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심리학이 현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비판도 상당히 유행하는 것 같다.

 

진화 원리는 유전적 운명을 함축한다. 그것은, 개인을 제한하는 자연적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사회적 상황의 영향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교훈은? 어떤 사회 체제, 교육 계획 또는 양육 계획도 현 상황(status quo)을 바꿀 수 없다.

Evolutionary principles imply genetic destiny. They de-emphasise the influence of social circumstances, for there are natural limits constraining individuals. The moral? No possible social system, educational or nurturing plan can change the status quo.

(Dorothy Nelkin, Less Selfish than Sacred? Genes and the Religious Impulse in Evolutionary Psychology, Alas, Poor Darwin: Arguments Against Evolutionary Psychology, 22)

 

 

 

진화 심리학이 어떤 측면에서는 운명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어떤 심리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선천적 인간 본성이라면 그 심리 기제는 거의 운명이다. 이것은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과 마찬가지다. 유전자 이상, 자궁 내 환경 이상, 사고 등으로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닌 사람이 존재하긴 하지만 통상적으로 인간은 손가락이 열 개가 되도록 자라게 되어 있다.

 

또한 인간의 잠재력에는 생물학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 상황의 어떤 측면은 운명일 것이다. 예컨대 현재 인간은 도구 없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현 상황의 이런 측면은 인간의 운명인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이 복잡한 10차원 도형을 컴퓨터의 도움 없이 머리 속에서 그리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엄청나게 변해왔다. 노예제, 왕정, 노골적인 성차별 등이 사라진 나라가 많다.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도구 없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다”와 같이 변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노예제처럼 변한 측면도 있다. 선진 산업국의 현 상황 중 어떤 부분이 변할 수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변할 수 없는지 정확히 알아내기는 힘들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선천적 심리 기제들이 수천 년 동안에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뿐이다. 심리 기제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행동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심리 기제가 작동하려면 보통 입력 값이 필요한데 그것은 환경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입력 값에 따라 심리 기제의 출력 값이 다르기 마련이며, 심리 기제의 출력 값이 다르면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 상황 중 어떤 측면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상황과 관련된 온갖 선천적 심리 기제들을 확실히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심리 기제들에 입력될 수 있는 온갖 값들을 몽땅 고려한 후, 그 입력 값들에 따른 심리 기제들의 상호작용들까지 다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도구 없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다”처럼 직관적으로 뻔해 보이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뻔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뻔해 보이지 않는 측면에 대해 규명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일부 저명한 진화 심리학자들이 “인간 본성상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라는 식의 섣부른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진화 심리학 자체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덕하

2012-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