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다음 글을 읽어야 이 글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과학: 추측과 논박(포퍼)」 비판 노트: 06.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HFl/105

 

 

 

포퍼는 어떤 과학 명제가 절대적 진리임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입증할 수 없는 반면 어떤 과학 명제가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과학자의 실수나 조작 같은 요인을 무시한다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포퍼에 따르면 어떤 과학 명제에 부합하는 증거를 아무리 많이 댄다 해도 그 명제가 절대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반면 그 명제와 모순되는 증거를 하나만 댈 수 있어도 그 명제는 절대적으로 반증된다. 이것이 포퍼가 중시하는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이다.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은 절대적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뒤엠-콰인 테제(Duhem–Quine thesis)와 미결정(underdetermination)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조하라.

 

Two Dogmas of Empiricism

Willard Van Orman Quine

http://www.ditext.com/quine/quine.html

 

La théorie physique son objet et sa structure

The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Pierre Duhem

 

Demystifying underdetermination

Larry Laudan

http://www.mcps.umn.edu/philosophy/14_12Laudan.pdf

 

나는 Larry Laudan(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중구난방이었다)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하나의 이론 A로부터 실험 가능한 예측을 바로 유도할 수는 없다. 다른 이론들 B, C, D 등이 있어야 그런 예측을 유도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직접적 관찰이라고 느끼는 시각상도 사실은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시각 처리 기제 속에 암묵적으로 내포된 “이론들”의 산물이다. 물자체에는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어떤 예측이 실험 결과와 모순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A, B, C, D 등으로 이루어진 체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 체계 중 어떤 이론에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A에는 문제가 없는데 B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A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B, C, D 등이 절대적 진리임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포퍼가 옳게 주장했듯이 그런 절대적 입증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절대적 입증은 불가능하지만 절대적 반증은 가능하다는 포퍼의 믿음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절대적 입증이 불가능하다면 절대적 반증도 불가능하다. 나는 이런 면에서 콰인이 포퍼를 제대로 비판했다고 본다.

 

 

 

하지만 콰인을 비롯한 무수한 철학자들이 미결정 테제에서 출발하여 과학의 객관성 자체를 무시하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만약 수학적 절대성을 추구한다면 과학 명제는 절대적 입증도 불가능하고 절대적 반증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절대성을 포기하면 문제가 아주 달라진다. 진리(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에 근접하기 위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과 주관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방법을 가를 수 있으며 전자를 과학으로 후자를 미신 또는 사이비 과학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콰인은 포퍼만큼이나 절대성에 집착한다. 포퍼는 절대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반증 가능성이라는 기준 하나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콰인(그리고 콰인을 인용하는 온갖 부류의 상대주의자들)은 절대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모든 이론의 평등을 주장했다.

 

물론 절대성을 염두에 두면 모든 이론은 평등하다. 즉 어떤 이론도 절대적으로 입증될 수 없고 어떤 이론도 절대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는 면에서 평등하다. 하지만 절대성을 포기하고 “근사적 진리”라는 애매한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이론들은 그리 평등하지 않다.

 

 

 

이덕하

2012-09-14