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 독일어 원본에 따른 번역을 인터넷판 영역본에 맞춰 살짝 손질했습니다. 


Gaps (By Theodor W. Adorno)

빈틈들 (테어도르 W. 아도르노)


* 출처: Theodor W. Adorno, Minima Moralia (Suhrkamp Verlag, Frankfun am Main 1951) 의 인터넷판 영역본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adorno/1951/mm/ch01.htm 50



The demand that one should be intellectually honest amounts mostly to the sabotage of thought. It means to hold authors accountable, to explicitly portray all the steps which led them to their conclusion, and thus enable every reader to follow the process along and, where possible for example, in academia to duplicate it.


지적으로 정직해야 한다는 요구는 대개 사유에 대한 사보타지로 귀결된다. 그것은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계들을 명시적으로 기술하고 그리하여 모든 독자가 그 과정을 추적하고 가능한 한 예를 들어, 학술적 작업에서 그것을 복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저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을 의미한다.


Not only does this operate according to the liberal fiction of the popular, general communicability of every thought and inhibit its factually appropriate expression, but is also false as a principle of representation [Darstellung]. For the worth of a thought is measured by its distance from the continuity of what is familiar.


이 요구는 모든 사상의 용이한, 즉 보편적인 소통가능성이라는 자유주의적 허구에 따라 작동하고 실상에 적합한 사상의 표현을 저해할 뿐 아니라 하나의 서술원칙으로서도 허위적이다. 왜냐하면 사상의 가치는 친숙한 것의 연속성으로부터의 그것의 거리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It is objectively devalued by the diminution of this distance; the more it approaches the previously established norms, the more its antithetical function disappears, and its claim is founded only in the latter, in the apparent relationship to its opposite, not in its isolated existence. Texts which anxiously undertake to document every last one of their steps, decay unavoidably into what is banal and into a boredom which relates not just to the tension during the reading, but also to its own substance.


이 거리의 단축과 함께 사상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줄어든다. 그것이 사전에 주어져 있는 규준에 근접할수록 그것의 안티테제 기능은 그만큼 더 사라지는데, 사상의 주장은 그 기능 속에만, 그것의 고립된 현존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대립물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만 근거를 두고 있다. 안달하며 모든 단계를 빠트림 없이 기록하려는 저작들은, 독서 동안의 긴장에만이 아니라 저작들 자신의 실체와 관련해서도, 어쩔 수 없이 진부함과 지루함에 떨어지게 된다.


Simmel’s texts, for example, suffer everywhere from the incompatibility of their distinctive objects with the painfully lucid treatment. They establish what is distinctive as the true complement of that mediocrity which Simmel wrongly believed to be Goethe’s secret. But far beyond this, the demand for intellectual honesty is itself dishonest. Even if one followed for once the dubious instruction, that the representation [Darstellung] ought to model itself precisely on the thought-process, then this process would no more be one of discursive progress from step to step, as the reverse, that insights fall to the seeker of knowledge from heaven.


예를 들어, 짐멜의 저작들은 모두 그것들의 독특한 대상들과 곤혹스럽게 투명한 취급의 양립불가능성을 겪는다. 그것들은 독특한 것을 짐멜이 부당하게 괴테의 비밀이라고 믿었던 그 평범성의 진실한 보완물로 내세운다. 더 나아가 지적 정직에 대한 요구 그 자체가 부정직하다. 서술이 사유과정을 정확하게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심스러운 지침을 한번은 용인한다 하더라도, 이 과정은 단계에서 단계로의 논증적 진행의 과정은 아닐 것이다. 역으로 통찰이 하늘에서 인식자에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Cognizing involves on the contrary a network of prejudices, intuitions, innervations, self-corrections, assumptions and exaggerations, in short in dense, grounded experience, which is by no means transparent in all places. Of this the Cartesian rule, that one should only turn to objects, “to whose clear and undoubted knowledge our mind [Geist] seems to suffice,” including all order and disposition which relates to such, gives as false an account as the opposing doctrine of the apperception [Wesenschau], which is nevertheless inextricably entwined with the former.


