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화평론이 기여하는 바가 현 시대에 맞는, 작품에 대해 평가하고, 이를 대중이 향유하는데 있어 새로운 가치와 관점을 발견하거나 제시하는 ...이에 기여하는 폭넓은 지적행위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나아가 평론가에게 있어 대상-작품은, 평론 내에서는 무언가 자기 발언을 대리하는 제 3자적인 입장에 처해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점에서 평론가는 대상을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어떤 권위-어떤 작품이든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인 듯이 보이게 된다. 이런 일련의 오해가 작품 해석에 대한 일련의 독자성을 가정하는 오해까지 수반하게 한다. 그러나 특정한 평론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각 평론들이 지니고 있는 해석들이 일련의 연계 속에 구성되는 것에 지나지 않음도 알게 된다. 그 일관성-그 주관적인 철학적 관점. 
(그가 지니고 있는 철학적 관점에 의해 작품이 해석되는가? 물론, 아니다.)

그는 작품을 매개로 시대의 가치관 속에서 어떤 사회적 현상과 상징에 연관짓고 그것을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오함을 -나아가 상징에 대한 해석에 대해 감탄하는 대중은 일정 정도는 이를 믿는다.(아니 그 권위를 믿는다. 동시적으로 말이다. 이 둘은 구별지을 수 없는 것이다.ㅋㅋㅋ) 그리고 그 권위는 '평론가의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이는 악순환이다. (-평론가는 결코 객관의 위치에 서있을 수 없다. 그것을 과장하지도 내세우지도 않는다. )

평론가와 작품 간에 일정하게 벌어져 있는 거리감과 그 정도를 그 측정할 수 없는 객관적 입장에 처한 평론가와 창작자의 개인적인 작품 - 서로 간의 배타적인 불화의 지점으로 받아들인다. 그 거리감은 심오하고 지극히 철학적이며, 그렇게 보이도록(보이기까지) 한다. 그가 신경쓰는 것은 오직 그 거리감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평론가는 그 숭고함 속에서 그것을 소비하며, 해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성이 과장되어 있는 순수한 언어적 효과에 지나지 않음도 알고 있다. 그것이 다양하기는 커녕 말 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 안된다는 것을 대중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서로의 앎의 문제는 일치하지 않는다. 진정 불화하는 것은 평론가와 대중일 뿐이다. 
(문화 평론이 기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무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이제 그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나는 알수가 없다.)

평론가는 작품에 대해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지운다. 그 거리감을 유지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직접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정된 객관적 권위-진리가 위에서 그 공간을 울리는 여운을 통해 말한다. - 그런데 나는 작품에 대해 말하며, 나는 그 무엇도 아님을 아무런 존재도 아님을 알고 있다. 

어떤 자의식도 이를 통한 그 배치도 작품과 주관적 거리감 속에 존재하지 않음을 - 그것의 조작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하위를 무마할 수 없음을.. 오직, 그것에 관계하고 그것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자격은, 일정 동의하고 공유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고, 믿고 있는 일련의 가치체계가 폭넓은 권위의 근거임을 
.. 그것이 이미 통속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나는 말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대리하고 있는 하나의 주관의 위치에 지나지 않음을 말이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생각하였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의 권위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평론이 평론다워짐을..

평론가가 작품의 주관성을 침해하고 그것을 세세하게 드러내는 행위와 그 속살을 휘저어 표면으고 떠오르게 하는 행위, 결국 나타나는 것은 작품 전체를 구성하고 있던 서사와 의미의 구성이 하나하나 해체되고,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상징조작들이 - 어떤 비유와 은유에 연원하는 것인지 나아가 서사적 구성과 배치의 방법까지 의미체계 속에 드러나 보이도록 하는 것.. 드러나고 심판받는 것은 작품과 매개된 현 시대의 자치체계들임을... 결국 평론가는 평론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는 것도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닌 대상-작품이 현재 위치하고 있는 가치체계 내의 어떤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대한 것일 말할 뿐임을 

어떤 분석에서든 대상에 대해 기실 작가는 일정한 거리 유지과 일련의 배치를 통해 공간감 속에서 이를 분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리감이 - 실제로는 객관적인 태도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드러나는 것은 그 자신의 동의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 그 철학적인 선택의 문제를 수반한 나아가 일련의 상징조작에 대한 해석들이다.
(평론은 대상-작품에만 속해이다기 보다는 사회전체의 가치체계와 담론들에 일정하게 - 정념과 통념에 기대어 제시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그래서 그것은 작품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닌 <대상-작품-시대의 가치체계>가 관계하여 아울러 묘사하는 평론가의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관의 중간지대의 텅빈 마당 속에서 버무려지는 자기 분투의 독백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원초적인 오해가 평론가의 권위를 나름 - 그 자체로 권위있는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 이를 믿어도 그만이고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회의주의자다. 동시에 어떤 기능주의의 함정에서 쉽사리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작품을 즐기는데 있어 평론가의 역할은 실제 별다른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못한다. 평론가는 평론이라는 작품을 대상을 통해 생산하는 이들일 뿐이다. 그래도 대중은 그들이 작품의 소비하는데 일정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오해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 오직 요구되는 것은 이런 '광범위한 오해'에 의한 대중의 소비이고 문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조차 하나의 대상이 될 뿐임을.... 그렇게 그에게 있어 사건은 어떤 독자성 지니고 있는 중단된 과정임을... 즉 그가 늘 경험하는 어떤 허위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정한 자기 강박 뿐이다.

그렇게 결국 포기해야 하는 것은 객관주의 - 좋게 말해 객관이지 실상은 자기 확신이다.-이고, 평론에 임하는 이의 자기 권위이다.
문화평론은 일정 이런 허위를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일정하게 어느 특정한 대상-작품이 현시기에 관계하고 우발적으로 기여하는 그 재반 현상까지 알 수가 없다. 그가 해야할 책무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어떤 권위와 의지에 의해 말하는 순간 ..그는, 명백히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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