 25% 안팎, 노무현 17-20% 정도의 지지율 추세였는데 노무현이 단일화를 전격 제안한 11월초부터
또다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바보 노무현',  '대의를 위해 자기를 버릴 줄 아는 멋진 남자 노무현'이라는 프레임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정몽준을 급격히 추격하기 시작했고, 이 추세를 통해 11월말 후보등록 직전 이루어진 
여론조사에서 극적으로 정몽준을 역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물론 이회창 지지자들의 역선택도 일부 있었겠지만).
그리고 이 추세를 몰아서 본선에서도 이회창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번 2012년의 단일화는 2002년과는 그 모양새가 많이 다르죠.
야권지지 유권자들 누구나 다 단일화를 예상하거나 기원하고 있으며 새누리당도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게 2002년과 다르고
단일화에 적극적인 후보도 2등이 아닌 3등 후보라는 게 2002년과 다릅니다.

만약 이번 단일화에서 안철수가 이기면 누구나 예상했던 당연한 결과가 되는 것이어서 깜놀할 분위기도 아닐 것 같고,
반면 문재인이 역전을 시킨다해도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문재인', ' 헌신과 희생의 아이콘 문재인'이라는 프레임이
살아날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모바일 착신부대의 흑마술 때문 아니냐는 비아냥이 난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여권후보는 과거사 밖에 화제거리가 없고  야권은 단일화 말고는 화제거리가 없는 선거가 되어버렸는데
이미 노출될대로 노출된 화제거리 가지고 유권자들에게 무언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황석영 씨가 유권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멋진 단일화방안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얘기하던데
이게 '황구라'의 구라로 끝나지 않기를 한번 기대해봅니다.
이게 구라로 끝나버리면 단일화가 성사되어도 박여사를 이기기는 사실상 힘들어보이기 때문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