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pp. 370-1.


쇼아라는 주제로 돌아가서, 위의 두 가지(통치하는 신, 유한한 신)에 더하여, 고뇌하

는 신이라는 세 번째 입장을 살펴보자: 그는 비록 은밀하게 모든 것을 주관하므로 "그

의 방식들이 신비롭지만," 결국은 이기고야 마는 승리하는 신이 아니다; 그는 - 십자

가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와 같이 - 인간의 비참과 연대하여 고통의 짐을 지는, 괴로

워 하는 신이다. 셸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은 단순히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운명이 있으며 고통과 생성에 종속된다. ... 인간적으로 고통받는

신이라는 개념 없이는 ... 역사 전체가 이해불가능한 것이 된다." 왜 그런 것일까? 신

의 고통은 그가 단지 저 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초월적 주인이 아니라 역사에 참

여하고 있으며, 역사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신의 고통은 인

간의 역사가 단지 그림자의 극장이 아니라 현실적인 투쟁, 절대자 자신이 참여하여 절

대자의 운명이 결정되는 투쟁의 자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쇼아 이후에는 "이제

오직 고통 받는 신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심오한 통찰

이 가진 철학적 배경이다. 이는 "신만이 여전히 우리를 구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에 대한 진정한 보충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600만명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은 또한 고통 받는 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라는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

다: 모든 "정상적인" 인간의 기준을 넘어서는 이러한 고통의 과잉 자체가 그것을 신

성하게 만든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 역설을 간결하게 형식화했다: "지향된 실체를 제거하는 세속의

언어는 아픔을 남긴다. 죄가 과실로 인정되고 신의 명령의 위반이 인간 법률의 위반으

로 변할 때 무엇인가가 상실된다." 이것이 쇼아나 굴락과 같은 현상에 대한 세속적-인

간적 반응이 부적절한 것으로 경험되는 이유이다: 그러한 현상의 층위에 있기 위해서

는 더욱 강력한 무엇, 세계 자체가 "탈구"된 우주적 도착 또는 재난이라는 전통적인

종교적 주제와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쇼아 같은 현상에 대면할 때 유일하

게 적절한 반응은 혼란스러운 질문이다: "왜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았을까요?" (이는

쇼아에 관한 아르노 마요르의 유명한 책의 제목이다) 이것이 쇼야에 대한 신학적 중요

성이 가진 역설이다: 비록 쇼아가 일반적으로 신학에 대한 궁극적 도전으로 인식되지

만(신이 현존한다면 그리고 그가 선하다면 어떻게 그는 그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도

록 관망한 것일까), 이 파국의 범위에 어떻게든 접든하도록 만드는 준거를 제공하는

것은 오직 신학 뿐이다. 신의 대실패는 여전히 신의 대실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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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다수가 거의 진심으로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을 하고 살았던
적이 있다. 서구인들의 '하느님 맙소사'도 비슷한 심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늘이 어
두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식하고 소박한 자연주의자들에게는 신의 부재의 증명인 반
면 신의 명령의 위반이 인간 법률의 위반으로 변할 때 [진정으로 인간적인] 무엇인가가
상실된다고 느끼는 - '믿는'이 아니라 - 이들에게는 신의 대실패의 증명이다. 물론 신의
'대실패'는 여전히 '신'의 대실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