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들을 위한 나라는 있다!

                             

                                                                      The Snob by Martine Roch 


         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


일견 옳게 보이지만 읽다보면 꽤나 불편한 글이 있다.
노정태님의 <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도 그러한 글이다.
"여성들은 매일 가혹하게 평가 당한다. 너네들도 외모로 평가 당해보니까 기분 더럽지? 그러니까 평가하지말고 살아 이거뜨라!"
한줄 요약해보면 이렇다.

그런데 말이다, 이 글이 과연 루저녀에 대한 올바른 변호글이 되는 것일까?

물론 루저녀에게 쏟아지는 정도를 넘어선 비판, 그리고 인신 공격, 나아가 스토킹에 가까운 불법적인 신상조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글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런 과도한 비난을 감쇄한다는 것은 의미 있다.그러나 그런 변호도 최소한의 논리적 정합성은 갖추어야 한다.

<여성의 외모 평가는 정밀하게 개발되었으나 남성의 외모에 대한 엄밀한 기준은 없다.
꿀벅지라는 단어를 보면서 여성은 매일 자신의 다리가 신경쓰이나 남성들은 초콜릿 복근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냥 거울 한번 보고 웹서핑 한다.
외모는 주관적인 것이니까 나같은 외모를 좋아할 천사가 어느 곳에는 있을 것이고,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는 판타지는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아니, 이런 주장이 진정 그녀를 위한 변호로서 올바르게 작동하는 한다고 믿는 것일까?

물론 나는 노정태님의 결론에 동의한다. 인간의 외모를 양화하는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문제의식을 느껴보자? 그래 난 백만번 그러한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말이다? 노정태님이 변호하는 루저녀는 그런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문제의식을 느껴야하는 의무감에서 배제되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을 내재화 해서 매일 자신의 외모에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대다수의 여성들은 그런 문제의식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좀 더 나아가 보자.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은 과연 외모의 양화로만 끝나고, 그래서 대다수 남성들은 그런 한국사회의 화법에서 희생자가 아니거나 혹은 덜(?) 희생자인 것일까?

물론 외모의 평가에 있어서 남성은 좀 더 자유롭다는 것은 쿨하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화법을 충실하게 내재화된 많은 여성들이 남성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주 가혹하게 양화하여 평가하지 않나? 아니 양화할 것도 없다. 연봉, 아파트 평수, 타고 다니는 차량의 CC수는 양화하고 어쩌고 할 것 없이 깔끔하게 숫자로 제시되는, 빼도 박도 못하는 그 남자의 가치로 환산되고 있지않나? 그녀들은 어떤 주관도 개입할 여지 없는 남자의 가치보고서를 집어들고 그들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루저로 판단하고 갖다 버릴 것인지 결정하는 것 아닐까? 키 180이상인 남자들의 퍼센티지처럼 이같은 가치판단서에서 자유로운 남자들의 비율도 그리 높지 않다. 그들이 직면한 가혹한 평가는 노정태님에게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던져주지 않는 것일까?

문화적 판타지? 지금 자신의 통통한 배를 옹호하는 남성들의 판타지가 많을지, 여성들의 신데렐라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문화컨텐츠가 많을지 굳이 인터넷통계자료를 뒤질 필요가 있을까? 도대체 최소한의 사실적 근거는 갖추어야 하지 않나?


"한국 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문제의식을 가져할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을 내재화하는 속물들에 대해서 공평하게 문제의식을 가지라고 권유하자는 말이다.

백번을 양보해서 남자들이 매일 같이 여성들에 대하여 가혹한 평가만을 하고 있다고 인정한다고 하면 그녀가 한 말의 진리치가 T로 바뀌는 것인가? 그렇다면 보수언론이 매일 같이 민주당, 진보신당의 약점을 캐내어 공표하면 한나라당의 실정도 무마되는 것인가? 물론 현실 정치에서 물타기 수법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보수언론은 끊임없이 그런 기사를 게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법이 옳다고 해서는 안된다.

좋은 글재주로 약자를 옹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엉뚱한 논리로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의 책임을 남성에게 돌린다 해서 그 화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더러운 화법은 언제나 우리에게 속물이 되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남성이 속물이 되어서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속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녀와 그들이 받았을 그 많은 사교육과 공교육의 결과물이 고작 속물의 양성이라면 그건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슬픈 일이 아닌가.

물론 대한민국은 속물들이 인정받는 나라다. 어느새 공중파에서 사회적 차별이 담긴 언어를 사용해도 될 것이라고 가정할만큼 대한민국은 변해버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시대의 자본주의가 이 땅의 가치관에 미친 영향이다. 그리고 그 영향을 남자들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속물들을 위한 나라가 있다. 여기, 바로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