인식은 선입관, 직관, 신경반응, 자기교정, 가정 그리고 과장 속에서, 요컨대 촘촘한, 탄탄한, 그러나 결코 모든 단계가 투명하다고 할 수 없는 경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규칙과 연관된 모든 질서와 구성을 포함해서, “그에 대한 명석하고 의심의 여지없는 인식을 얻는 데 우리의 정신이 충분해 보이는대상들에게로 우리 자신을 향하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데카르트의 규칙은 그 규칙과 정반대가 되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는 유사한 본질직관론처럼 [인식에 대한] 허위적 해명을 내놓고 있다.


If this latter denies what is logically right, which in spite of everything validates itself in every thought, then the former takes what is logically right in its immediacy, in relation to every individual intellectual act and not as mediated through the stream of the entire life-consciousness of the cognizer. Therein however lies simultaneously a confession of deepest inadequacy. For if the honest thought unavoidably amounts to mere repetition whether of what is already known, or of categorical forms the one which renounces the full transparency of its logical genesis for the sake of the relationship to its object, always incurs a certain guilt. It breaks the promise which is posited with the form of the judgement itself.


본질직관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유 속에서 관철되는 논리적으로 옳은 것을 부인한다면, 데카르트의 규칙은, 인식자의 전체 의식적 삶의 흐름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채, 규칙의 직접성 속에서, 모든 개별적 지적 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논리적으로 옳은 것을 얻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시에 가장 깊은 부적합성의 시인이 놓여있다. 왜냐하면 정직한 사유가 불가피하게 단순한 반복으로 -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의 반복이든, 또는 범주적 형식들의 반복이든 -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의 대상과의 관련을 위해 그것의 논리적 발생의 온전한 투명성을 포기하는 사유는 언제나 일정한 죄책감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판단의 형식 자체와 함께 정립되어 있는 약속을 파기한다.


This inadequacy resembles that of the life-line, which runs on bent, diverted, disillusioning according to its premises, and yet solely in this course, because it is continually less than what it should be, may it portray under the given conditions of existence an unregimented one.


이 부적합성은 삶의 행로의 부적합성과 유사한데, 그 행로는 그것의 전제들과 대비할 때 구부러진 채, 틀어진 채, 환멸을 겪으며 진행하지만 언제나 그것이 이어야 하는 것 이하인 이러한 진행 속에서만 주어져 있는 현존 조건들 아래서 편제되지 않은 삶을 대변할 수 있다.


If life fulfilled its determination straightaway, then it would forfeit the latter. Whoever died in old age and in the consciousness of a guiltless, as it were, success, would secretly be the model pupil, who completes every grade with an invisible backpack, without gaps. Every thought which is not idle, however, remains marked by the impossibility of the full legitimation, as we know in dreams, that there are mathematics lessons which we miss for the sake of a blissful morning in bed, which can never be made up. Thought waits for the day that it is awakened by the memory of what was omitted, and is transformed into teaching.


삶이 직선적으로 그것의 규정을 이행한다면, 그 삶은 그 규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늙어서, 말하자면 나무랄 데 없이 성공했다는 의식 속에서 죽었던 이들은 비밀리에 보이지 않는 배낭을 지고 모든 단계들을 빈 틈 없이 마치는 모범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게으르지 않은 모든 사유에는 하나의 표지처럼 완전한 정당화의 불가능성이 내접한 채 남아있다. 그것은 마치 침대 속에서의 황홀한 아침을 위해 빼먹은, 결코 만회될 수 없는 수학 시간들이 있다는 것을 꿈속에서 아는 것과 같다. 사유는 어느 날인가 빼먹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신을 깨워 자신을 가르침으로 변형시켜주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