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다음 글을 읽어야 이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자유가 있어야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나?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446

 

 

 

진화 심리학에서 “folk psychology”, folk physics”, “folk biology” 같은 용어를 쓰는데 번역하기도 까다롭고 오해의 소지도 있다. “folk”를 “통속”, “민간”, “대중”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진화 심리학에서 쓰는 이런 용어는 그냥 “민간에서 통한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선천성을 함축한다. 인간에게는 심리 현상, 물리 현상, 생물 현상 등을 다룰 수 있는 선천적 심리 기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 선택의 산물이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folk physics에 대한 연구를 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아기들은 “고체가 서로 겹칠 수 없다”는 점을 아는 듯하다. 마술 트릭을 사용해서 고체가 서로 겹치는 듯한 장면을 보여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오래 쳐다보는데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것이 놀라움의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비슷한 실험으로 folk mathematics에 대해서도 상당한 규명이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심지어 folk ethics에 대한 연구까지 이루어졌다. Paul Bloom과 동료들은 8개월 밖에 안 된 아기가 상당한 수준의 도적적 판단을 한다는 점을 상당히 인상 깊게 보여주었다.

 

규범의 선천성을 입증하는 Paul Bloom의 연구

http://cafe.daum.net/Psychoanalyse/HS9E/208

 

 

 

folk psychology는 마음 이론 모듈(Theory of Mind Module, ToMM)과 거의 비슷한 말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또는 다른 동물)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천적 심리 기제가 있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자유 개념에 매혹되는 이유는 folk psychology 때문인 것 같다(진화 심리학자가 비슷한 말을 한 것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확실치 않다). 물리 세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인간이 설계된 것 같다. 물론 자연 선택이 설계한 ToMM이 완벽하리라고 기대할 이유는 없다. 자연 선택은 경쟁하는 기제들 중에 번식에 더 이로운 것을 고를 뿐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완벽한 기제가 진화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컨대 맹점이 있는 눈은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다. 눈과 같은 매우 정교한 구조를 만들어낼 만큼 자연 선택은 대단한 장인이다. 하지만 신은 아니다.

 

 

 

인간의 folk physics는 “고체는 꽉 차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도록 설계된 것 같다. 꽉 차 있기 때문에 고체끼리는 겹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선사 시대의 생존과 번식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 과학의 발견과는 거의 정면으로 모순된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의 대부분은 빈 공간이다.

 

ToMM의 경우에도 현대 과학의 발견과는 부합하지 않는 측면들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folk psychology는 “마음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도록 설계된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각 기관으로부터 오는 정보가 마음으로 들어가며 마음이 몸의 운동을 일으킬 수 있지만 생각 자체는 물리 세계로부터 독립해서 일어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뇌 자체의 작동 역시 물리적 현상이며 몸 밖에 있는 공의 움직임만큼이나 물리 법칙에 종속된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입장이다.

 

어쨌든 ToMM 때문에 사람들은 현대 과학을 배우지 않는다면 물리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마음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한편으로는 육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종교를 믿게 되기 쉬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키는 도덕 철학을 받아들이게 되기 쉬운 것 같다. 인간은 ToMM 때문에 이원론을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ToMM에 대한 진화 심리학자들의 이야기가 맞다면 「자유가 있어야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나?」에서 내가 한 주장을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자유를 들먹이는 칸트류의 도덕 철학은 자연 선택이 설계한 folk psychology를 바탕으로 논리를 편다. 반면 나는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논리를 편다. 그런 면에서 나의 도덕 철학이 더 현대적이다.

 

나의 도덕 철학은 과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과학으로부터 도덕 정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이다.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진화 심리학 첫걸음마 --- 010. 자연주의적 오류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3fZ/258

 

 

 

나는 나중에 「진화 윤리학이 도덕 철학자에게 길을 제시할 것이다」라는 글을 쓸 생각이다. 여기에서도 과학이 도덕 철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역설할 생각인데 이번에도 “과학으로부터 도덕 정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와는 다른 이야기다.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해 쉽게 생각해서 “사실(과학)에서 당위(도덕 철학)를 끌어낼 수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그리는 것보다 상황은 훨씬 복잡해 보인다. 과학은 도덕 철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덕하

2012-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